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만 대군은 있는데 군인이 없고, 스타는 널렸는데 장군이 없다”
[아무튼, 주말]
[김아진 기자의 밀당]
노태우 앞에서 “북한은 적” 외친
‘진짜 군인’ 민병돈 前 육사 교장
노병(老兵)은 자나깨나 나라 걱정뿐이다. 구순을 바라보지만 마음에는 주름이 없다. 6·25에 참전하고 군인의 꿈을 꾸던 유년 시절의 신념을 간직하고 있다. 민병돈(88) 전 장군은 1989년 3월 육군사관학교장 시절 “북한은 우리의 적”이라며 노태우 대통령 앞에서 북방정책을 비판하고 옷을 벗은 ‘진짜 군인’으로 기억된다.
정전협정 70주년이자 호국 보훈의 달을 앞둔 지난달 29일 서울 목동 자택. 몇 주 전 만날 약속을 정하면서 “그때까지 살아있을지 모르겠다”던 민 전 장군이 문을 열어줬다.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라는 그는 3시간 넘게 이어진 인터뷰에서 한 번도 등을 대지 않았고 가부좌를 풀지 않았다.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뼛속까지 군인이었다. “우리나라에는 55만 대군은 있지만 군인이 없어요. 스타는 있지만 장군이 없고요. 걱정이에요.”
서재에는 훈장과 계급장이 달린 군복이 여러 벌 걸려 있었다. 촬영을 위해 제복을 입어달라고 하자, “나는 전투복이 좋다”며 낡아서 색이 바랜 특전사령관 군복을 골랐다. 반듯하게 입고 나왔다. 35년 만이라고 했다.
◇군인은 천직이었다
민 전 장군은 따로 논다는 의미의 ‘민따로’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주변에선 “사서 고생을 한다”며 핀잔도 줬지만 후회는 없다고 했다.
-왜 군인이 됐나요.
“어릴 때부터 용감한 군인이 그렇게 멋있어 보였어요. 한 번 떨어지고 다시 시험 봐서 육사 15기로 들어갔지요.”
-6·25에 참전했습니까.
“휘문중 시절 전쟁이 나고 3일 만에 서울이 점령당했죠. 강당에 모여서 김일성 노래, 적기가를 배웠어요.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이 힘에 부치자, 상급생들이 ‘우리가 힘을 보태면 곧 부산도 함락된다’며 합류를 부추겼어요. 그때 한 선생님이 큰 소리로 ‘민병돈이 이리 와’ 하면서 심부름을 시키는 거예요. 쪽지에 ‘돌아올 것 없다’고 써 있어요. 인민군으로 참전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겠죠.”
-국군으로 참전했죠?
“전쟁이 치열해지고 반강제로 징집됐어요. 백선엽 장군이 이끌던 1사단 15연대로 갔습니다. 지금에야 고백하는데 포로로 잡히기도 했어요. 솔직히 군인이 죽으면 죽었지, 잡히면 안 되는 거였는데, 포위됐다가 도망쳤죠. 70m쯤 미친 듯이 뛰다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왼쪽 팔에서 뜨거운 게 흐르더라고. 어깻죽지에 총탄을 맞은 거야. 안 돌아봤다면 심장을 관통했을 거예요. 지금도 겨울이면 왼쪽에 마비가 와요.”
-나라를 지킨다는 게 뭘까요.
“군인으로서 모든 걸 거는 일이죠. 나는 언제나 국가 안보에 대한 책임을 내가 지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전두환 정권 때 요직에 있었는데.
“하나회 초기 멤버였어요. 처음에는 곱창 모임인 줄 알았어요. 그때는 영양식이어서 먹기 힘든 음식이었는데 선배들이 사주니까 갔지요.”
-거기서 신임을 받았어요.
“대통령도 찜찜했겠지. 내 고집을 알았으니까요. 섭섭한 일도 많이 해서 주변 사람들이 ‘민병돈을 자르라‘고 했지만 좌천은 시켜도 옷은 안 벗겼어요. 대통령은 ‘저놈은 전쟁나면 쓸 놈이야’라고 했대요. 날 믿었지만 측근에 두는 일은 없었고요. 손바닥을 안 비비니 재미가 없었겠죠(웃음).”
-12대 총선 끝나고 좌천됐죠?
“청와대 핵심 부대였던 20사단장이었어요. 현 정권에 유리한 투표를 하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지휘관들에게 ‘부대가 감시하고 독촉해도 듣지 말라’고 했어요. 내가 다 뒤집어쓰겠다고. 그래서 좌천됐죠.”
-별난 사단장이었네요.
“얼마 있다가 특전사령관 자리로 갔어요. 88 올림픽을 앞두고 북한 대테러 훈련을 해야 했거든. 대통령도 그 자리는 내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병사들한테 방탄복 6개를 겹쳐 입게 하고 가슴을 향해 총을 쏘라고 했어요. 얼굴이 하얗게 질리더라고. 못 쏘는 거죠. 그래서 내가 먼저 입었어요. 옆에서 보고 있던 대대장이 ‘제가 입겠습니다’라고 해. 그렇게 서로 대련을 했어요. 대통령도 보고를 들었는지 ‘너 진짜 미친놈이냐?’ 묻더라고.”
-왜 그렇게까지 했나요?
“내가 늘 하던 말인데, 훈련을 안 하면 진짜 쏴야 할 때 못 쏴요. 경험에서 나온 얘기예요. 대통령도 끄덕이더라요.”
-그래서 ‘민따로’로 불렸군요.
“군인은 명령에 복종해야 해요. 나도 무조건 안 들은 건 아니에요. 옳지 않은 명령을 안 따른 거지.”
-별명이 마음에 들었나요.
“난 솔직히 ‘민다로’라고 부르는 줄 알았어요. 일본말로 태랑, ‘큰아들’이란 뜻이잖아요. 근데 부하 놈이 ‘그거 아니고요. 선배님이 따로 노니까 ‘따로’라고 불리는 거예요’라고 해서 그제야 알았지(웃음).”
◇ “대통령과의 의리보다 국민이 더 중요”
민 전 장군은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해 “분명한 독재자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타고난 리더였던 것도 틀림없다”고 덧붙였다. 주변에 간신이 없었다면 역사는 또 달라졌을 것이라고. “한번은 우리 집에 왔었어요. 냉장고가 없는 걸 보고 차에 냉장고를 실어 보낸 거야. 열어 보니 김치 냄새가 나더라고. 자기 집 냉장고를 바로 준 거예요. 그 정도로 화끈한 사람이었어요.”
-87년 6월 항쟁 때 계엄령에 반대했죠?
“처음엔 위수령으로 소문이 났어요. 그런데 6·19 명령서를 보니 계엄령인 거죠. 이미 우리는 80년 광주를 봤잖아요. 서울에서 또 그런 일이 벌어지면 나라가 망한다고 생각했죠. 거리에 나간 정보 장교도 ‘어마어마합니다. 광주는 비교도 안 됩니다. 진압은 어렵습니다’ 하더라고.”
-그래서요?
“그 시절은 독재잖아요. 다들 우물쭈물하죠. 동기인 보안사령관 고명승에게 그랬어요. ‘이래나 저래나 죽는다. 명령 불복종은 총살이고, 대통령 말 들었다가는 시민들한테 죽는다. 민간인에게 죽느니 대통령 손에 죽는 게 낫다. 빨리 가서 대통령을 만나라’고.”
-민심이 안 좋았죠?
“대통령이 우리 제안을 거부할 경우에 대비해 쿠데타도 준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6·29선언까지 군 출동은 없었으니 우리 말이 먹힌 거죠.”
-무슨 생각으로 그랬나요.
“대통령과의 의리보다 국가와 국민의 안전이 더 중요했어요. 나는 대한민국 군인이니까요.”
-그 뒤로도 만났나요.
“1년에 한두 번 명절 때 찾아갔지. 죽기 1년 전쯤엔 ‘너 어디 살지’를 20분 동안 다섯 번 묻더라고요. ‘우리 집에 다녀가셨잖아요’ 했더니 또 바로 같은 질문을 해요. 가슴 아팠어요. ‘너무 속상해 마십시오’ 했더니 ‘뭐 어쩔 수 없지’라고 미소를 보이더라고. 그래서 그랬어요. ‘우리 20대 때 얼마나 이승만 대통령을 욕했습니까. 박정희 정권 때는 무서워서 불평도 못했지 않습니까. 그런데 반세기가 지나니 평가가 바뀌었습니다’라고요. 위로가 됐으면 해서.”
-노태우 정권이 들어서고 옷을 벗었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이 인기가 떨어지니 ‘북한은 우리의 적이 아니다. 동반자다’라고 했어요. 말이 되는 얘기냐고요? 전방에 있는 군인들도 혼란스러워했죠. 북한이 적도 아닌데 겨울에 동상 걸리고, 여름에 모기 뜯기면서 왜 총을 겨누고 있어야 하냐는 거예요. 누구도 답을 못해요.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은 몸조심, 입조심하잖아요. 그러니 나라도 하자 했지.”
-그래서 북방정책을 비판한 건가요?
“육사 졸업식에는 대통령뿐 아니라 군 요직들이 다 오잖아요. 그 앞에서 비겁해지기 싫었어요.”
-어려운 결정이었을 텐데요.
“졸업식 끝나고 육사 장교식당에서 대통령이 식사를 하는 게 관례였는데 그것도 못하게 했어요. 장교들은 어디서 밥을 먹냔 말이야. 그랬더니 근처 태릉골프장 클럽하우스로 가겠대요. 대통령이 ‘교장도 참석하지’ 해서 이렇게 대꾸했어요. 전국 각지에서 아들, 딸 졸업식 보러 학부모들이 왔는데 학교장이 어딜 가서 밥을 먹습니까. 저는 여기 남아 있겠습니다.”
-그만둘 생각을 했군요.
“6·25, 월남전에서 죽을 고비도 넘겼고 군인도 원 없이 했어요. 6개월만 있으면 포스타(사성장군)도 될 수 있었는데 별 3개나 4개나 오십보백보라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사흘 있다가 내 입으로 그만두겠다고 했지.”
-그래도 노 전 대통령 조문은 했더군요.
“사실 전두환 대통령에게 ‘노태우를 후보로 생각하신다는데, 대통령을 보호할 의지가 약한 것 같습니다’라고 했었어요. 그런데 일언지하에 ‘노태우는 내가 잘 알아’ 하고는 딱 자르더라고. 이후 전 대통령이 백담사에 유폐됐을 때 찾아가니 ‘네 말이 옳았어’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장례식에 갔어요. 죽은 사람은 말이 없잖아.”
◇“군은 누가 적인지 알려줘야”
민 전 장군은 퇴직하고 34년간 어떤 직업도 갖지 않았다. 정·재계에서 러브콜이 이어졌지만 “평생 군인이고 싶었다”고 했다.
-다른 직업은 안 가졌지요?
“정당에서 비례대표 국회의원 제안이 왔었어요. 난 정치인 안 좋아해요. 재계에서 돈도 주고 자동차도 준다고 그래요. 기업이 자선 사업하는 곳도 아닌데, 뭐겠어. 나를 앞세워서 장사하려는 거죠. 후배들이 ‘저럴 분이 아닌데’ 하면서 실망할 거 같았죠. 그들에게도 희망이 있어야 하니까. 그래서 안 했어요.”
-군 최고 실세들이 정계로 많이 갔잖아요.
“전두환 대통령도 정치인이 될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정치인들이 속닥속닥해서 그렇게 됐죠. 천생 군인이었는데, 하면 안 되는 거였어요. 정치인은 만인 앞에 웃음을 팔면서 거짓말을 밥 먹듯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정치인을 안 좋아하는군요.
“우리 사회에 정치인은 많은데 정치가가 없어요. 주변을 봐요. 지식인은 많은데 지성인이 없어요. 교육자는 많은데 선생님은 안 계시고. 인구가 5000만명이 넘는데 어른이 없어요. 결핍의 사회예요. 55만 대군은 있는데 군인이 없고. 나보고 ‘장군님, 장군님’ 하는데 싫어요. 이순신, 강감찬 장군이 진짜 장군이죠. 주변에 깔린 게 스타예요. 그런데 이 나라엔 장군이 없어요. 그래서 이 꼴이죠. 한심해요.”
-왜죠?
“군인다운 군인이 없으니까요. 전쟁 나면 용감하게 싸울 군인이 얼마나 될까. 먹고살 만하면 목숨 걸고 싸우는 일 따위는 안 해요.”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요.
“사람을 기르지 않았어요. 먼저 인간이 돼야 하는데 ‘꼭 출세해야 한다’고 가르쳐요. 군에도 출세하려는 사람들만 득시글하잖아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의 적은 누구죠? 군인이란 적이 있을 때 싸우는 거예요. 군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적을 지정해주는 것이죠. 해법은 굉장히 단순해요.”
-좀 더 설명해주신다면.
“북한은 우리의 주적이에요. 대화는 대외적으로 하면 될 일이에요. 공산주의 국가와 하는 외교적 약속, 협정은 가짜예요. 레닌이 ‘혁명을 하려는 사람은 어떤 행동을 해도 정당하다. 필요하면 거짓말도 하라’고 가르쳤잖아요. 북한은 뻔뻔한 거짓말을 하면서도 얼굴색 하나 안 변해요. 속아주는 척은 해도 되지만 속으면 안 돼요.”
-북한은 여전히 도발 중입니다. 우주발사체도 쐈어요.
“소련을 봐요. 결국 무너졌잖아요. 미사일이니, 유도탄이니 계속 쏘라고 놔둬요. 돈이 어마어마하게 드는 일이에요. 북한은 가장 가난한 나라에요. 그렇게 비싼 무기를 계속 쏜다면 망하게 돼 있죠. 북핵도 마찬가지예요. 어차피 못 쏴요. 다만 독가스 등 화학무기는 대비해야 합니다.”
-강군을 만드는 방법은요?
“가장 큰 건 정신력이죠. 상관들부터 모범을 보여야 해요. 각자 ‘내가 롤모델이다’라는 생각으로.”
-병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면.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침묵) 툭하면 울면서 엄마한테 전화한다는데 무슨 군인이에요. 대신 장교들에게 할게요. 결국 이 나라는 가장 아슬아슬한 시기가 되면 군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어요. 군대는 간부가 움직이는 거예요. 사명감을 가지고 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라는 각오를 다져주길 바랍니다. 믿어요. 전쟁이 나면 죽기 살기로 싸울 거라는 걸.”
-문재인 정부 때 국방 정책은 어땠나요.
“북한이 제일 미워하는 게 육사 출신이에요. 상대하기 어려운 적이거든. 그런데 육사 출신들을 다 배제했잖아요. 북한에 이익을 주는 정책이었죠. 군을 약화시키고, 사기를 떨어뜨렸어요. 북이 좋아할 일만 골라가면서 한 거야.”
-문 전 대통령도 특전사 출신이잖아요.
“따로 알아봤는데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더라고. 너무나 평범했던 거죠.”
-윤석열 정부는 어떤가요.
“대통령이 검사 출신이잖아요. 정의의 편이죠. 북한 노선이 불의라고 하는 걸 다 알고 있어요. 선거에서 이긴 것만으로도 큰 공이에요. 일본과의 해빙 노력도 잘하고 있고요. 과거 감정에 얽매여 미래를 망쳐서는 안 돼요.”
◇“총을 겨눴던 그들, 평화롭길”
그는 1973년 구입한 단독주택에 50년째 살고 있다. 4년 전 사별하고 지금은 혼자다. 아내의 일이었던 잡초 뽑기를 하지 않아 정원의 풀은 무릎까지 자라 있었지만, “저것도 나름의 멋”이라며 그는 웃었다. 집 안 곳곳에 먼지가 수북했다. “흉보지는 말아요. 먼지와 살아가는 인생인데요.” 그는 휴대폰도 없다. “골치가 아파서요. 서재에 앉아 책 읽는 게 낙이에요.”
-군인의 몸을 유지하네요.
“누구는 오래 살려면 지방질 섭취하지 말라고 하는데 말이 안 돼요. 노인이 힘이 없잖아요. 고기를 많이 먹어야 해요. 대신 많이 걷죠.”
-살면서 후회하는 일이라면.
“없어요. 온 힘으로 군인의 임무를 다 했어요.”
-두 아들과 손주 중에 군인은 없나요?
“직업 군인은 아무나 못 해요. 하고 싶어야 하는 거죠. 여기저기서 때려대니 장군도 별거 아니고(웃음).”
-아내가 중풍으로 19년간 투병했다고요.
“난 아무하고나 결혼하기 싫었어요. 열 살 아래 아내를 세 번 만나고 서른셋에 결혼했어요. 병간호야 자연스러운 거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중병에 걸렸는데.”
-국군묘지에 묻지 말라는 게 유언이라고요?
“마누라 유골을 안 묻었어요. 내가 죽거든 합장하고 싶어서요. 화장해서 한데 묻든가 뿌리든가 해달라고 했어요. 같이 손잡고 걷던 정든 뒷산이면 좋겠고요.”
현충원에는 가지 않는다고 했다. “세상에는 영웅으로 알려져 있지만 아닌 사람들이 그곳에 너무 많아요. 같이 드러눕고 싶은 생각도 없어요.” 대신 6월이면 마음속 기도를 한다. “나와 싸우던 사람들이 저 세상에서 평화로웠으면 좋겠어요. 이생에서 나하고의 인연은 그렇지 못했잖아요. 치사하게 머뭇거리고 있는데 나도 빨리 가서 처를 만나고 싶어요. 나 오기만을 얼마나 기다리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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