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아파트가 빵이라면”
입력 2020.12.02 03:18
유명 건축가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공간에 대한 남다른 철학으로 기념비적 건물과 미술관 같은 주택을 설계한 사람이다. ‘저런 건축가는 자기 집을 얼마나 근사하게 짓고 살까’ 싶어 물어봤는데 멋적은 표정으로 그가 대답했다. “아파트 살아요, 편해서.”
▶아파트가 고급 주거 공간으로 이미지를 굳힌 건 1971년 동부이촌동에 지어진 한강맨션아파트 분양 때부터다. 1호 계약자가 탤런트 강부자였고, 그 뒤로 배우 고은아, 가수 패티김 등이 입주했다(전상인 ‘아파트에 미치다’). 1974년 대한주택공사가 지은 반포단지는 강남 개발의 신호탄이었다. 2008년 무렵부터 단독주택을 누르고 우리나라의 가장 보편적인 주거 형태가 됐다. 국민 절반이 아파트에 산다.
▶몰(沒)개성의 획일화된 주거 공간이라는 비판도 많지만 대한민국의 아파트 사랑은 국민소득 3만달러 넘도록 식을 줄 모른다. 대단지 아파트가 제공하는 주거의 질이 단독 주택이나 소규모 공동 주택보다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소득이 높을수록 아파트 거주 비율도 높아 고소득층의 76%, 중소득층의 56%가 아파트에 산다. 어린 자녀를 둔 젊은 부부들은 ‘초품아’(단지 내 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를 찾고, 직장인은 지하철 가까운 역세권 아파트에 살려고 월급을 모은다.
▶그러나 살기 편하다고 한국이 아파트 공화국이 된 것은 물론 아니다. 프랑스 지리학자 발레리 줄레조는 “한국의 아파트는 가격으로 평가되는 상품이 되었다”고 했다. 우리나라 가계 순자산에서 부동산 비중은 76%나 된다. 부채를 뺀 순금융자산 비중은 23%에 불과하다. 미국이나 일본은 우리와 반대다. 한국인은 삼성전자 주식을 사듯이 아파트 주(株)를 산다고 한다. 주식 사고팔 듯이 아파트 매매가 이뤄진다. ‘영끌' 해서 아파트 한 채 장만하는 건 비교적 위험이 적은 투자를 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국민의 이 의식이 잘못됐을 수 있다. 하지만 이를 타박만 해서는 제대로 된 집값 정책이 나올 수 없다.
▶”아파트가 빵이라면 제가 밤을 새워서라도 만들겠다”는 국토부 장관의 발언에 후폭풍이 거세다. 불과 얼마 전까지 아파트 공급은 충분하다고 했던 사람이 갑자기 이러니 국민 부아를 더 돋운다. 공공임대 빌라가 자신이 사는 역세권 새 아파트 못지않다고 했다가 ‘마리 진투아네트’로 불린 여당 의원에 이어 ‘마리 빵투아네트’가 됐다. 온 국민이 집 때문에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그렇게 만들어놓은 사람들이 반성은 일절 하지 않고 불쾌한 신조어만 만들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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