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대질 대신 기립박수 보냈다, 김예지의 ‘물고기 연설’
‘이런 게 국회’ 보여준 대정부질문
14일 오후 3시 20분쯤 대정부 질문이 열린 국회 본회의장. 이 순간 끝없이 이어지는 고성도 없고 야유도 사라졌다. 오히려 여야 의원들의 기립 박수가 있었다. 시각장애인인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의 발언 순서였다.
시간이 되자 김 의원은 안내견 조이와 함께 본회의장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날 오전 예행 연습으로 익힌 ‘바닥의 느낌’을 더듬으며 단상 근처에서 멈추고는 의장에게 인사한 뒤 국무위원들을 향해 섰다.
이날 대정부 질문에선 “후쿠시마 오염수를 총리와 직계가족도 같이 마시겠는가”식의 흑색 질문이 난무했다. 그러나 김 의원은 어항의 크기에 따라 몸집이 달라지는 물고기 ‘코이' 얘기를 했다. 그는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사회적 약자의 성장을 가로막는 다양한 어항과 수족관이 있다. 정부가 더욱 큰 강물이 되어주길 기대한다”고 했다.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의 14일 국회 대정부 질문은 ‘민의(民意)와 행정의 절충점 찾기’라는 제도 본연의 목적에 충실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밑바닥의 이야기를 전하고, 행정부와 함께 법·제도적 대안점을 찾아가는 과정을 잘 보여줬기 때문이다. 최근 대정부 질문은 자극적인 언행을 통해 지지층의 환심을 사는 수단으로 변질된 상태다.
김 의원이 이날 정치적으로 민감한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문제를 장애인의 시각으로 고발한 것이 대표적이다. 김 의원의 발언에 어떤 야당 의원도 고성을 지르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는 검수완박으로 고발인의 이의신청권이 폐지된 점을 지적했다. 장애인의 경우 학대 피해 사실을 인지조차 못하는 경우가 있어 제3자의 고발을 통해 경찰 수사가 시작되곤 한다. 이때 석연치 않은 불송치 결정을 받았다면 장애인 시설 관계자 등 고발인의 이의신청권을 통해 따져야 한다. 그러나 검수완박으로 검찰에 이의신청을 할 수 없게 됐다. 장애인 학대 범죄 사실 자체가 묻힐 수 있는 위험성을 경고한 것이다.
김 의원이 이와 관련해 “법무장관님 발언대로 나와주십시오”라고 하자, 한동훈 장관은 발언대로 올라와 김 의원이 알 수 있도록 “김 의원님 한동훈 법무부 장관 나와있습니다”라고 했다. 이어 검수완박과 관련해 “자원봉사자 같은 분들이 장애인에 대한 학대 범죄를 고발하더라도 경찰이 어떤 이유로 사건을 불송치하게 되면 그 이후에 검찰의 스크린(재점검)을 제대로 받을 수 없게 된다”며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해야 할 어떤 공익적인 이유도 저는 찾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또 장애인의 형사소송을 돕는 제도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는 점도 지적했다. 한 장관은 “(장애인 학대 피해자를 돕는 법이) 여러 곳에 산재돼 있고 하나로 모아져 있지는 않다”며 “의원님이 발의한 40페이지 가까운 장애인 학대 특례법 제정안을 상세히 살펴봤는데, 이렇게 (산재된 법을) 모으는 시도가 상당히 필요해 보인다”고 했다.
김 의원은 중간중간 연단에 놓은 점자 자료를 만지며 정부의 장애인 정책을 질의했다. 보좌진과 회의를 통해 정리한 내용을 기록한 점자 자료다. 김 의원에게는 국회법에 따라 추가 시간 6분이 주어졌다. 장애를 가진 의원이 대정부 질문에서 추가 시간을 받은 건 이번이 세 번째로 14년 만이다.
한 장관에 이어 한덕수 국무총리를 호출하자, 한 총리 역시 큰 소리로 “네, 국무총리 발언대에 나와 있습니다”라고 답했다. 김 의원이 한 총리에게 “우리 정부의 첫 예산을 보면 장애인 예산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 만큼 나름의 성과가 있다고 볼 수 있는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장애계와 언론 등에서 아주 인색한 평가를 받는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한 총리는 “작년에 4조800억원 정도의 장애인 예산이 있었지만 올해에는 4조5400억원으로 11% 정도 늘었다. 그럼에도 부족하게 느껴진다면 더 노력하겠다”고 했다.
김 의원은 마지막으로 코이라는 물고기를 소개했다. 그는 “(코이는) 환경에 따라 성장의 크기가 달라진다는 코이의 법칙으로도 알려져 있다. 작은 어항 속에서는 10㎝를 넘지 않지만 수족관에서는 30㎝까지 그리고 강물에서는 1m가 넘게 자라나는 그런 고기”라면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기회와 가능성, 성장을 가로막는 어항과 수족관을 깨고 국민이 기회의 균등 속에서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강물이 돼주시기를 기대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소외된 분들을 대변하는 공복으로서 모든 국민이 당당한 주권자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김 의원의 질문이 끝나자 여야 의원들은 이례적으로 기립 박수를 쳤다.
그는 본지 통화에서 “내가 신경 쓰는 이슈는 장애인의 날이 아니면 기사에도 안 나오는, 핫하지 못한 이슈들이다”라며 “우리 세상에는 그런 게 더 많다. 내가 대변해야 하는 분들은 이런 분들이다”라고 했다.
그의 대정부 질문에 야당도 찬사를 보냈다. 박광온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15일 “(김 의원의 대정부 질문이) 큰 울림을 줬다”며 “우리 사회에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의 기회와 가능성, 성장을 가로막는 다양한 어항과 수족관이 있다는 아픈 지적에 적극적으로 공감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민주당이 입법과 예산, 정책으로 응답하겠다”고 했다. 당대표를 시작으로 여야 정치인 간의 막말과 설전이 오가고, 상대방에 대한 소송을 불사하는 상황에서 야당 원내대표가 여당 의원을 치켜세운 건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전문가들도 높이 평가했다. 김성수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장관 같은 행정가는 일반 국민들의 삶과 거리감이 있기 때문에,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밑바닥의 문제를 끄집어내 이들에게 대안을 마련토록 하는 게 대정부 질문의 본래 목적”이라며 “김 의원의 대정부 질문은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지금은 이 제도가 강성 지지층이 ‘카타르시스’를 얻도록, 장관들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변질됐다”고 지적했다.
과거에도 모범 사례는 있었다. 지난 2월에 있었던 류호정 정의당 의원과 한동훈 장관은 ‘비동의 강간죄’ 입법을 놓고 토론을 벌였다. 당시 류 의원은 비동의 강간죄 입법 필요성을 주장했고, 한동훈 장관은 반대 의견을 내며 맞붙었지만,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오히려 화제가 됐다. 이용우 민주당 의원도 당시 한기정 공정위원장과 화물연대의 성격을 놓고 법리 논쟁을 벌였다. 화물연대에 대한 제재가 정당한가에 대한 민감한 논쟁이었지만, 차분한 토론으로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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