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 칼럼]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파 정당의 비겁함
조선일보
입력 2020.08.28 03:20
나라 걱정으로 광화문에 몰려나온 인파를 향해
통합당은 거침없이 '극우''썩은 피'라고 말하는데…
최보식 선임기자
누적된 실정(失政)과 무능, 지지율 하락을 광화문 집회로 한 방에 뒤집은 문재인 정권의 기술은 놀라웠다. 하지만 더 놀라게 한 쪽은 야당이었다. 통합당이 재빠르게 분위기에 올라타 광화문 집회를 '극우'와 '썩은 피'로 공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광화문 집회 참석 인사들의 심리세계는 카메라에 주목받고 박수 소리에 굶주려 계신 것"이라고 했다. 방송에 나와 이렇게 떠드는 이들은 다른 누군가의 박수 소리를 갈망하고 있을 것이다.
광화문 집회가 방역 부담을 준 것은 사실이다. 통합당이 여기에 엮여 지지율이 내려갔을 수 있다. 이런 현실적인 입장을 이해해도, 그날 장대비 속의 광화문 인파가 통합당으로부터 이 같은 모욕과 조롱, 비난을 받아야 하나. 지금의 장면은 곤경에 처한 동료들을 인민재판에 세워 자신의 결백과 대중의 환심을 얻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현 정권은 지난달 말 교회 등의 소모임 금지를 해제하고 외식·공연·여행 쿠폰도 발행했다. 여름철 피서지마다 인파가 몰렸다. '코로나 씨앗'은 이미 전국에 뿌려지고 있었다. 8월 17일은 임시 공휴일로 정했다. 그런 정권이 광복절 집회 직전에 코로나 확산 우려를 내세우니 설득력이 없었다. 정권 반대 집회를 차단하려는 술책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불법 집회에 나오면 검거한다'는 당국의 발표에다 비까지 내렸지만 광화문에는 5만여 명이 모였다. 못 나온 사람들의 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이다. 문재인 정권에 화난 이런 민심의 분출을 '극우'로 몰아도 되나. 이들 대부분은 전광훈 목사나 일부 교회와는 무관했다. 박근혜 석방을 위해서, 혹은 4·15 부정선거 의혹을 주장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백주에 테러를 자행하는 극우 세력은 아닌 것이다. 현 정권은 민노총 등이 불법 폭력집회를 해도 '극좌 세력'으로 부른 적 없지만, 통합당은 나라 걱정으로 몰려나온 이들을 향해 거침없이 '극우' '썩은 피'라고 말한다.
광화문 집회 인파는 지금의 통합당에 더 많이 표를 찍었을 것이다. 통합당의 정신 상태가 똑바로 돼 있다면 "우리가 국회에서 정권의 폭주를 견제하지 못한 탓"이라며 광화문 인파에게 면목이 없어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집회 바로 다음 날 '국가 방역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고 용서할 수 없다'며 몰아갈 때 야당이라면 맞서는 게 정상이다. 특정 교회와 집회에 대한 집중 공격은 방역을 위한 수칙에도 맞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통합당은 정권이 짜놓은 프레임에 빠져 몽둥이를 들고 함께 춤추고 있는 것 같다.
만약 광화문 집회가 코로나 방역 시비 없이 끝났다면 통합당 의원들은 '이게 민심'이라고 떠들었을 것이다. 기회가 되면 이 집회에서 마이크를 잡으려고 다투어 줄을 댔을 게 뻔하다. 이제 손익 계산에서 불리하니 '손절매 해야 한다'고 떠들고 있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우파 정당의 비겁함을 또 드러낸 것이다. 광화문 집회 때문에 통합당 지지율이 하락했다지만, 이런 얍삽한 모습이 보기 싫어 등 돌린 숫자도 꽤 많을 것이다.
정당은 표를 얻어야겠지만 눈앞의 불이익이 예상돼도 양보해서는 안 될 게 있다. 가치나 연대, 동지 의식 같은 것이다. 여기에 뿌리를 내리지 않는 정당은 날림집과 같다. 정당은 자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에서 주위로 넓혀가야 한다. 요즘 통합당은 아예 뿌리를 뽑아서 자리를 옮아가려고 한다.
얼마 전 '기본소득'을 첫 번째 당 정강정책으로 발표했을 때 자신들은 새롭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실체는 여당을 베끼는 야당에 불과했다. 호남에 공을 들여야 하는 것은 맞지만 무릎 꿇고 눈물 흘리는 방식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지금 통합당의 기류라면 사상과 표현의 자유와 충돌하는 5·18 관련법 조항을 묵인할 게 틀림없다. 역사적 실체와 다르게 만들어지는 제주 4·3 사건 특별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침묵할 것이다.
통합당 원내대표는 세월호 사고와 관련해서도 "유족의 억울함을 제대로 풀어주지 못했다"며 사과했다. 그동안 우파 진영이 마치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던 것처럼 들렸다. 지난 정권에서 이뤄졌던 세월호 조사 결과를 스스로 부정했다. 그렇게 잘 보이면 표(票)로 돌아온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우파 정당의 위기는 끝까지 싸워서라도 지켜야 할 가치를 잃어버린 데서 비롯됐는지 모른다. 헌법 정신이나 자유민주주의 체제, 대한민국 정체성과 관련된 쟁점 사안을 놓고 결코 밀려서는 안 된다 는 패기가 없다. 아마 공부가 안 돼 있거나 보수 가치에 자부심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다 보니 좌파와의 사상과 가치 대결에서 벼랑 끝으로 떠밀려왔다.
광화문 집회 논란은 스스로 기반을 계속 허물어온 우파 정당의 안 보이고 싶은 민낯을 보여준 셈이다. 집회 참가자들은 현 정권보다 등 뒤에서 '극우'라고 칼을 꽂은 통합당에 더 배신감을 가졌을 게 틀림없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27/202008270477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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