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세 동갑내기, 백선엽 장군을 떠나보내며
조선일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20.07.25 03:00 | 수정 2020.07.25 06:39
[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일기
일러스트= 김영석
지난 주말이었다. 경북 안동에 사는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도 자유수호의 영웅이던 백선엽 장군의 분향소가 차려져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고 한다. 헌화하면서 '나같이 이름 없는 국민 한 사람도 이렇게 마음이 아픈데 백 장군의 친구인 김형석 교수의 슬픔은 얼마나 클까'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 1월 조선일보에 실린 사진을 스크랩해 두었는데 그것을 가슴에 안고 엎드려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고 했다. 내가 백 장군과 '문무(文武) 100년의 대화'를 하고 장군의 휠체어를 밀어주는 장면을 촬영한 사진이었다. 나도 참고 있던 눈물을 닦았다.
사실 나와 백 장군은 오랜 사귐을 갖지 못했다. 나이는 같고 고향도 가까웠다. 백 장군보다는 내가 더 오래 그분을 존경해 왔다. 나는 교수다운 교수로 살고 싶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백 장군은 한평생을 군인다운 군인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조선일보 주선으로 백세가 되어 서로 만났을 때 내가 장군의 고향인 평남 강서의 약수터 얘기를 했다. 그가 놀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면서 "우리 고향에 간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약수를 받기 위해 어려서 어른들을 따라가기도 했다는 얘기를 듣고는 90년 전 고향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환하게 웃을 수가 없었다. 우리 둘 다 해방 후에는 고향에 가지 못하는 실향민이 되었다는 공감대가 있었을 것이다.
아직도 친일파 얘기가 나온다. 일제강점기에는 모든 분야에서 일본인보다 앞서는 사람이 존경스러운 애국자였다.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안익태와 무용가 최승희가 그래서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최승희는 북한에 남았기 때문에 애국적 무용인으로 존대받고, 대한민국 현충원에 잠든 안익태에게는 친일 누명을 씌우곤 한다. 몇 해 전 안익태의 부인과 따님이 서울을 방문했을 때 점심을 같이했다. 세상 떠나기 전 남편의 무덤을 한 번 더 찾아보고 싶어서였다. 남편과 아버지의 나라 대한민국에 대한 이 모녀의 애정과 자부심은 우리보다 더 간절했다. 스페인에는 안익태 거리가 있을 정도이다.
백 장군은 나보다 7개월 늦게 태어났다. 24세를 넘기면서 해방을 맞았다. 그때부터 76년간 대한민국을 위해 헌신했다. 영웅이라는 명예를 바친다면 그는 영웅 중의 영웅이다. 대한민국 군인 중의 군인이었다. 나 같은 위치의 국민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의 애국자였다. 백 장군이 대한민국을 사랑한 것은 군인이었기 때문만이 아니다. 6·25 참전용사들과 함께 피를 흘리며 수호한 그 자유세계가 전쟁 후 번영하는 과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 즉 자유를 위해 생명을 바친 영웅들이 있었기에 자유 민주국가에 사는 영광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 서울 현충원의 많은 전우와 백 장군 주변에 잠들어 있는 영웅들의 희생정신을 감사히 받들어야 한다. 백 장군은 우리는 물론 후손과 민족 전체를 위해 산 선구자의 한 사람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7/24/202007240259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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