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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회별신굿탈놀이

빠꼼임 2009. 12. 19. 13:18

 하회별신굿탈놀이

 

 

"할미역 34년" 김춘택 하회별신굿탈놀이 보존회장

 

한번은 할머니 한분이 갑자기 치마속에 손을 스~윽 제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무척 궁금했나 보더라구요

그래도 공연후 인사하면 남자라서 더 많은 박수 받죠

 

==김춘택은==

1949년 의성에서 태어났다. 4세 때 철도국에서 일하던 아버지를 따라 안동으로 이사와 안동초등

학교, 안동중학교, 안동농림고를 거쳤다. 1973년 하회 가면극 연구회 창립 회원으로 하회별신굿

탈놀이에 첫 발을 들여놓게 됐고, 1975년 안동시가 주최하는 경로잔치 행사에서 할미탈을 쓴 후

 

부터 계속 할미역을 맡아 오고 있다. 1981년 전수장학생,1986년 이수자, 1987년 전수조교로 지정

됐고, 2000년 7월22일에는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선정돼 세간의 인정을 받게 됐다. 현재 하회

별신굿탈놀이 보존회장을 맡고 있고, 삼성생명 경북대리점에서 일하고 있다. 1983년 결혼해 슬하

에 2남을 두고 있다. (자료, 2009년12월18일 금. 영남일보. 新한류코드 안동 탈춤)

 

 

김춘택 하회별신굿탈놀이 보존회장(60)은 두 인생을 산다. 할미탈을 쓴 인생과 할미탈을 벗은 인생. 그는 1973년 10월 옛

안동 경안여상의 미술 교사이자 당시 하회가면극 연구회 회장으로 재직하던. 김수진의 권유로 탈놀이에 입문했다. 그리고

2년 뒤인 1975년 5월 안동시에서 주최하는 경로잔치 행사에서 할미와 첫 인연을 맺게 됐다.

 

"경로잔치 행사에서 할미탈을 쓴 저를  지켜본 유한상 전 안동문화원 원장이  '너무 잘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더라구요.

선배고 선생님이고 전부 "할미는 이제 네가 해라' 그랬죠. 그 이후 줄곧  할미탈만 쓰고 있습니다."

 

신체적 조건도 그를 할미로 만드는 데 크게 일조했다. 사실 덩치가 큰 남자는 여자인 할미역에 어울리지 않는 법 작고 호리

호리해야 한다. 그 당시 그는 키 168cm에 몸무게 60kg이었다. 할미에 더없이 딱인 신체 사이즈였다.

 

 그렇게 칭찬과 신체적 조건 덕에 시작해 이제는 할미와 한몸인듯 살아온 지 언 34년이다. 남자로서 34년간 여자 한복을

입고 허리를 구부리며 할미역에 몰입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어색하고 힘겨웠을 만도 한데```. 그는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

간다고 해도 할미역을 택하겠다고 강렬하면서도 간결히 말했다.

 

 그만큼 그에게 할미는 특별히 매력적인 모양이다. 그래서 대체 그 매력이 문지 물었다. 그의 답은 이랬다. "800년전 가부

장적 제도 속에서도 할미는 당당합니다.. '할마이. 내가 어제 장에서 사온 청어 한 두름 어쨌나'하고 영감이 물으면 '어제

저녁에 당신 한마리 내가 아홉마리. 오늘 아침에 내가 아홉마리 당신 한마리. 너는 두마리 밖에 못 먹었네'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용감하게 나댈 수 있는 그 자신만만함이 좋습니다.

 

 

 - 할미역이이라 여자일 것이라 생각하는 관객들이 많습니다. 괜히 짓궂게 구는 관객이 있다든지 불편한 점도 있었겠죠.

"관중들이 성별을 궁금해 하죠. 공연 끝난 뒤 탈 벗고 인사하면 제가 남자라서 더 많이 박수를 받을 때도 있어요. 기억나는

 짓궂게 대한 관객도 있죠. 1990년대 초반 서울 서초동 놀이마당 공연장에서 할미마당 마치고  퇴장하려고 할 때였어요. 할머니 한분이 느닷없이 제 치마 속에 손을 넣더라구요. 남자인지 여자인지 확인을 하려고 그랬던 모양인데, 무척 당혹스러웠고 놀랐죠."

 

-상반신 반라의 상태로 여성 한복을 입어야 하는데 이젠 익숙해졌습니까. 처음 입었을 때 기분은 어땠습니까.

"처음에는 어색하고 부끄러웠죠.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어색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만''''. 그래도 마당이 시작되면 자연스레 할미로 변신합니다."

 

- 남자로서 할머니  역을 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텐데요. 따로 할머니 역 연습도 했을 것 같습니다만.

"할머니들이 많이 나오는 안동 장날을 택해 북문시장, 신시장을 돌면서 할머니를 뵙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길거리를 지날때 허리굽은 할머니들을 뵈면 유심히 살펴보기도 하고요."

 

-예전에는 탈놀이한다고 업신여기는 사람도 많았죠.

"친구들과 막걸리 마실 때 '탈쓰는 *은 저쪽으로 가서 마시라'는 등의 얘기를 들었죠. 집사람고 결혼할고 예비 처가에 인사를 갔을 때도 변변한 직업없이 탈춤한다고 좋은 시선을 못 받았고요.

 

-요즘은 하회별신굿탈놀이를 우리의 소중한 문화라 여기며 감동받는 분이 많잖습니까. 언제쯤부터 사람들의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까.

"1978년 전국민속경연대회 경북대표로 출전한다고 하니 그때부터 조금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1980년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나서 또한번 인식의 변화를 느꼈고요. 그리고 제가 1981년 전수장학생. 1986년 이수자. 1987년 전수조교로 지정받으면서 몇푼 되지는 않지만 전수비를 받으니까 또 시선이 달라졌고 2000년  7월22일 예능보유자로로 인정받고 나서는 완전히 보는 눈이 달라졌지요."

 

-2000년 7월 예능보유자(인간문화재)로 선정됐을 때 기분이 어땠습니까.

 "뭐라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나간 모든 일들이 한꺼번에 머릿속에 떠올랐고 천하를 다 가진 것 같기도 했죠. 또 이제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하기 싫어서 뛰쳐나가고 싶었던 적도 없었나요.

"경제적으로 가족들을 편안하게 못해주는 게 늘 마음에 걸렸죠. 남들은 평수 넓은 아파트로 옮겨간다는데 나는 내 식구들에게 그렇게 못해줄 때마다 사실 그런 생각이 들었죠. 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요즘 하회별신굿탈놀이를 하겠다는 젊은 사람이 별로 없지요.

"마음이 있는 사람도 잠시 활동하다가 경제적으로 생활이 안되니까 다른 직장을 찾아가 버립니다.

 

-앞으로 우리의 소중한 문화인 하회별신굿탈놀이를 계승. 발전시켜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국민과 시민들이 많은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습니다. 춤추러 마당에 나가는 것은 나를 봐달라는 얘기입니다. 관심을 가져주는 것 그 자체가 곧 도움이죠. 막연히 지원금을 많이 달라는 것이 아니라 공연을 많이 만들어 관광객을 늘려서 공생하는 것이 더  현명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말씀해 주십시오.

'하회별신굿탈놀이 전승과 보존에 노력하고, 더 많은 공연을 하기 위해 안동 관광과 홍보도 열심히 할 겁니다. 또 상설 공연확대를 위한 전수관(탈춤전용공연장)건립과 하회별신굿탈놀이의 세계무형문화 유산 들재를 위해 만저을 기할 생각입니다. 더불어 보존회회원들이 복지 지원에 최선을 다해 하회별신굿탈놀이 보존회가 세계최고의 문하예술 단체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힘을 모으겠습니다. <박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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