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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재

빠꼼임 2024. 9. 7. 12:23

연극도 잘하면 철학… "이제 '라스트 댄스'를 기다린다"

[아무튼, 주말]
[김아진 기자의 밀당]
연기 인생 70년 바라보는 현역 최고령 배우 이순재

이순재(90)가 7일 서울 대학로에서 개막하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 연습실에서 소품용 모자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배우는 선택받아야 하는 직업이고, 기다림은 숙명이다. 그는 “이 나이에 무슨 꿈이 있겠냐”며 “주어진 역할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쉬지 않고 달려왔다. TV를 틀면 나오던 배우들이 무슨 이유에서든 하나둘씩 사라져도 이 남자는 꾸준히 자리를 지켰다. 때로는 내 아버지였고 때로는 내 할아버지였다. 수십 년을 함께 울고 웃었다.

영원한 현역, 대한민국 최고령 배우 이순재 얘기다. 그의 나이 아흔. 내년에 연기 인생 70년을 맞는 이순재가 올해도 대학로 무대에 오른다. 작년에 연극부터 드라마까지 일이 겹치면서 쓰러진 적도 있던 터라 주변에서 “제발 좀 쉬시라”는 잔소리를 했지만 그는 아랑곳없다.

“무대는 내 생명입니다. 내가 존재하는 의미죠. 오늘도 제가 연습을 하러 오지 않았어봐요. 집에 드러누워 자고 있을 거 아니에요? 내가 생명을 유지하는 터전이 바로 무대예요.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이순재가 주연하는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가 7일 대학로에서 개막한다. 사뮈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오마주한 희극이다. ‘고도를 기다리며’ 속 주인공의 대역 배우들이 무대 뒤 분장실에서 자기 차례를 한없이 기다리면서 마주하는 삶의 질문들을 담아냈다.

연습이 한창이던 지난달 그를 만나자마자 ‘지금 뭘 기다리고 있느냐’고 물었다. “우리 나이야 당연히 라스트댄스(last dance)를 기다리는 거죠. 그리고 마지막 날이요, 하하.” 담담했다. “가깝게는 공연을 앞두고는 관객을, 드라마 시작을 앞두고는 시청자를 기다리는 거고요. 평생을 해도 항상 긴장되고 설레는 일이에요.”

처음부터 꿈이 배우는 아니었다. 돌아보면 모든 기운이 그를 배우의 길로 이끌었다. “대학 1학년부터 연극을 하다 보니 조금씩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잘한다는 얘기를 못 들었다면 연기는 안 했을 거예요. 그런데 또 잘한다고 해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됐는데, 솔직히 좋아서 한 거죠. 다시 태어나도 배우가 되고 싶어요.”

7일 대학로 예스24스테이지에서 개막한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의 한 장면. 이 연극은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 중인 극장의 분장실을 배경으로 언제 무대에 오를지 모르는 채 대기해야 하는 대역 배우들의 이야기다. /파크컴퍼니

◇배우가 될 운명이었나 보다

이순재는 고교 1학년 때 6·25전쟁을 겪었다. 피란을 다니다 대전에 정착했다. “그때 이후 학창 시절이 싹 날아가버렸어요. 그래도 공부는 해야겠고. 명문 대전고에 가서 청강을 했죠. 서울대 입학도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내려가 있을 때죠. 어찌어찌해서 철학과를 갔는데 마침 나에게 딱 좋은 과였던 거예요.”

–원래 꿈은 뭐였나요.

“정치학과에 가려고 했어요. 뜻이 있기도 했고 서울대에서 가장 점수가 센 곳이니까 도전해보고 싶기도 했고. 그런데 뚝 떨어졌죠.”

–그래서요?

“골방으로 들어가 이듬해 다시 시험을 봤죠. 떨어질까 봐 무서워서 조금 낮춰 철학과를 썼어요. 가서 보니까 거두 석학들이 다 계셨죠. ‘딴생각하지 말고 이분들 체취만 열심히 맡고 나가도 대학 다닌 보람이 있겠구나’ 했어요. 진짜 열심히 다녔어. 어느 정도냐면 교통비가 없었어요. 용산 청파동에 살았는데 (서울대가 있던) 대학로까지 걸어다니기도 했으니까요. 그만큼 학교를 좋아했어요.”

–전공이 배우를 선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겠네요.

“대학 4학년 때 주임교수가 고건 전 총리 아버지인 고형곤 교수였어요. 내가 ‘연극 준비로 2주 합숙 훈련을 해야 한다, 그래서 수업에 빠져야 한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그래, 연극도 잘하면 철학이야’ 그래요. 다른 동료 중엔 그런 식으로 해서 졸업을 못한 친구들이 더러 있거든. 멋있는 분이었지. 그런 것들이 음으로 양으로 정신에 영향을 미쳤고 배우가 된 거죠.”

1934년 함경북도 회령 출생인 이순재는 서울대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1956년 연극 ‘지평선 너머’로 데뷔했다. 그는 “존경하는 영국 배우 로런스 올리비에 말마따나 영화는 감독의 예술, 드라마는 작가의 예술,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며 “연극은 내가 표현하기 나름이라 마음가짐부터 다르다”고 했다. /이태경 기자

–어쨌든 ‘난 배우가 되겠어’라고 마음먹고 한 일은 아니네요.

“관심만 있었지, 구체적인 생각은 없었어요. 대학 시절 영화를 많이 봤어요. 그러다가 어느 날 누가 공연이나 한번 해봐라 하면서 배역을 줘요. 그게 유진 오닐의 ‘지평선 너머’ 속 노역(老役)이었어요.”

–주인공은 아니었네요. 연기를 잘했나요?

“단역이었죠. 1막 3장이 내가 ‘하하하하’ 호쾌하게 웃는 걸로 시작하는데 호흡이 짧으니 될 리가 있나. 그때 연출 선생님이 닷새가 지났는데도 진척이 별로 없으니까 마뜩잖아하더라고. 조연출이 가만 있으면 되는데 ‘분위기도 안 좋은데 연습 그만하시죠’ 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대본을 찢으면서 화풀이를 해요. 그런데 사실 원인 제공은 나잖아요. 그 길로 나가서 죽도록 연습했죠.”

–어떻게요?

“서울대 문리대 빈 강의실을 찾아 창문으로 기어들어갔죠. 하루 종일 음역대 높인다고 노래 부르고 소리 지르고 미친듯이 웃어보고. 안 하면 극복이 안 되니까요. 그때부터 대본은 빨리 다 외워버렸어요. 그렇게 연극을 올렸는데 옆에서 그래요. ‘잘했네’라고. 그 소리를 안 들었다면 연기는 안 했을 거예요. 정 하고 싶었다면 연출을 했겠지.”

–대학 때 취미로 연극을 한 것과 직업으로 배우를 하는 건 다른 문제잖아요.

“그렇죠. 사실은 연기가 좋아서 했어요. 제대를 하고 보니 같이 연기하던 동료들은 이미 스타가 돼 있더군요. 물론 육법전서 들고 산에 들어가 고시 공부라도 했으면 뭐라도 됐겠죠. 그럴 단계는 지났고 이쪽에 심취는 해 있고. 마침 드라마센터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올린다는 거예요. 거기서 머큐쇼 역할을 하면서 본격적인 배우의 길에 들어섰죠.”

–집에서 반대 안 했나요?

“부모님한테 연락할 체면이 없었죠. 남동생은 은행원으로 번듯하게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거든. 연극 ‘시라노 드 베르쥬락’를 할 때였어요. 느닷없이 대전에서 아버지가 올라온 거예요. ‘이거 꼭 해야겠냐?’고 그래요. ‘이제는 별거 없습니다. 시작을 했으니 이 길로 끝을 보겠습니다’ 했죠. 아버지가 ‘허허’ 웃더니 ‘뭘 하든 일류가 되면 밥은 먹지 않겠느냐’고 해요. 일종의 승인이었죠. 내가 좋다고 매달리니 어떻게 하겠어요. 그때부턴 서울에 오시면 용돈도 주고 가셨죠.”

이순재는 “배우에게는 인기 스타의 길과 액팅 스타의 길이 있다"고 말한다. "껍질을 벗어야 나비가 되는데 인기 스타는 애벌레 때부터 인기와 돈을 얻는다. 후배들이 거기 안주하지 않기를 바란다. 젊은 배우들을 보면 양아치나 깡패 연기는 천재적으로 잘하는데 지적 표현은 안 된다. 연기력을 다듬고 힘이 축적되기까지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껍질을 벗고 날아오를 수 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배고팠지만 행복했다

스타는 아니었다. 주인공만 했다든지, 엄청난 팬덤이 있다든지, 돈방석에 앉았다든지 하는 신기루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저 꾸준했다. 연극, 영화, 드라마 등 몇 편을 했느냐고 물으니 “에이, 그걸 내가 어떻게 기억해”라고 할 정도로 숱한 인물을 연기했다. ‘TV만 틀면 이순재가 나오네’란 말까지 있었다. 신비롭지 않았고 상복도 없었다. 그는 어쩌면 그래서 변함없이 존경받는 어른의 자리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신비주의 배우가 있어요. ‘오, 보기 힘든 사람이 나왔네’ 하면서 이목을 집중시킬 순 있겠죠. 하지만 저는 달라요. 관객 하나하나가 소중해요. 이 나이까지 인기가 없었어 봐. 누가 사진이라도 찍어 달라고 하나요? 그 자체가 고마울 뿐이죠. 대신 연기로 신비성을 발휘하면 될 일이니까요(웃음).”

–연기를 쉰 적이 없죠?

“왜냐면 생계 수단이었으니까요. 우리 때는 드라마 하나, 영화 하나 찍어가지고는 어림도 없었어요. 영화도 동시에 5~6편 계약하고 찍어야 먹고살았죠. 출연료가 뻔하니까요. 톱스타 신성일씨를 봐요. 지금 단가면 몇 조원은 벌었을 거라고. 그렇게 많은 작품을 했는데 마지막에 보니 별로 재산이 없는 것 같더군요. 그게 우리네 상황이었다고. 지금처럼 호화판이 아니었으니 쉴 틈이 있나요.”

–8년간 정치할 때도 연기는 계속했잖아요.

“그때는 가능했어요. 서울 중랑갑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서 한 번은 떨어지고 14대 총선에서 당선됐죠. 그때 히트한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 등을 찍었죠.”

–정치해 보니 잘 맞던가요?

“너무 힘들었죠. 국회의원은 머슴이어야 해요. 그 노릇이 어디 쉽습니까? 그 인식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안 돼요. 또 지역구 어디에서 불이 나면 나 때문에 난 거예요. 여당이란 게 그런 겁니다. 한마디로 그 8년을 ‘하늘의 푸르름과 꽃의 아름다움은 한 번도 느끼지 못했다’ 이렇게 표현하죠. 그래서 행복한 자리로 돌아간 거예요.”

–작품을 400편 정도 한 것 같더라고요.

“세어보진 않았어요. 어떤 때는 내가 저 영화 찍었나 싶기도 해요(웃음). 주연도 있지만 조연도 있고 단역도 많이 했으니까요.”

–상과는 인연이 없나 봐요.

“그해에 나보다 좋은 연기를 한 배우가 있으면 못 받는 거거든요. 배우 제임스 메이슨을 봐요. 1954년 작 ‘스타 이즈 본’에서 알코올 중증 환자 역할을 그렇게 잘해냈지만 아카데미상을 못 받았거든요. 상은 그런 거예요.”

 

–그래도 서운할 것 같은데.

“늘그막에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를 찍었잖아요. 그거 하고 났더니 주변에서 그래요. 이번엔 상 받겠다고. 그런 줄 알고 시상식에 떡 하니 앉아 있는데 젊은 배우를 주더라고, 하하. 웃자고 하는 소리예요.”

–아직도 상 탈 기회는 많잖아요.

“이 나이에? 그냥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이순재가 2006~2007년 주연한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

–70년을 했으니 못 해본 역할은 없겠어요.

“사기꾼, 내시 이런 건 안 해봤어요. 범죄자는 해봤지. 1965년에 TBC에서 방영한 ‘형사수첩’을 나 때문에 이 바닥에 들어온 허규가 연출했다고. 하루는 고민을 엄청해요. 왜 그러냐고 물으니까 소녀 강간치사 사건을 해야 하는데 범인을 아무도 안 하려고 한대요. 그래서 ‘내가 해줄게’ 그랬죠. 한번 해주니까 섭외가 막히면 나한테 오는 거야. 그래서 범인만 33번을 했죠.”

–그런 역할도 했군요.

“그 드라마에 형사를 맡은 배우들은 다 명예형사증을 받았는데, 나는 안 주대요. 그래서 ‘저도 하나 주세요’ 했죠. 형사가 아니라서 못 준다는 거지. 그래서 제가 ‘내가 없었으면 이 프로가 존재할 수가 없어. 내가 33번이나 범인을 한 사람이야. 이거 왜 이래?” 했더니 주더군요, 하하.”

–이순재 하면 ‘꽃보다 할배’ ‘거침없이 하이킥’을 빼놓을 수 없는데.

“모두 좋은 추억이에요. 저는 해외에 놀러가본 적이 없어요. 단 한 번도. 사실 꽃할배 하기 전엔 걱정을 많이 했어요. 신구, 박근형, 백일섭 다 만만치 않잖아요. 그런데 볼 게 너무 많으니까 한 번도 싸움이 없었어요. 좋~았죠.”

–왜 쉬질 않나요?

“계속 역할을 주는데 즐겁게 받아서 하는 거죠. 배우의 행운은 좋은 작가, 좋은 배우와 일하는 겁니다. 결과까지 좋으면 가장 행복하고요.”

–관객도, 시청자도 같이 늙어왔습니다.

“세월에 대한 인식이 없어요. 드라마 하나 하면 6개월, 1년이 넘어가잖아요. 평생을 그렇게 살다 보니 몰랐어요. 어차피 젊었을 때도 노역을 많이 했잖아요. 지금 그 역할을 희석하면서 살고 있다 생각해요.”

인터뷰가 끝나고 연습실로 향하는 이순재. 작년에 연극과 드라마 등이 겹쳐 10kg이 빠지는 바람에 옷이 헐렁해 보였다. 그는 “이 옷도 30년 전에 산 것”이라며 “양복 맞춘 지 40년은 된 것 같은데 뭐 어떠냐. 이게 편하고, 남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열심히 했다면 그걸로 충분

연극 무대는 가장 가깝지만 아직도 겁나는 곳이다. “실수가 용납되지 않으니까요. 내가 실수하면 막을 내려야 해요. 누가 대체할 수가 있겠어요. 내 대사가 시작이자 끝인데요.” 셰익스피어 4대 비극(햄릿·오셀로·맥베스·리어왕)을 못 해본 게 가슴 한편에 남았다. 그래서 2021년, 2023년 ‘리어왕’을 무대에 올렸다. “젊은 햄릿은 타이밍을 놓쳤고, 군인 맥베스는 체격이 작으니 안 됐어요. 남은 게 리어왕뿐이더군요. 원형 그대로를 하자고 했어요. 대사가 400~500마디라 힘들었지만 저를 테스트한 거예요. 두 달 전부터 외기 시작해서 연습 들어갈 땐 대본을 안 보고 했죠.”

–무대를 잠시 떠나기도 했죠?

“극단 산하에서 강부자 등과 연극을 올렸는데 당시 영화 때문에 무지하게 바빴어요. 딱 섰는데 대사가 가물가물해요. 연습이 불충분한 거죠. 상대 배우한테 ‘나 믿지 말라’고 했어요. 대본을 무대 들어가는 입구 피아노 위에 올려놓고 보고 가고 보고 가고 했죠. 간신히 끝내긴 했지만 이건 아니었죠. 그래서 한 5~6년은 쉬었어요.”

–그래도 다시 돌아왔네요.

“우리는 시작이 연극이에요. 연기의 기본도 연극으로 터득했죠. 배우는 우리말의 정형을 제대로 구사할 수 있어야 해요. 그게 의무예요. 저는 국어사전을 펴놓고 연기를 했어요. 단어의 발음, 길이 등을 엉터리로 하면 그건 배우가 아니에요.”

–‘리어왕’은 만원 사례를 기록했는데.

“사실 겁났어요. 손님 안 들면 망하는 거잖아요. 규모도 꽤 있었으니까요. 다행히 수익이 나서 빚도 갚고 했대요.”

'리어왕'의 이순재는 “리더란 무엇인가 묻는다는 점에서 이 연극은 시대를 초월한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정치를 권력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대통령도 국민이 위임해준 자리다. ‘국민의 머슴’이 되겠다는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덧붙였다. /파크컴퍼니

–이번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기다리며’를 선택한 이유라면.

“전에도 제안을 받았는데 전위극이라서 심심하더라고. 다시 대본을 읽어보니 나름대로 묘미가 있어요. 신구랑 박근형이 이미 ‘고도를 기다리며’로 대박을 터뜨리는 바람에(웃음).”

–부담이 된다는 뜻인가요?

“아니, 아니, 그건 그 두 양반의 업적인 거고. 나는 또 젊은 친구들과 함께 내 길을 가야죠.”

–젊은 배우들과 함께하는 건 어떤가요.

“최민호, 카이 둘 다 아주 잘해요. 옛날에 젊은 배우들은 끝날 때까지도 극을 잘 이해 못한 채로 연기하곤 했어요. 그런데 요즘 친구들은 거의 비슷하게 다 해요. 좋은 연극이 될 것 같아요.”

–무대 오르기 전엔 매번 긴장된다고요?

“나는 열심히 했고 관객이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만 남은 거죠. 그런데 신경 쓸 필요가 없어요. 거기에 매이면 안 되고, 최선을 다하면 된다는 심정으로 해야죠. 평가는 관객들 몫이고.”

–내년 70주년엔 특별한 계획이 있나요?

“스스로는 별 계획이 없어요. 그런데 주변에서 벌써 극장 빌려놨다고 해요. 박근형과 더블로 ‘세일즈맨의 죽음’을 올리려고요.”

연습실에서 젊은 배우 못지않은 에너지를 발산하는 이순재. “배우 인생 70년 동안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관객과 나눌 수 있어 기쁘다. 똑똑한 젊은 배우들과 함께하니 나이를 잊고 에너지가 채워진다.”

◇아내만 남더라

젊은 시절엔 한 달에 닷새쯤 집에 들어갈 정도로 가정에 소홀했다. 연기에 미쳤으니까. 아내는 늘 뒤에서 그를 챙겼지만, 좋은 남편, 좋은 아빠는 아니었다. 생활고에 시달려 (한국무용을 전공한) 아내가 서울 동부이촌동에 ‘코끼리만두’란 분식점을 내 생계를 책임지기도 했다. “연기를 몇 개월 쉬면 돈이 없으니까 애들 돌반지 팔아서 10평짜리 가게를 냈죠. 잘됐어요. 프랜차이즈 같은 걸 했으면 돈 좀 벌었을 거예요. 재테크 감각이 없어서....” 낭비는 해본 일이 없다. “외모 치장요? 해봤자 이 얼굴이 뭐 이 얼굴이죠. 평생 이발소, 사우나 가는 거 말곤 없어요. 지금 입고 있는 옷도 30년 된 거 같은데요. 백화점은 가본 지 오래고 양복도 맞춘 지 40년은 된 거 같네요. 이대로 편한데요. 남의 시선 따윈 신경 안 써요.”

–어느 인터뷰에서 ‘2층짜리 상가도 없다’고 했잖아요. 댓글에 ‘거짓말 아니냐’고들 해요.

“만두 가게 하다가 처 삼형제가 빌딩을 하나 샀어요. 거기서 중국집을 했죠. 근데 손님들이 날 자꾸 찾으니까 일에 방해가 되더라고. 그러던 중에 작은 처남이 빌딩을 담보로 사업을 하다가 싹 날려먹었지. 아내는 지금도 속상해하는데 나는 그래요. ‘그 빌딩이 내 것이라고 생각해본 일이 없다. 잊어라.’ 그 뒤론 거금을 번 적이 없으니 빌딩 살 돈도 없었죠.”

–아내가 생활력이 강했네요.

“역시 부부밖에 없다는 걸 새삼 느껴요. 제가 치매에 걸렸다고 생각해봐요. 누가 돌봐주나요. 딸이? 며느리가? 그래서 황혼 이혼은 이해를 못 하겠어요.”

–아직도 외손주들 학비를 내준다고요?

“그래서 저는 아프면 안 돼요. 아직은, 하하.”

–작년에 쓰러진 적 있잖아요.

“‘리어왕’ 끝난 다음다음 날이었어요. 골프 약속이 있었는데 도저히 힘이 들어 못 가겠다고 하고 집에 있다가 목욕탕에서 넘어진 거죠. ‘늙은이가 죽는 게 이런 거구나’ 했죠. 진짜 죽는 줄 알았으니까.”

–무슨 생각이 들던가요.

“그래도 ‘리어왕’을 잘 끝내서 다행이다 했어요. 안 그랬으면 나 때문에 공연이 중단됐을 테니.”

–바로 드라마 ‘개소리’ 촬영도 들어갔죠?

“병원에서 머리는 멀쩡하다고 하니까 그런 줄 알았죠. 대사는 외울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한 달 만에 체중에 10kg 이상 빠졌어요.”

–연극 연습까지 하는데 괜찮나요?

“힘들죠. 그래도 어떻게 해요, 맡은 건데. 하려면 제대로 해야죠. 그게 나와의 약속, 날 기다리는 관객과의 약속이잖아요.”

–지금도 꿈이 있나요?

“꿈을 꿀 나이는 아니지 않습니까? 주어진 내 역할을 착실하게 해 나가는 거죠. 앞으로 얼마나 더 역할이 주어질지 모르지만 최선을 다해야죠. 이번 연극도 걱정되긴 해요. 혹시 내가 쓰러지면 어떻게 하지 싶어요. 건강하게 끝냈으면 하고요.”

이순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다고 했다. “극 속에서 수없이 죽어보기도 했지만 죽음은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어요? 누구나 나고 죽는데요.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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