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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세 일기[지금 어떤 꿈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빠꼼임 2020. 9. 12. 15:41

 

[김형석의 100세일기] 지금 어떤 꿈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아무튼, 주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20.09.12 03:00

 

 

일러스트=김영석

지난달에 있었던 일이다. “30대 젊은이들의 모임이 있는데 강사로 와 달라”는 청이었다. 내 막내딸이 60대 중반이다. 청중과 60~70년 격차를 생각하면서 좀 망설였다. 회원의 절반이 여자들인데 남자들보다 더 열성적이라고 해서 응하기로 했다.

70분 정도 강의를 하고 대화시간을 가졌다. 첫 질문이 “지금도 선생님께서는 어떤 꿈이 있는가”였다. 뜻밖의 얘기여서 당황스러웠으나 다음과 같은 설명을 했다.

“꿈은 세월의 여유가 있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가능할 때 갖게 된다. 그런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 짧고, 나 자신을 위한 희망은 다 끝난 것 같다. 그래도 10년이나 50년 후에는 이런 국가와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은 있다. 그 소원은 여러분의 꿈이 될 수 있겠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 그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사실 나는 꿈이 주어지지 못하는 세월을 살았다. 14세 때 철들면서 극심하게 가난했고 희망이 없는 병약자로 자랐다. 꿈보다는 다른 사람들처럼 50, 60까지 살았으면 좋겠다는 가냘픈 소원을 안고 인생의 길을 출발했다. 그 소원은 버림받지 않았다. 지금까지 일하고 있으니까.

많은 사람의 꿈은 20대에 찾아온다. 그러나 나는 꿈 많은 세월을 또 빼앗겼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지 못하는 일제강점기를 살았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을 끝내게 되는 무렵에 학도병으로 일본 군대에 끌려가야 할 절망의 강에 직면했다.

25세에 해방을 맞았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이제는 내 꿈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했다. 비로소 내 인생의 출발선에 서게 되었다. 교육자로 한평생을 마치겠다는 결심을 했다. 인생의 봄인 지금부터 시작해 교육의 밭을 갈고 씨를 뿌리자는 꿈이었다. 그러나 그 꿈도 험난했다. 2년 동안 공산 치하에 살면서 공산사회의 교육은 빙판 위에 씨를 뿌리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대한민국의 품을 찾았다.

 

 

2년 반 후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내 꿈은 나를 위한 것이 될 수 없고 사회, 겨레와 더불어 가능하다는 역사적 시련에 부딪혔다. 나는 다시 새로운 선택을 놓고 고민했다. 나에게 주어진 책임이 중고등학교 중심의 교육인가, 학문을 통한 정신적 지도자가 되는 길인가? 그때 몇 대학의 초청을 받았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교수다운 교수로 여생을 바치자’는 꿈을 확정지었다. 30대 중반의 결정이다.

지금 내 강의를 요청해 온 세대들과 같은 나이였다. 그래서 강의와 대화에는 공감대가 있었던 것이다. 나는 60여 년 동안 그들 앞에 서서 최선의 길을 걸어 온 셈이다. 교수다운 교육자로 살고 싶다는 긴 꿈의 여정이었다. 그날 내 강의 마지막은 ‘지금도 나는 열심히 씨를 뿌리고 있다. 그 씨알들이 여러분의 꿈이 되어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소원 때문이다. 나는 꿈보다 소원의 시대를 살았으나 여러분은 스스로의 꿈을 안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