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100세 기부왕’의 못 이룬 노벨상 꿈
13일 별세한 이종환 삼영화학그룹 명예회장이 임종 직전 남긴 말이 “관정 장학생 가운데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걸 보지 못해 아쉽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회장은 평생 모은 재산 1조7000억원을 자신이 설립한 장학재단에 출연한 ‘기부왕’이었다.
▶1923년 경남 의령군 태생의 이 회장은 마산중학교 시절 일본인 학생들 틈에서 일제 지배를 경험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호기롭게 일본 메이지대 유학길에 올랐지만 일본 유학은 순탄치 않았다. 1944년 대학 2년을 수료하자마자 학병으로 끌려가 사선(死線)을 넘었다. 귀국 후 사업차 세계 각국을 다니면서 나라의 흥망성쇠가 과학기술에 달렸음을 절감했다.
▶이 회장이 사재를 털어 2000년 설립한 관정이종환교육재단은 아시아 최대 규모 장학재단이다. 장학생의 80%를 과학 분야 인재 선발에 집중했다. 이 회장은 자서전에서 “의대, 법대, 상경대학생을 외면하고 이공계 학생 중심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는 이유는 개인의 명예와 이익, 취업을 목적으로 하는 학문보다는 우리나라 국민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는 과학 기술을 연구하는 이공계가 더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일본보다 노벨상을 더 많이 받는 나라가 될 때 가슴속 응어리가 풀리지 않겠나”라고도 했다. 지금까지 배출된 장학생이 1만2000명, 박사 학위를 받은 장학생이 750여 명이다.
▶2011년부터 2020년까지 과학 분야 노벨상(생리의학상·물리학상·화학상) 수상자 79명을 분석했더니 이들이 노벨상 연구 업적을 쌓는 데까지 평균 19.1년 걸렸다. 수상자 연령은 평균 69.1세였다. 201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배리 배리시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교수는 61세 때 시작한 연구로 81세에 상을 받았다. 2019년 노벨화학상 공동 수상자인 존 구디너프 미국 텍사스대 교수는 97세에 사상 최고령자로 수상했다. 과학 분야 노벨상은 시간이 충분히 지나 검증된 연구 업적에 주어진다. 그래서 2000년 이후 수상자 대부분이 1990년대 이전의 성과를 기초로 한다. 그만큼 기초과학 연구에는 축적의 시간도 필요하다.
▶우리가 기초과학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은 20년 남짓하다. 관정 장학생이 배출된 역사도 비슷하다. “관정 장학생이 노벨상 수상자가 되기를 바란다”는 ‘100세 기부왕’의 꿈이 그의 생전에는 이뤄지지 않았으나 그의 뜻을 꾸준히 이어갈 수만 있다면 언젠가 실현될 날도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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