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러운 평화’ [만물상]
한일합병의 디딤돌이 된 을사늑약이 1905년 체결된 후 이완용이 고종에게 상소를 올렸다. “새 조약에 대해 말하자면 제국이라는 명칭도 그대로이며 종묘사직은 안녕하고 황실도 존엄합니다. 다만 외교상 한 가지 문제만 잠시 이웃 나라에 맡긴 것입니다.”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들은 유생들이 반발하자 외교권 박탈은 큰일이 아니며 지금의 평화를 그대로 지키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것이다.
▶이완용이 4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 때문에 시공을 넘어서 소환됐다. 이 대표는 “아무리 더러운 평화라도 이기는 전쟁보다 낫다”고 했다. “엄청난 대량 파괴 살상 후에 승리한들, 그게 무슨 그리 큰 좋은 일이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신원식 국민의힘 의원이 이 대표의 말과 이완용의 말이 다르지 않다고 했다. 실제 이완용이 추구한 것이 ‘더러운 평화’다.
▶민주당은 2010년 북한의 천안함 폭침 후 실시한 지방선거에서 “전쟁이냐 평화냐”는 구호를 들고나와 재미를 보았다고 자평한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집권 전인 2016년 “좋은 전쟁보다는 나쁜 평화에 가치를 더 부여한다”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6·25 남침을 당했을 때 즉각 항복하고 더러운 평화를 지켜야 옳았다. 나치의 침공을 받은 나라도 모두 항복하고 더러운 평화를 지켜야 했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침략하기 전에 영토를 떼어주고 더러운 평화를 지켜야 옳았다. 앞으로 북한이 핵폭탄으로 위협하면 굴복하고, 그들이 원하는 돈과 쌀을 주고 더러운 평화를 받아들여야 한다. 북한이 백령도 연평도 등을 무력으로 침공하면 이를 인정하고 더러운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
▶국제정치학자 라인홀드 니부어는 국가 간 문제를 도덕적 관점에서 보는 오류에 빠지지 말라고 경고했다. 인간은 도덕적일지 모르나 국가는 철저히 이기적이라며, 평화주의는 모두가 바라는 당위이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이상주의에 불과하다고 했다. 평화를 위해선 갈등 해결 최종 수단으로서 ‘정의로운 전쟁’ 가능성을 남겨둬야 한다고 봤다. 전쟁을 포기하고 ‘더러운 평화’를 원하는 나라에 찾아올 것은 침략과 굴종뿐이다.
▶‘더러운 평화가 낫다’ ‘전쟁이냐 평화냐’는 것은 사람들을 단순 논리로 위협하는 일종의 공포 마케팅이다. 이런 공포 마케팅은 정치적으로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나 무책임한 구호다. 책임 있는 정당과 지도자라면 국민에게 ‘더러운 평화가 좋다’고 할 것이 아니라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에 대비하자’고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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