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희의 흥미진진 경제사] [7] 유대인의 앤트워프 시대
세계 최초로 자본주의 형성을 주도한 상품, 설탕
유대인, 설탕 산업 프로세스 일체를 장악하다
브뤼헤가 항구의 기능을 잃자 유대인들은 브뤼헤에서 약 100㎞ 정도 떨어진 앤트워프(안트베르펜)로 옮겨갔다. 앤트워프 역시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북해 하구변 스헬데 강가에 있었다. 당시로서는 최상의 항구였다.
1492년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브뤼헤와 앤트워프 두 곳으로 나누어 정착할 때, 앤트워프에 도착한 유대인들이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보석 장사였다. 스페인에서 추방될 때 숨겨 가지고 온 것들이었다. 당시 스페인에서 유대인들이 돈과 금, 은 등을 갖고 나가다 발각되면 사형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보석류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 무렵 보석이 많지도 않았거니와 또 보석의 가치가 그리 알려지지도 않았다. 유대인들은 돈과 귀금속을 보석류와 바꾸어 모두 다 한 움큼씩 가져 와 유통량이 상당했다. 이를 바탕으로 바르셀로나에서 보석 장사를 했던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보석 시장이 쉽게 형성되고 활성화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앤트워프는 국제 보석 거래의 중심지가 되었다.
유대인들의 보석 거래 가운데서도 다이아몬드의 이윤이 가장 많이 남았다. 그러자 유대 보석 상인들은 인도에 있는 유대인 커뮤니티와 협력하여 직접 다이아몬드 원석을 들여와 이를 가공해 팔았다. 기원전 3세기부터 2000년간 인도는 세계에서 유일한 다이아몬드 생산국이었다. 그 뒤 17세기 말 베네치아의 유대인 페르지가 다이아몬드 특유의 ‘브릴리언트 커팅’ 연마 방법을 개발한 뒤로 다이아몬드가 명실상부하게 최고의 보석이 되었다.
그러다 18세기에 브라질에서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됨으로써 다이아몬드의 주산지는 브라질로 넘어갔다. 그러나 정작 본격적인 다이아몬드 시대를 열게 된 것은 1866년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강 근처에서 유레카라는 21캐럿짜리 다이아몬드 원석이 발견되면서부터다. 이어서 남아공에서 대규모 광상(鑛床)이 발견되어 다이아몬드가 급속히 대중화되었다.
앤트워프 유대인들은 점차 보석 물량이 커지자 이번에는 가공한 물건들을 외국에 있는 유대인 커뮤니티와 손잡고 수출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다이아몬드 산업은 유대인들이 ‘수입-가공-수출-유통’ 프로세스 일체를 장악하여 유대인 커뮤니티 간의 완전한 독점 산업이 되었다. 독점이다 보니 부르는 게 값이었다. 유대인들은 이 시장을 확고히 지배했다. 훗날 앤트워프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여 네덜란드에 귀속되었다가 지금의 벨기에에 속하게 된다. 지금까지도 벨기에는 유대인들의 다이아몬드 중계 무역으로 유명하다.
◇포르투갈의 배, 유대인 찾아 앤트워프로 들어오다
바다와 단절되면서 몰락해 버린 브뤼헤의 패권은 그 뒤 온전히 앤트워프로 넘어간다. 브뤼헤의 유대인들이 앤트워프로 모두 옮겨갔기 때문이다. 브뤼헤가 플랑드르 지역 직물 산업의 중심 항구였다면, 앤트워프는 브라반트 공국의 직물 산업 중심 항구였다. 1500년께 이르러 앤트워프가 완벽히 브뤼헤를 대체한 후 국제 무역 시장으로 급속히 발전한다. 이렇게 앤트워프를 짧은 시간에 발전시킨 것은 포르투갈이 인도에서 가져온 향신료, 후추 등 동방 물품이었다.
1497년 유대인들을 추방한 포르투갈은 동방에서 향신료를 실어 와도 이제 이를 유통시킬 능력이 없었다. 결국 1501년에 리스본에서 동방의 계피와 후추 등 향신료를 실은 포르투갈의 배가 유대인을 찾아 앤트워프로 들어온다. 그 뒤 포르투갈에 앤트워프는 동방의 향신료를 유럽 대륙에 유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거점이 된다. 이는 유대인을 추방한 스페인도 마찬가지였다.
그 뒤 앤트워프 유대인들이 다루었던 주요 교역품은 이베리아 반도와 브뤼헤 시절 다루었던 교역 품목에 인도산 향신료와 금,은,보석과 다이아몬드가 추가되어 주축을 이루었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고부가가치 품목들이었다. 그 무렵 다이아몬드는 주로 인도에서 생산되었다. 16세기 전반에 앤트워프는 발틱 무역의 중심지로서, 그리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중계무역항으로서 번영을 누렸다. 이로써 유대인들은 당시 유럽과 동인도는 물론 신대륙의 상품을 거의 다 다루었다. 역사상 최초로 세계 상품의 대부분이 한곳에서 거래되었다는 의미에서 ‘세계시장’이 출현했다. 그러자 앤트워프의 정기시들이 일 년 내내 열리는 상설 시장으로 변모했다.
◇세계 최초로 자본주의 형성을 주도한 상품, 설탕
앤트워프에서 유대인들이 취급하는 상품은 더욱 다양해졌다. 북유럽의 타르(역청)와 호밀, 스페인의 양모·소금·포도주·올리브유 등 당시의 대표 수출 상품들이 북유럽과 스페인에서 직수출되지 못하고 모두 이 도시에서 거래되었다. 여기에 커피와 차, 코코아, 담배, 설탕이 더해졌다. 이 품목들이 이후 몇 세기를 풍미하는 최고 히트상품이 된다.
특히 포르투갈이 신대륙에서 가져온 설탕은 유대인이 떠난 리스본에서는 유통시킬 수가 없었다. 이후 리스본을 경유하여 들어온 브라질산 설탕이 유대인에 의해 1508년부터 앤트워프에서 거래되었다. 그 뒤 신대륙의 설탕은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설탕이 금값이어서 일반인들은 설탕을 구경하기 힘들었다. 이러한 폭리를 통해 거대한 자본 축적을 이루어 세계 최초로 자본주의 형성을 주도한 상품이 설탕이었다.
◇이슬람이 전파시킨 사탕수수와 설탕 제조 비법
기원전 4세기에 이미 인도에서는 설탕을 제조하고 있었다. 서구에 설탕이 처음 알려진 것은 알렉산더 대왕의 인도 침공 때였다. 기원전 325년 인더스강 동부 지역을 답사한 대왕의 부하 장군은 “인도에서 자라는 갈대는 벌의 도움 없이도 ‘꿀 같은 것’을 만들어 낸다. 인도인들은 그 즙으로 단 음료수를 만든다”고 기록했다. 장군은 사탕수수를 가리켜 ‘꿀벌 없이 꿀을 만드는 갈대’라고 했다. 유럽인의 눈에는 신기하기만 했다.
이후 6세기 페르시아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 뒤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이슬람은 전리품으로 사탕수수와 설탕 제조 비법을 챙겨 가는 곳마다 이를 전파했다. 8세기에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이 비교적 기후 조건이 비슷한 스페인 남부 연안과 마리다 섬을 필두로 카나리아 제도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했다. 드디어 유럽 대륙에서도 사탕수수 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11~13세기까지 벌어진 십자군 전쟁은 설탕 전파의 획기적인 계기가 되었다. 시칠리아 등 따듯한 기후의 지중해 지역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이 적고 귀해 값이 비쌌다.
◇유대인, 설탕 산업 프로세스 일체를 장악하다
그 무렵 설탕은 왕이나 귀족들만 애용하는 고급 향신료이자 의약품이었다. 설탕은 권위의 상징이 되었다. 심지어 몇몇 유럽 왕실은 중요한 행사 때 그들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화려한 설탕 조각을 만들어 전시했다. 물론 값은 엄청났다. 영국에선 설탕 4파운드(1.8㎏)가 송아지 한 마리 값이었다. 그나마 예전에 비해 싸진 것이다. 1372년 레반트에서 베네치아를 경유해 들어온 설탕 1㎏의 가격은 수소 2마리 값이었고 14세기 말에는 수소 10마리 값까지 폭등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베네치아 유대 상인들은 원당 무역뿐 아니라 정제 기술까지 습득했다.
15세기 포르투갈의 대항해 이후 아프리카에서도 사탕수수가 경작되기 시작했고, 스페인의 신대륙 점령과 함께 재배 지역이 중남미로 확산되었다. 그럼에도 15세기 내내 설탕 1㎏ 가격은 보통 소 한두 마리 가격을 유지했다. 이러한 고이윤을 오래도록 보장할 수 있는 길은 독과점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유대인들은 설탕의 독과점 유통 체제를 완성한다. 곧 설탕의 유통 경로 일체를 장악한 것이다. 유대인들이 직접 브라질과 서인도제도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대규모로 운영했다. 이로써 사탕수수 재배에서부터 운반-정제-판매의 핵심 프로세스를 일괄 장악하는 독과점 체제를 완성했다.
◇유대인, 사탕수수 농장에 흑인 노예를 투입하다
사탕수수는 특히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식물이다. 사탕수수는 심고 나서 12개월간 많은 물을 꾸준히 대야 한다. 심고 나서 베기까지 30여 차례에 걸쳐 물을 대야 한다. 따라서 물을 다루는 고도의 기술과 조직적인 노동력이 필요했다. 게다가 사탕수수는 땅을 황폐하게 만드는 성질이 있어 재배 지역을 자주 옮겨주어야 한다. 이렇게 옮겨 심고 물 주고 길러 4m가 넘는 사탕수수를 솎아 내는 것도 힘든 작업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제때 수확해 단시간에 즙을 짜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건조해져 즙을 충분히 짜낼 수 없었다. 또 즙을 짜내면 바로 끓여야 했다. 이를 위해 많은 땔감을 마련하고 붙어 앉아 오랜 시간 불 관리를 해야 했다. 그러려면 직접 사람의 손으로 따가운 햇볕 아래에서 등골이 빠지도록 일해야 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흑인 노예들이 사탕수수 농장에 투입된다.
◇신용을 기반으로 무역과 금융을 연계시킨 유대인들
유대인들의 또 다른 특기는 중계무역이었다. 대부분 스페인, 포르투갈, 인도 등을 연결하는 삼각무역이 주류를 이루었다. 중계무역은 통과무역과 달리 유대인이 무역의 주체가 되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역을 주도할 수 있는 자본력 또는 금융 운용 실력이 관건이었다. 유대인들은 후자를 택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의 무역을 금융과 연계시켰다. 처음에는 담보금융이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신용대출을 상품에 연결시켰다. 유대인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역사적으로 약속어음을 담보로 한 신용대출은 중세 초기에 계약을 목숨처럼 중히 여기는 유대인들 사이에서 시작되었다. 그 뒤 유대인들은 믿을 만한 이방인들에게도 신용대출을 확대해 나갔다. 이것이 상인들 사이에서는 외상 장사로 발전했다. 신용대출과 외상 장사로 상업 활동에 필요한 유동성이 크게 늘어나는 효과를 보았다. 이것이 상업뿐 아니라 해상교역을 폭발적으로 늘리는 기폭제가 된다.
유대 상인들은 앤트워프 상설시장에서도 처음에는 신용대출을 상품에 연계시켰으나 나중에는 3개월에 2~3%, 곧 연간 8~12% 이자율의 ‘환어음’을 개발하여 정기시 상인들 사이에서 유통시켰다. 이렇게 상업과 무역을 지원하는 금융을 앤트워프의 유대인들이 성장시켰다. 원래 환어음의 역사도 중세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사람들은 당시의 화폐인 금이나 은을 집에 보관하기에는 너무 소중하다 못해 위험한 물건이었기 때문에 튼튼한 금고를 가지고 있는 금 세공인에게 맡겼다. 그리고 보관증서를 받아 화폐 대용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증서가 환어음의 시초이자 종이 화폐의 기원이다. 그 뒤 이것이 진일보하여 유대인들은 금은 이외에 상품에 연계시키는 환어음도 개발했다. 이것이 발전하여 1630년경에는 부유한 상사들이 상품과도 연계되지 않은 순수한 금융상의 환어음만 다루었다.
환어음은 당시 유통되던 약속어음보다 훨씬 발전된 금융기법이었다. 약속어음은 발행인 자신이 지급할 것을 약속한 것이다. 이에 반해, 환어음은 제3자가 지급 의무를 진다. 주로 물건을 외상으로 준 수출업자가 채무자인 수입업자를 지급인으로 지정해 발행한다. 이는 누가 됐든 어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약정된 시기에 어음에 표시된 금액을 무조건 지급할 것을 위탁한 증권이다. 한마디로 요사이 수표와 같은 기능을 했다. 당시 교역 활동을 하기 위해 금, 은 주화를 많이 가지고 먼 길을 여행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게다가 무척 무거웠다. 이러한 위험과 고충을 한 방에 해결한 것이 환어음이다. 이후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유대인 커뮤니티 사이에서 이러한 환어음이 여행 중간의 위험 부담을 줄이면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부를 쌓는 일에 관해 유대인이 기여한 최대 공헌은 신용대출이라는 제도 자체를 만든 일이었다. 뒤이은 공헌이 유가증권을 발명한 다음 이를 보급시킨 일이다. 유대인은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지역뿐 아니라 박해 가능성이 있는 지역에서도 유가증권의 사용을 추진했다. 그들이 이렇게 세계를 하나의 시장으로 간주하는 선진적인 시각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민족이 뿔뿔이 흩어진 이산(離散)의 결과였다. 일찍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 디아스포라 간의 교류로 글로벌한 시야가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 최대 항구로 급성장한 앤트워프
앤트워프의 인구는 유대인이 몰려오기 전까지는 2만 명이었다. 그러나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 몰려온 1500년 무렵에 두 배가 넘는 5만 명으로 급성장했다. 그 무렵 도시 인구의 반이 유대인이었다. 그 뒤 1516년 베네치아에 게토가 생겼다. 당시 베네치아에서 자유롭게 해상무역과 조선업 그리고 금융업에 종사하던 유대인들이 게토에 갇히게 되자 이를 피해 앤트워프와 암스테르담으로 몰려왔다.
이베리아반도에서 올라온 유대인들과 베네치아에서 옮겨온 유대인들이 합쳐지면서 여러 면에서 시너지 효과가 일어났다. 해상무역의 범위가 넓어졌으며, 금융기법이 발달하고, 특히 조선업이 강해졌다. 유대인들이 몰려온 앤트워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해양 공국 베네치아의 뒤를 이어 유럽의 중요한 유통 기지가 되었다. 이 시기에 앤트워프는 중계무역을 바탕으로 금융업이 급속히 커져갔다. 유대인을 추방한 영국은 무역과 금융 모두를 앤트워프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이 시기에 몇 가지 역사적 사건들이 발생했다. 합스부르크가의 저지대 헨트(겐트) 출신 카를 5세(카를로스 5세)가 선대의 결혼동맹 덕분에 1516년 스페인 왕까지 겸하게 되었다.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작해 가톨릭에서 신교가 갈라져 나왔다. 이후 스페인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카를 5세가 투르크의 침입이 있자, 제후들의 원조를 얻으려고 1526년 ‘신교 포교 금지’를 해제해 루터파의 포교를 허락했다.
그러자 앤트워프에서 종교재판이 폐지되었다. 당시 종교재판이란 주로 개종 유대인이 실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인지를 조사하여 허위로 밝혀질 경우 화형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반 종교혁명 조치였다. 스페인의 악명 높은 종교재판을 피해 고향을 등진 유대인으로서는 앤트워프가 축복의 땅이 되었다. 종교 핍박에서 벗어난 유대인들은 무역과 금융으로 앤트워프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이후 앤트워프 경제가 무섭게 급성장했다. 1560년 무렵에는 인구가 10만 명이 되어 당시 스페인의 최대 항구 세비야를 능가했다. 조그마한 앤트워프가 무역 면에서 신대륙을 거머쥔 스페인 제국을 추월한 것이다. 앤트워프는 당시 유럽에서 나폴리, 베네치아, 밀라노, 파리 다음의 큰 도시로 성장해 유럽 5대 도시의 하나이자 유럽 최대 무역항이 되었다. 이후 유럽 경제의 중심지는 단연 활기찬 앤트워프였다. 세계 교역의 절반 가까이가 이 도시를 통해 거래되었다. 완연히 국제적인 상업 도시의 면모를 보였다.
◇유대인, ‘앤트워프 약탈 사건’으로 암스테르담으로 자리를 옮기다
하지만 앤트워프의 번성은 오래가지 못했다. 스페인 제국의 재정 상태가 좋지 않아 저지대에 주둔하던 용병 부대의 급료를 주지 못했다. 이에 용병들이 밀린 급료에 불만을 품고 1576년 11월 앤트워프를 대대적으로 약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앤트워프 약탈 사건’이다. 약 7000명의 시민들이 살해되었다. 이때 많은 유대인들이 암스테르담으로 옮겨갔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이 있다.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소도시에 지나지 않았던 앤트워프가 1500년 무렵을 전후해 어떻게 이렇게 빨리 성장할 수 있었는지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유대인을 빼놓고는 설명할 길이 없다는 점이다. 이후 16세기 중후반부터 쇠퇴의 길을 걸으며 스페인 지배에 들어간 앤트워프의 짧은 번영기와 유대인 거주 시기가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참으로 무서운 민족이다. 지금도 이 시기를 바탕으로 발전한 벨기에는 비록 나라는 작지만 강소국으로 유명하다. 오늘날 벨기에에는 유럽연합(EU)의 집행부가 있어 유럽의 수도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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