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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세 일기(1945년 8.15에 꾼 꿈)

빠꼼임 2020. 1. 21. 08:21

김형석의 100세 일기

[Why] 1945년 8·15에 꾼 꿈

조선일보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꿈에 해변가 창고마다 일본 사람들 시신이 가득했고
무척 큰 태양이 지고 있는 데 서쪽이 아닌 동쪽 산이었다
깨어나 평양 시내로 갔더니 "무조건 항복" 일왕의 방송이…
1945년 내가 스물다섯 살 되는 해 8월 15일. 날씨는 맑았고 더위도 심하지 않았다. 27~28도 정도였을까.

전날 밤, 나는 언제나처럼 비슷한 시간에 잠들었다. 누구의 안내를 받아 갔는지는 모른다. 평안남도 진남포 해변가였다. 도시도 인적도 보이지 않는 바닷가에서 마우리(Mowry·한국명 모의리) 선교사를 만났다. 말없이 나를 이끌고 큰 창고 앞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시신들이 작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모두가 일본 사람들인데 바닷물을 먹은 때문인지 퉁퉁 부어 오른 주검들이었다. 그 옆에도 같은 크기의 창고인데, 선교사를 따라가 창고 문을 열었더니 마찬가지 모습이다. 쌓여 있는 시체들 속에는 대학 동창이었던 E군과 또 다른 친구도 있었다. 철학과 동기인 일본 친구들이다.

정말 충격적인 꿈이었다. 그 놀라운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장면이 너무 선명하게 남았다. 그러고 잠들었는데 다시 새벽녘에 꿈을 또 꾸었다.


1945년 8·15에 꾼 꿈
오른쪽 산 위로 무척 큰 태양이 넘어가면서 지고 있는데 서쪽이 아닌 동쪽 산이었다. 저렇게 붉고 큰 태양이 어떻게 동쪽 산으로 내려가는가, 하고 놀라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한없이 넓은 농토 한가운데서 소에 연장을 메우고 밭을 갈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옥토였다. 평생 걸려도 다 갈지 못할 정도로 넓은 땅이었다. 곧 어둠이 찾아올 것 같은데….

두 번째 꿈이었다. 식구들이 모여 조반을 먹을 때 꿈 얘기를 했다. 듣고 있던 부친이 내 얼굴을 보면서 처음 듣는 얘기를 했다.

"내가 네 나이쯤 되었을 때 꿈을 꾸었다. 동쪽 산 위로 태양들이 떠올라 오는데 다른 때와 같은 해가 아니고, 고무공 같은 작은 태양이 수없이 많이 올라와 우리 땅에 가득 차더라. 그리고 얼마 후에 소위 한·일 합방이 되니까, 일장기가 우리나라 전 지역을 가득 메우더라. 혹시 오늘 무슨 소식이나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평양까지 가보고 오도록 해라."

평양 도심지까지 갔으나 아무 변화도 없었다. 전차를 타고 시청 앞에 갔을 때였다. 낮 12시 정각이었다. 길가에 있는 가게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다. 뛰어내려 가게로 들어섰다. 일본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국내외 모든 지역에
서 전쟁을 끝내고 일본군은 무조건 항복한다"는 방송이었다. 믿기 힘든 사실이었으나, 내 귀로 직접 들었으니까,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미국에 항복한 것이다.

20리(8㎞)가 넘는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나는 그 넓은 땅을 갈아 밭으로 바꾸어야겠다고. 지금 돌이켜 보면 교육계에서 한평생을 보내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17/201808170173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