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9.07.20 03:00
[아무튼, 주말- 김형석의 100세 일기]
지난 토요일에는 시간 여유가 생겨 몇이서 점심을 같이했다. 헤어질 때 내 제자인 H 수녀가 "연세대 교수로 계셨던 정인보 선생의 따님과 친분이 있는데 그의 저서"라며 책을 한 권 주었다. 아버지를 기리는 내용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정인보는 흔히 말하는 국보급 학자였다. 한학(漢學)을 한글문화로 옮기는 큰 역할을 담당했고 조선시대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한 탁월한 선비였다. 6·25 때 병환으로 입원해 있다가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만든 명단의 납치 대상에 들어 있던 사람이다. 병원에서 업혀 나간 후에는 아무도 행방을 모른다. 그때 정인보는 58세였다.
70년 동안 아무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다. 후에 일본에 왔던 북한 대표 한 사람 말에 따르면, 이광수·정인보 등 피랍 인사 100여 명이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로 진입하면서 평양을 거쳐 강계로 이송되는 도중에 40여 명이 사망했는데 춘원과 정인보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때가 1950년 10월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인보는 1893년 5월 6일생, 1950년 작고로 되어 있으나 정확한 장소와 일시는 알 수 없다.
그때 대한민국 인사가 많이 희생되었다. 고려대 총장이던 현상윤은 인촌 김성수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나는 남과 북, 어느 정권 앞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면서 피란길에 오르지 않았다. 당시 중앙학교 심 교장 말에 따르면 집에서 피랍되었다는 것이다.
이름 있는 인물만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몸담고 있던 중앙학교에서도 네 교사가 체포 대상이었다. 그중에 엄 선생과 한 배속 장교는 좌파 학생들에게 붙잡혀 죽었고, 나와 정 육군 대위는 피란을 떠나 그 위기를 모면했다. 지령을 받고 나를 잡으러 왔던 E군이 대한민국으로 귀순하면서 알려준 사실이다. 교사들도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감시하고 적대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학생들은 국군으로 지원하는 다수와 공산군으로 편입되어 전선으로 떠나는 이들이 생겼다. 후에 알려졌지만 교사 중에 남로당원이 있어 모든 것을 지휘하고 자신은 인민공화국으로 도피 월북했다.
올해 6·25는 남북 모두 조용히 지낸 셈이다. 너무 아프고 슬픈 상흔을 남겼음을 자성하고 싶은 날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과오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국민을 위해 역사적 판단에 신중해야 한다. 지난달에도 시진핑과 김정은은 "6·25는 남측에서 저질렀고 사회주의는 앞으로도 성공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기야 프랑스의 세계적 철학자 사르트르나 메를로퐁티도 공산당원이었을 때는 '6·25는 북침'이라고 주장했으니까.
이 민족적 비극과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어느 편이나 누구에게 책임을 돌리자는 뜻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민족 역사의 범죄자였다. 정치 이념이나 정권 유지를 목적으로 역사 해석을 바꾸면 안 된다. 민족 전체의 책임에서 나 또한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정인보는 흔히 말하는 국보급 학자였다. 한학(漢學)을 한글문화로 옮기는 큰 역할을 담당했고 조선시대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한 탁월한 선비였다. 6·25 때 병환으로 입원해 있다가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하면서 만든 명단의 납치 대상에 들어 있던 사람이다. 병원에서 업혀 나간 후에는 아무도 행방을 모른다. 그때 정인보는 58세였다.
70년 동안 아무 소식도 전해지지 않았다. 후에 일본에 왔던 북한 대표 한 사람 말에 따르면, 이광수·정인보 등 피랍 인사 100여 명이 국군과 유엔군이 서울로 진입하면서 평양을 거쳐 강계로 이송되는 도중에 40여 명이 사망했는데 춘원과 정인보도 포함되어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때가 1950년 10월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인보는 1893년 5월 6일생, 1950년 작고로 되어 있으나 정확한 장소와 일시는 알 수 없다.
그때 대한민국 인사가 많이 희생되었다. 고려대 총장이던 현상윤은 인촌 김성수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나는 남과 북, 어느 정권 앞에서도 부끄러움 없이 살았다"면서 피란길에 오르지 않았다. 당시 중앙학교 심 교장 말에 따르면 집에서 피랍되었다는 것이다.
이름 있는 인물만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몸담고 있던 중앙학교에서도 네 교사가 체포 대상이었다. 그중에 엄 선생과 한 배속 장교는 좌파 학생들에게 붙잡혀 죽었고, 나와 정 육군 대위는 피란을 떠나 그 위기를 모면했다. 지령을 받고 나를 잡으러 왔던 E군이 대한민국으로 귀순하면서 알려준 사실이다. 교사들도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감시하고 적대시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학생들은 국군으로 지원하는 다수와 공산군으로 편입되어 전선으로 떠나는 이들이 생겼다. 후에 알려졌지만 교사 중에 남로당원이 있어 모든 것을 지휘하고 자신은 인민공화국으로 도피 월북했다.
올해 6·25는 남북 모두 조용히 지낸 셈이다. 너무 아프고 슬픈 상흔을 남겼음을 자성하고 싶은 날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과오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지도자들은 국민을 위해 역사적 판단에 신중해야 한다. 지난달에도 시진핑과 김정은은 "6·25는 남측에서 저질렀고 사회주의는 앞으로도 성공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하기야
이 민족적 비극과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를 어느 편이나 누구에게 책임을 돌리자는 뜻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민족 역사의 범죄자였다. 정치 이념이나 정권 유지를 목적으로 역사 해석을 바꾸면 안 된다. 민족 전체의 책임에서 나 또한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