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건 강

김형석의 100세 일기

빠꼼임 2018. 9. 8. 15:16

김형석의 100세 일기]

김형석의 100세 일기 일러스트

"김 선생은 잘못을 저지르고 부인한테 사과한 적이 없소?" A교수의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있기는 하지만 나는 절대로 공처가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내가 이야기를 먼저 해야 A교수의 고백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옛날얘기를 했다.

1960년대 초에 내가 미국에 가 머물고 있을 때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대통령이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환'화를 '원'화로 바꾸면서 옛날 돈을 모두 무효화시켰던 것이다. 그때 한국에 있던 아내는 내가 몰래 숨겨둔 돈이 있지 않을까 의심이 들었다고 한다. 큰딸과 아들에게 "너희들 나와 함께 아버지 서재에 올라가 책갈피를 들춰보자"고 했다. 책 케이스 속에서 지폐 뭉치를 찾아냈다.

미국에 있는 내게는 "귀국하면 가족회의를 열어 따져보아야 할 사건이 발생했다"고만 했을 뿐 그 내용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와 며칠이 지난 뒤였다. 하루는 아내가 발설하고 애들이 합세해 항의를 하는 것이었다. 궁지에 몰린 나는 "너희들도 이다음에 나 같은 처지를 당해봐라. 내 친구 교수들은 사모님 몰래 비자금을 만드는 게 보통이란다. 그래도 나는 책 케이스에 넣어 두었으니 정직한 편이다" 말하고는 용서를 받았다.

내 얘기를 들은 A교수는 "그 당시에야 누구나 다 그랬는걸. 큰 잘못이 아니지"라면서 웃었다. 그의 얘기는 내용이 좀 달랐다.

어디서 강연을 하면서 "여러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아시지요. 부자간이나 형제 사이는 혈연관계입니다. 한번 인연이 맺어지면 죽을 때까지 그 운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큰 피로 맺어진 하나의 민족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함께하더라도 공동체 운명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호소했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았다. 그 뜻을 강조하기 위해 "젊은 여러분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도 싸우거나 이혼을 하면 그 후부터는 남남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피는 물과 다르다는 예로부터의 가르침이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 강연을 들은 사람이 A교수의 부인과 가까운 지인이었다. 그날 강연 내용을 부인에게 알려주면서, 그것이 남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라고까지 과장했던 모양이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A교수의 부인이 "그래, 우리는 헤어지기만 하면 그뿐이지요? 몇십 년의 애정은 아무것도 아니고요"라고 따져 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물었더니 "내가 잘못했다 했지요. 그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거든요"라면서 멋쩍어했다. A교수의 성격과 표정으로 보아 진심 으로 용서를 빌었을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쉽게 사과하면 되나. 나 같으면 '당신은 사랑이 피보다도 진하다는 사실을 모르는구먼' 하고 응수했겠다"고 했더니, A교수도 "아차, 그걸 내가 몰랐구나"라면서 아쉬워했다.

오늘은 강원도 양구에 갔다가 A교수의 무덤 앞에 서서 그 지나간 얘기를 되살려 보면서 웃었다. 그러면서도 눈물을 닦았다. 정말 좋은 친구였는데.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9/07/2018090701952.html

 

 

[김형석의 100세 일기]

"선생님 용돈으로 써주세요" 제자가 찔러준 봉투…
세뱃돈으로 시작한 인생… 용돈으로 마무리되는 듯

김형석의 100세 일기 일러스트

교육자는 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심는 일을 한다. 열매는 사회가 거둔다. 백세를 헤아리게 되니까, 내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내가 찾아보는 때가 있다. 제자들이 성공해서 나보다 훌륭하게 되었을 때가 그렇다. 지난해 가을 제자와 함께 인촌상을 받았을 때는 정말로 자랑스러웠다. 그런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몇 해 전에는 내 제자가 사회적인 공로상을 받게 되었다. 저녁 시간이었으나 식장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곧 시작할 시간에 들어섰는데, 수상자 자리에 앉아 있던 제자가 찾아와 내 코트를 받아 걸어 주면서 안내해 주었다. 주빈은 제자였다. 상을 받은 그가 답사를 했다. 본래 말이 적고 앞장서기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오늘까지 살아오면서도 그러했으나 앞으로도 은사이신 김 선생님의 뜻을 기리면서 살게 될 것"이라는 답사를 했다. 나에게는 그 마음이 분에 넘치는 고마움이었다.

시상식을 마칠 때 제자는 내 옆까지 왔다. 귀에 가까이 얼굴을 대면서 "선생님 제 얘기가 들리세요?"라고 묻더니 "제가 선생님 코트에 봉투를 하나 넣었는데요. 용돈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허물 마시고 써주세요"라면서 돌아갔다.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좀 늦게 집에 돌아왔다. 코트 주머니에는 두툼한 봉투가 들어 있었다. 왜 그런지 어렸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설날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이 집 저 집을 찾아다니면서 세뱃돈을 받던 옛날이 생각났다. 그 세뱃돈으로 딱지도 사고 장난감도 사서 놀던 어렸을 때 친구가 그리워졌다. 일 년에 한 번씩 기다려지는 경사스러운 행사였다.

그로부터 90년 세월이 흘렀다. 요사이는 내 동료나 후배 교수들이 늙어서 수입이 없으니까 용돈 타령하는 얘기들을 듣는다. 설날이 가까워지면 아들딸들에게 "손주들에게 줄 세뱃돈이 떨어졌다"고 미리 말해두면 자녀들이 용돈으로 쓰시라면서 현금을 미리 보내온다. 그중에서 일부는 세뱃돈으로 주고 나머지는 용돈으로 쓴다는 얘기다. 또 어떤 친구는 생일이 되면 자녀들에게 "선물은 필요 없으니까 알아서 하라"고 말해 두면 현금 봉투가 온다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인생은 세뱃돈으로 시작했다가 용돈으로 마무리되는 것 같다. 세뱃돈은 즐거움의 시작이었으나 용돈은 인생을 마무리 하는 절차인지 모른다. 내 인생도 세뱃돈의 즐거움으로 시작했으나 용돈으로 채워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의 용돈은 성격이 다르다. 생각해보면 내가 내 제자를 사랑한 것보다 제자가 나를 더 사랑했던 것이다. 용돈이 아니라도 좋다. 많은 제자가 나를 그렇게 기억하며 살아간다면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일생을 살아온 것이다. 사랑이 최선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11/2018051101754.html

 

 

[김형석의 100세 일기]

버스를 기다리다가 동네 사람을 만났다. 인사를 나누고 "참, 어제 교회에 다녀왔지요?" 묻기에 "나는 다른 일이 있어 나가지 못했는데"라고 했다.

내가 교회로 안내한 후배이다. 그는 "안 나가시기를 잘했습니다. 목사님 설교를 듣다가 좀 민망했습니다"라는 것이다. 목사님 설교는 이런 내용이었다. "노령 인구는 계속 늘어나는데 출생률은 떨어지고, 청장년들은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가면 젊은이 한 사람이 두 늙은이를 봉양하게 될 테니까 아들딸들의 장래를 위해서라도 오래 살지 말아야겠어요. 저도 80이 넘으면 더 사는 것이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후배는 "저도 3년 지나면 80이 되는데, 교수님이 오셔서 그 설교를 들으시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다"고 덧붙였다. 함께 웃었다.

김형석의 100세 일기

버스를 타고 나 혼자 또 미소를 지었다. 지난해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서울에 사는 50대 남자가 어려서부터 아버지 친구이면서 자기를 사랑해 주던 노인에게 세배를 드리러 수원까지 갔다. 복장을 가다듬고 예의를 갖춰 공손히 엎드려 큰절을 드리면서 말했다. "백수 하시기 바랍니다!" 이전 같으면 반기면서 덕담도 하고 먼저 세상 떠난 아버지 얘기도 하셨는데,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밖으로 나와 친구인 아들에게 그 얘기를 했다. 아들이 "뭐? 백수 하시라고 그랬어? 명년이면 백수가 되셔. 1년만 더 사시라고 했구먼…"이라면서 걱정했다.

그 말을 들은 친구가 큰일 났다 싶어 다시 들어갔다. "세배를 다시 드리겠습니다. 만수무강하시기 바랍니다"고 했다. 그제야 밝은 표정을 지으면서 "멀리서 왔는데 놀다가 가게. 명년에 또 오게나"면서 반기더라는 얘기다.

객관적으로 따져보면 목사의 설교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그 목사도 80이 되면 생각이 달라질지 모른다. 삶에 대한 애착만큼 강한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두가 백세 이상 살게 되면 그것은 더 큰 사회문제가 된다. 인생이란 쉽게 체념할 수도 없고 욕심으로 채워지는 것도 아니다.

나 같은 사람은 더욱 처신이 곤란해진다. 나이를 자랑할 수도 없고, 후배나 젊은이들에게 죄송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은 얼마나 오래 사는 것이 좋으냐고 누가 물으면 "일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 때까지"라고 말한다.

오래전에 나는 어린이들을 위한 동화를 쓰고 변종하 화백이 삽화를 그려 책을 낸 일이 있다. 그 화백은 암으로 투병 중에도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까지 가족의 부축을 받으면서 그림을 그리다가 별세했다. 우리에게 무엇인가 주기를 바라며 줄 수 있는 사람에게는 장수가 자랑스러운 축복일 수 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8/31/2018083101768.html

 

 

 

[김형석의 100세 일기]

스승의 날에 오군 생각이 간절했다. 20년 동안 빼놓지 않고 감사 전화를 걸어 주던 제자다. 내가 28세, 오군은 18세 때 처음 만난 사제 간이다.

오군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향인 충북 청주로 내려가 공무원을 지내기도 하고 문필가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후에는 충북대 교수가 되었다. 사회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는 사제 간의 친분이 더 두터워졌다. 한번은 서울에 와 모교인 중앙학교를 함께 거닐기도 했다. 같이 찍은 사진이 강원 양구 철학의 집에 걸려 있다. 중앙학교 때의 추억을 남기기 위해서이다.

최근에는 스승의 날에 걸려오는 전화가 대화가 되지 못하고 오군의 일방적 통화로 끝나곤 했다. 나보다도 먼저 귀가 멀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세요?" 하고 확인한 후에는 자기 얘기만 한다. 그러고는 "서울 가면 찾아뵙겠습니다" 하는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그치곤 했다. 나보다 제자가 더 빨리 늙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여자 친구라는 거짓말

작년이다. 내 가까운 지인이 청주에 문상을 간다고 하기에 내가 한 시간 동안 청주에서 오군을 만날 계획을 세웠다. 부인은 건강이 좋지 않아 못 나오고, 서울에 사는 따님이 친정에 들렀다가 오군과 상봉하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약속한 장소로 갔다. 길가 2층에 있는 카페였다. 내 오른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어린애가 아버지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옆자리에 앉았다. 너무 반가워서 말문이 막힌 듯했다. 내가 "오래 보지 못했는데, 건강이 이전만 못해 보인다"고 했더니 수긍하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딸을 바라보았다. '네가 말씀 드려라' 하는 눈치였다. 따님의 설명을 들었다. 건강이 좋지 못했는데 교수님이 오신다니까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 둘은 60분이 너무 짧았다. 아마 이것이 마지막 만남일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 전화가 왔다. 서울로 갈 차가 도착했다는 것이다. 내가 오군의 팔을 붙들고 내려가 차를 탔다. 운전대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고는 오군이 "저분은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내가 대답하려고 할 때 차가 움직였다. 대답을 듣지 못한 오군은 오른손을 흔들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나는 차 안에서 후회했다. '이 여자분은 내 친구야' 했더라면 오군이 얼마나 기뻐했을까. 내가 오랜 세월 병중의 아내를 돌보아 주었고 지금은 혼자인데, 왜 재혼을 안 하실까 하고 친구들과 걱정해온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한마디 거짓말을 했더라면 오군은 틀림없이 '역시 우리 선생님이 최고야. 백세에 여자 친구가 있고…'라면서 가족들과 기억에 남는 동창들에게 "나 김 선생님의 여자 친구를 보았다"면서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었다. 또 그렇게 나를 좋아했다.

몇 달 후에 따님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그렇게 교수님을 좋아하셨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25/2018052502055.html

 

 

 

[김형석의 100세 일기]
내 나이가 알려지면서 몇 안 되던 여자 친구들이 다 떠나버렸다
제자가 놀려 주었다 "꼬부랑 할머니들이 지팡이 짚고 찾아올지 누가 알아요?"

지난달 말 금요일이었다. 차편이 생겨 오래간만에 예술의전당을 찾아갔다. 화가 샤갈의 전시회를 보기 위해서다. 오래전 모딜리아니 때만큼 인상적이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했다. 샤갈의 그림에는 언제나 이야기가 있고 향수가 넘친다. '비테프스크 위에서' 그림은 더욱 그랬다. 전시를 보고 출판을 기념하는 저녁 회식장으로 갔다.

작년에 불광동 성당에 갔는데 본당 입구에 내 강연 주제인 '독서하는 국민이 되자'가 쓰여 있었다. 그날 나는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 다섯 나라의 문화 혜택을 받아 인류가 밝은 문화의 햇볕 밑에 살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이나 중국과 더불어 아시아 문화권을 이끌어 갔으면 좋겠다. 그 기초 작업은 간단하다. 국민의 절대 수가 100년 이상 독서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먼저 소개한 다섯 나라가 그러했다고 보는 것이 내 생각이다"고 말했다.

김형석의 100세 일기

2년 전에 '백년을 살아보니'를 출간했는데, 15만 부 이상 팔렸다. 내가 감사히 생각하는 것은 50~60대 장년층이 책을 읽는다는 사실이다. 그 뒷받침을 하고 싶어 다시 '행복예습'이라는 신간을 내놓았다. 내용과 수준은 먼저 책보다 약간 높은 것 같다. 그 출판을 기념해 출판사가 베풀어 주는 저녁식사 자리에 도착했다.

조촐한 모임이었다. 10명 정도의 출판사 실무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P상무가 "'백년을 살아보니'가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아서 감사하며, 이번 책은 내용이 풍부하고 흥미롭기 때문에 더 많은 독자가 애독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인사를 했다. 다들 내 표정을 지켜보았다. 한마디 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나는 "그 말씀은 사실입니다. 출판사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인 나는 얼마나 큰 손해와 타격을 받았는지 모르실 겁니다. 우선 내 나이가 백 세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몇 명 안 되던 내 여자 친구들이 1~2년 동안에 다 떠나버리고 말았어요. 이제부터는 혼자 외롭게 고독을 이겨내면서 여러분의 행복을 원해야 하는 심정과 처지는 모르시지요?"라고 했다. 모두 웃었다. 내 눈에는 아직 어려 보이는 한 여직원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표정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다. 동행
했던 제자가 "선생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백 살 넘은 꼬부랑 할머니들이 지팡이를 짚고 찾아올지 누가 알아요?"라며 놀려 주었다. 나는 웃으면서 "백 살이 되니까 그런 옛날의 꿈은 다 사라진 것 같아요. 지금 바라는 것은 좀 더 많은 사람이 내 책을 통해 행복해졌으면 감사하겠어요"라고 했다. 나 한 사람의 행복보다는 독자들의 행복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9/21/201809210158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