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상] 이수만의 퇴장
이수만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잘했다. 초등학교를 전교 5위권으로 졸업했고, 중·고교 입시가 있던 시절에 명문 경복중·고를 거쳐 서울대에 들어갔다. 작사·작곡·노래 실력도 출중했다. 1977년 직접 만들어 부른 ‘행복’은 그해 최고 인기 가요 중 하나였다. 언변도 뛰어나 라디오 DJ와 대학가요제 MC로 활약했다.
▶그 시절 방송계에선 드문 유학파였다. 1981년 도미해 컴퓨터 공학 석사 학위를 땄다. 음악 전문 방송 MTV에 심취한 것이 그때였다. 즐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미국 팝송을 연구했다. 특히 미국인이 MTV를 시청하는 이유를 조사한 설문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미국인들은 ‘가수의 패션을 보려고’를 첫손에, ‘율동을 보기 위해서’를 둘째로 꼽았다. ‘노래를 들으려고’라는 응답이 가장 적었다. 어쩌면 이것이 한국 가요의 미래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1985년 귀국한 뒤 10년 준비 끝에 SM기획(현 SM엔터테인먼트)을 출범시키며 프로듀서로 변신했다.
▶이수만은 K팝 시대를 연 선구자다. H.O.T, 보아, 동방신기, S.E.S, 엑소, 소녀시대 등 그가 선보인 가수와 아이돌은 노래만 잘한 게 아니다. 시선을 사로잡는 외모에 칼 군무를 앞세워 ‘보는 음악’ 시대를 열었다. K팝 세계화에도 앞장섰다. S.E.S 멤버 유진은 재미교포, 슈는 재일교포 출신이었다. 엑소에는 중국인 멤버를 포함했다. 그렇게 중국과 일본 시장을 열었고, 현지 출신 K팝 가수도 탄생시켰다. 한국식 아이돌 육성법도 그가 틀을 잡았다.
▶가수에서 프로듀서로, 경영자로 변신하며 K팝 성공 신화를 일군 이수만이 SM엔터테인먼트의 경영 일선에서 퇴진한다. 이수만 1인 총괄 프로듀싱 방식에서 탈피해 복수의 제작 센터 체제로 분권화한다고 한다 1952년생으로 고희를 넘긴 이수만의 나이와 K팝 시장의 환경 변화를 고려했다고 한다. K팝 기획사 중 굳건한 1위였던 위상이 축소되며 4위까지 떨어진 최근의 부진도 변화를 미룰 수 없게 했다. 가요계에선 이수만이 이룬 성과를 ‘이수만 레거시’라고 한다. ‘이수만 이후’ SM의 성공적인 변신과 재도약에 K팝의 미래가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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