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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 최초 100회 출격 조종사‘6·25전쟁 영웅’ 김두만 장군

빠꼼임 2023. 2. 18. 08:21

핏빛 조국 하늘 지켜낸 96세 노장… “폭탄이 날아와도 두렵지 않았다”

[아무튼, 주말-허윤희 기자의 발굴]

공군 최초 100회 출격 조종사
‘6·25전쟁 영웅’ 김두만 장군

입력 2023.02.18 03:00
 
'대한민국 공군의 살아있는 전설' 김두만 장군이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F-51D 전투기 앞에 섰다. 6·25 전쟁 당시 그가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 기록을 세운 전투기와 같은 기종이다. 96세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꼿꼿한 자세로 그는 "하늘 위에선 무념무상, 오직 내가 할 일만 생각했다"고 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김 중위, 폭탄 10발을 갖고 가서 문산철교를 폭파시키고 오라!”

1950년 6월 27일 오전 10시. 김두만 공군 중위가 T-6 훈련기를 몰고 여의도 기지를 이륙했다. 비행기 날개 밑에 폭탄 걸이를 장착하고, 15㎏짜리 소형 폭탄 10발을 매단 채였다. 6·25전쟁 발발 사흘째. 그에게 부여된 첫 임무였다. 날이 좋지 않았다. 1500피트 상공에서 구름 속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항공기가 균형을 잃고 회전하며 곤두박질쳤다. 조종간을 잡아당기자 비행기가 구름 밖으로 튀어나왔고, 폭탄이 분리돼 항공기와 함께 나선을 그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반사적으로 스핀 정지 조작을 하는 순간, 폭탄이 땅에 떨어져 폭발했어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죠. 나중에 귀환해서 항공기를 살펴보니 날개 밑이 온통 달 표면처럼 울퉁불퉁 파여 있었습니다.”

김두만(96) 전 공군참모총장은 마치 며칠 전 일을 떠올리듯 73년 전 그날을 얘기했다. 전쟁 발발 당시 우리 공군엔 단 한 대의 전투기도 없었다. 당시 공군이 보유한 항공 전력은 T-6 훈련기 10대, L-5 4대, L-4 8대가 전부. 반면 북한은 전투기 및 폭격기 197대와 지원기 29대 등 항공기 226대를 확보해 놓고 있었다. 공군은 가용 전력을 총동원해 맨손 폭격을 감행했다. 김 장군은 “무기 장착이 불가능한 항공기는 후방석에 탄 조종사가 폭탄을 안고 가서 맨손으로 투하했다”고 했다.

김두만은 6·25 때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한 ‘전설’이다. 1950년 10월 여의도 기지 작전에 참가해 개전 초기 우리 군의 서울 탈환과 평양 입성에 기여했고,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 대동강 승호리 철교 폭파 작전에도 출격해 전공(戰功)을 세웠다. 1952년 1월 11일 F-51D 전투기로 대한민국 최초 100회 출격 기록을 세웠을 때,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제일 침착할 때가 출격하는 순간입니다. 조종복을 입고 조종석에 앉으면 그때부터는 무념무상(無念無想)입니다. 오직 내가 할 일만 생각합니다.” 이후 제10전투비행단장, 공군작전사령관을 거쳐 1970년 공군 최고 수장인 11대 참모총장에 올랐다. 2015년에는 88세 나이로 최초 국산 전투기 FA-50에 탑승해 후배 조종사와 함께 하늘을 날았다.

최근 서울 대방동 공군호텔에서 만난 그는 인터뷰 내내 한 치 흐트러짐이 없었다. 일본에서 자란 유년 시절과 ‘공짜로 비행기 탈 수 있다’는 광고에 속아 가미카제(자살 특공대) 대원으로 뽑힌 이야기, 전쟁 당시의 긴박한 상황과 박정희 대통령과의 인연까지, 영화보다 박진감 넘치는 노병의 백년사가 펼쳐졌다.

김두만 장군이 1952년 1월 11일 공군 최초로 100회 출격 기록을 세워 동료들에게 축하받는 모습. /공군 제공

◇목숨을 건 비행

-6·25 발발 당일을 기억하십니까.

“일요일이라 모처럼 늦잠을 자고 동료들과 영화 보러 외출을 나갔지요. 눈에 익숙하지 않은 전투기 2대가 굉음을 내며 김포에서 북쪽으로 날아가는 게 보였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소련제 야크기였죠. 헌병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장병들은 빨리 부대로 복귀하라고 했어요. 당시 T-6 10대가 여의도 기지 격납고에 있었는데, 북한군들이 격납고에 기관총을 퍼부어서 1대가 파손됐어요. T-6 항공기 10대는 6·25 직전 국민 성금을 통해 캐나다에서 구입한 대한민국 공군의 보물이었습니다. 연쇄 폭발로 다 날아갈 뻔했는데, 다행히 연료를 빼고 격납고에 넣은 덕분에 9대는 무사했어요.”

-전투기가 한 대도 없는 열악한 상황이었네요.

“1949년 10월 1일 공군이 창설됐는데 미국에 T-6 훈련기 판매를 요청했지만 한반도에 긴장이 고조된다고 퇴짜를 맞았어요. 예산도 없어서 1950년 5월 국민 성금 3억5000만원으로 캐나다산 T-6 10대를 구입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최초의 금속제 T-6 훈련기를 ‘건국기’라고 명명했어요. 캐나다가 파견한 교관 1명이 조종사 요원 10명에게 T-6 훈련기 교육을 하는 도중에 전쟁이 터진 겁니다.”

-첫 임무가 문산철교 폭파였죠?

“맥아더 사령부가 급하게 한국군에 F-51D 무스탕 전투기 10대를 제공하기로 해서, 선배 조종사 10명이 전투기를 인수하러 일본 규슈 비행장으로 떠난 직후였어요. 그때 중위였던 저는 T-6는 조종간도 못 만져본 상태였죠. 6월 26일 저녁, 김정렬 공군참모총장이 저를 불렀어요. ‘T-6를 전투에 투입해야겠는데 탈 수 있겠나?’ ‘타야죠, 타겠습니다!’ 다음 날 오전 1시간 연습하고 여의도에 착륙하니 바로 출격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우리 공군 전사(戰史)에 ‘스핀(통제 불능 상태) 폭격’이라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습니다.

“폭탄이 항공기에 매달려 있었다면 낙하 속도가 빨라져 항공기가 추락하고 말았을 겁니다. 나중에 김정렬 총장께 보고했더니, ‘세계 항공 역사상 스핀 폭격을 한 사람은 자네밖에 없을걸세!’라며 위로해 주더군요(웃음).”

-이후에도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셨죠?

“충북 음성의 북한군 포진지에 집결해 있던 트럭을 폭격했을 땐, 폭탄을 투하하고 항공기를 트는 순간 ‘꽝’ 소리가 났어요. 대공포에 직통으로 맞아서 충격으로 비행기가 뒤집어졌습니다. 가까스로 빠져나와 보니 조종석과 날개를 잇는 부분에 구멍이 커다랗게 나있어요. 탄흔이 조금만 위로 올라왔으면 내 다리가 날아갔고, 조금만 내려갔으면 좌측 연료 탱크가 완전히 폭발했겠죠.”

-그런 일을 겪으면 다음 출격할 때 두렵지 않습니까.

“우리 공군이 연이어 전사하자 불안감을 호소하는 조종사가 많았어요. ‘내가 죽으면 애랑 마누라는 어떡하냐’며 대성통곡한 조종사도 있었죠. 우리를 교육하고 함께 출격하던 딘 헤스 미 공군 대령이 위스키를 따라주며 그를 달랬어요. 근데 난 이상하리만큼 무덤덤했어요.”

그런 그에게도 죽음의 충격이 찾아왔다. 1952년 1월 9일, 강원 원산 철도 조차장과 금강산 부근 창도리 일대의 북한군 보급 기지를 폭격하는 것이 임무였는데, 산악 지대인 창도리에서 문제가 발생했다고 했다. “윙맨(보조 조종사)이었던 후배 이일영 중위가 폭격할 때 대공포탄이 날아들었어요. 이 중위 전투기가 땅에 내리꽂혔고,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지요. 잔해를 찾으려고 계곡을 헤맸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금강산에서 강릉 기지로 돌아오는 50분 동안 머릿속이 백지 상태였어요. 비행 생활 중 가장 마음 아팠던 순간입니다.”

-이틀 뒤 한국군 최초로 전투기 100회 출격 기록을 달성했는데요.

“정비사들이 몰려와 헹가래를 쳐줬는데, 일영이 시신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어요. 100회라니까 그런가 보다 하지, 그걸 세면서 출격한 것도 아니니까요.”

서울 대방동 공군호텔에서 만난 김두만 장군은 “핵 위협뿐 아니라 미사일도 성능이 점점 강화돼 미래의 전쟁은 하늘에서 결판날 것”이라며 “힘이 없으면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왼쪽 사진은 6·25전쟁 당시의 모습이다. /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공군이 가장 큰 전과로 꼽는 승호리철교 폭파 작전도 이끌었습니다.

“승호리철교는 중국에서 평양까지 수송된 보급 물자를 중동부 전선으로 수송하는 북한군 후방 보급로의 요충지였어요. 첫날은 실패했고, 13일 다시 출격했는데 일대가 구름에 덮여 있어서 2차 목표인 황해도 이천의 교량만 부수고 돌아왔어요. 1월 15일 ‘사천으로 내려가 후배 조종사를 양성하라’는 명령을 받고 경남 사천 기지로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철교 폭파는 후배들이 성공한 겁니다. 제1편대장 윤응렬 대위와 제2편대장 옥만호 대위가 이끄는 F-51D 6대가 적의 대공 포화를 뚫고 정확하게 표적에 투하해 철교를 폭파했죠.”

◇자살 특공대 투입 직전 살아남은 소년

김두만은 1927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일본 교토에 살던 작은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그는 “소학교 4학년 때 경비행기를 처음 봤다. 어디선가 날아온 비행기 한 대가 학교 상공을 선회하며 재주를 부렸다”며 “조종사 목에 맨 마후라(머플러)가 바람에 휘날리는 걸 보며 넋이 나갔다”고 했다.

-조종사 되는 길은 순탄했나요?

“밥벌이를 위해 기술자가 되려고 했어요. 교토에서 정밀기계 생산 업체로 유명한 시마즈 제작소를 찾아가니 반도인(조선인)은 안 된대요. 오사카로 건너가서 공장에 취직했죠. 그때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요. 우연히 길에서 ‘육군 소년 비행병 모집’ 포스터를 봤습니다. 모든 교육비가 공짜래요. 저기만 들어가면 비행기를 탈 수 있다니 꿈만 같았죠. 필기시험, 신체검사, 비행 적성검사까지 통과하고 합격 통지를 받았어요. 6개월 동안 지상 교육을 받고,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가서 비행 훈련을 받았습니다.”

-자살 특공대라는 걸 알았습니까.

“지상 교육 받을 때 조교들이 ‘야, 소모품들이 들어왔구나!’라며 환영했어요. 그땐 무슨 뜻인지 몰랐어요. 1945년 7월 싱가포르로 모이라는 명령이 내려와요. 동남아 여러 곳에서 훈련받고 있는 학생 조종사들이 전부 모였는데, ‘너희들은 오늘부터 가미카제 요원으로 편입됐다’고 하더군요. 소모품이 자살 특공대원이라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네요.

“다시 쿠알라룸푸르로 돌아가서 폭격 훈련을 받다가 8월 초 일본으로 복귀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중간 기착지인 캄보디아 프놈펜으로 이동해서 수송기를 갈아타야 하는데 거기서 광복을 맞았어요 하지만 당시 일본군 소속이었기 때문에 졸지에 연합군 포로가 됐죠. 베트남으로 옮겨 가 포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김두만은 1946년 4월이 돼서야 고국으로 돌아왔다. 부산항으로 함께 귀국한 일본군 출신 한국인 40~50명 가운데는 김정렬 제1대 공군참모총장도 있었다. 부산항으로 오는 배 안에서 김 총장은 “대한민국이 독립됐으니 곧 정부가 설 것이고, 군에 비행 부대도 생길 것”이라며 “그때 같이 모이자”고 했다. 김 초대 총장은 이후 한국군 조직에 참여해 1949년 10월 한국 공군 창설에 기여했고 1987년 국무총리까지 지냈다.

김두만 장군이 지난 2015년 최초의 국산 전투기인 FA-50에 탑승해 엄지를 들고 있다. / 공군 제공

-귀국 이후 생활은 어땠습니까.

“김 장군 주소를 들고 서울 돈암동 집에 찾아가니 반갑게 맞아주셨죠. 마침 매부가 서울 안암동에 병원을 차려서 조수로 취직했습니다. 월남하는 이북 사람들이 치료를 받으러 많이 왔는데, 그들을 통해 들은 북한 공산당과 소련군의 비인간성에 분노를 느꼈지요. 1년간 병원 근무를 하면서 공산주의 실체를 엿봤달까요. 광복 이후 정부 수립까지 3년간은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는데, 김 장군 집은 꽤 넓어서 타향살이하는 항공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습니다. 1948년 정부 수립 후, 9월 초 김포 기지에 육군 항공대가 창설됐을 때 항공인 105명이 빠르게 모일 수 있었어요.”

그는 김영환 장군과의 마지막 비행에 대해 이야기할 땐 눈물을 흘렸다. 김정렬 총장의 동생인 김영환은 공군 창설의 주역이자 6·25 때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켜낸 장군이다. 그가 형수의 붉은 치맛단 자투리 천으로 만들었던 ‘빨간 마후라’가 오늘날 조종사들의 상징이 됐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54년 3월 5일, 김영환 장군은 제10전투비행단 창설 기념 행사차 F-51D 전투기를 몰고 사천에서 강릉으로 이동하던 중 교신 두절과 함께 실종됐다.

-어떤 상황이었나요.

“김 장군이 탑승한 1기는 보조연료탱크를 달지 않은 상태였고, 내가 탄 2기에는 200갤런짜리 연료탱크 2개가 날개 밑에 장착돼 있었어요. 그 안에 비행단에 전달할 낙하산이 가득 들어있었는데, 이게 또 둘의 생사를 갈랐습니다. 사천을 이륙해 포항까지 갈 때는 하늘이 무척 맑았어요. 포항에 접어드니 갑자기 비가 내리고, 삼척 상공을 지나니 고도가 150피트까지 내려갔어요. 김 장군이 콜로 ‘야, 다 왔다. 힘내라!’고 격려했는데, 그 말이 끝나자마자 눈앞을 분간하기 힘들 정도의 폭설이 밀려왔습니다. 그가 좌측으로 급선회를 시도했는데, 나는 탱크 무게 때문에 그 속도를 못 따라갔어요. 장군의 비행기는 폭설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사라졌습니다. 끝내 유해는 찾지 못했어요. 전시(戰時)가 아니라도 이런 일을 당하는 게 조종사들의 숙명이에요. 제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 딴 게 없습니다. 운이 좋았을 뿐이죠.”

-백선엽 장군과는 생전에 만나신 적 있나요.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 때 뵌 적이 있습니다. 타군이지만, 존경하는 진짜 군인입니다.”

-백 장군이 일제강점기 만주군 간도특설대에 배치됐다는 이유만으로 ‘친일’로 매도하는 시각이 있는데요.

“지금의 시각으로 그 시절을 재단해선 안 돼요. 장군도 생전에 ‘간도특설대로 발령받아 부임한 1943년 초 간도 지역은 항일 독립군도, 김일성 부대도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겨 가고 없을 때였다’고 했어요. 제가 일본 육군소년비행병학교를 졸업하고 특공대원이 된 것도 공짜로 비행술을 가르쳐준다는 곳이 있다기에 입학했을 뿐입니다. 내가 조국의 영공 수호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울 수 있었던 것도 일제 치하에서 모욕을 견뎌가며 조종술을 배웠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일본을 이용했다는 의미에서 ‘용일(用日)’이란 표현을 쓰고 싶어요.”

'대한민국 공군의 살아있는 전설' 김두만 장군이 공군의 상징인 빨간 마후라를 메고 있다.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전쟁을 막는 건 결국 사람”

김두만 장군은 “공군작전사령관을 지내며 겪어본 박정희 대통령은 훌륭한 전략가였다”고 했다. 1966년 그가 베트남 주월 한국군 부대와 우리 군의 작전 지역을 시찰한 후 청와대에서 방문 보고회가 열렸다. 박정희 대통령이 장군을 따로 불렀다. “베트남에 우리 공군 조종사를 파견해야 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그가 “보내야 한다”고 답하자, 이유를 물었다. 장군은 “첫째, 공군의 사기를 높일 수 있고, 둘째, 베트남은 최고의 실전 훈련장이자 절호의 교육장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이 말했다. “그렇다고 우리 공군 조종사들을 희생시키면 안 되잖소? 정예화된 우리 공군 조종사들을 보내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받아내야지.”

그러나 미 존슨 행정부 입장에서 절실했던 것은 육군의 추가 파병이었기 때문에 베트남전에 우리 공군은 파병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은 당시 차지철 공화당 의원이 우리 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공개적으로 비판하게 했어요. 봐라, 내가 국내외 비판 여론을 잠재우며 어렵게 파병 결정을 했으니, 당신들도 군사원조와 경제협력을 더 많이 해달라고 요구하는 고도의 전략이었죠.”

1970년 공군참모총장에 취임하는 김두만 장군(왼쪽)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계급장을 달아주는 모습. /공군 제공

-2015년 6월엔 40년 만에 조종복을 입고 하늘을 날았습니다. 기분이 어땠습니까.

“국산 전투기를 꼭 한번 타보고 싶었는데 비록 후방석에 앉았지만 20대 조종사로 돌아간 기분이었습니다. 상공에서 본 조국이 너무 아름다웠어요. 6·25 때 산야는 헐벗은 황토빛이었고, 낙동강과 인근의 산은 핏빛이었는데 그런 나라가 초록빛이 돼 있었어요. 고속도로까지 뻗어 천지개벽한 모습을 보니 감개무량했습니다.”

-요즘 하루 일과는 어떠십니까.

“아내가 8년 전 세상을 떠난 후,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큰딸과 삽니다. 오전 6시에 일어나 스트레칭 한 시간 하고, 신문 3종을 정독해요. 일주일에 2~3회 골프 치는 게 낙이라 하체를 단련하려고 매일 걷습니다. 운전도 직접 해요. 치매 검사를 받았더니 100점 만점이 나왔어요.”

-가족들에겐 어떤 남편, 어떤 아버지였나요.

“현역 시절에는 비행기만 타느라 가족들을 못 챙겼어요. 2남 2녀 키우고 집안 대소사까지 아내가 도맡아했죠. 잔정을 듬뿍 주지 못한 아이들에게도 미안함과 고마움을 품고 삽니다.”

-전투기 추락 사고 등 요즘 뉴스를 보면서 국민들은 불안해합니다.

“문재인 정부 5년 동안 훈련을 제대로 못 한 건 사실인데 그건 한미 합동 훈련이고, 공군은 자체적으로 기본 훈련을 계속해 왔어요. 추락 사고가 훈련 부족 때문은 아닐 겁니다. 중요한 건 정신력이에요. 미군이 넘겨준 최신식 항공기와 전략무기를 갖고 있던 베트남군이, 열악한 무기로 대항한 월맹군에 패한 이유가 뭡니까. 바로 내부 갈등, 그리고 정신력 싸움에서 졌기 때문이에요.”

-공군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앞으로 다가오는 위협은 과거와는 다를 겁니다. 핵 위협뿐 아니라 미사일도 성능이 점점 강화되고 있죠. 미래의 전쟁은 하늘에서 결판 난다는 얘기에요. 지금의 우크라이나 사태는 힘이 없으면 평화를 지킬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죠. 좋은 인재 뽑고 잘 훈련해 최고의 조종사가 되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요즘 ‘헤이트 조선’이라고들 하는데, 바깥에선 대한민국을 기적이라고 불러요. 6·25 때 전투기 하나 없었던 공군이 지금 최첨단 전투기로 무장해 국산 전투기를 수출까지 합니다. 이걸 자랑스럽게 생각해야지 자꾸 폄하하고 부정하는 세력이 있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에요. 자부심을 가지세요.”

-윤석열 정부의 국방 정책을 조언해 주신다면요.

“결국 전쟁을 억제하는 기본은 사람이에요. 최고의 장비를 갖춰도 운영하는 사람이 멍텅구리면 시스템 자체가 멍텅구리가 돼요. 북한 실정이야 우리가 너무 잘 알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고모부를 총살하고, 이복형을 독살한 김정은을 계몽군주라고 추종하는 사람들이 한쪽에서 득세하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입니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평화를 유지하면 멀지 않은 장래에 북한은 자멸하게 돼있어요. 지난 정권 5년 동안 엉망이 된 걸 정리만 잘해도 성공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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