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 신루트 르포] 성주와 합천 잇는 52년 만의 개방 코스
산행 르포
경북 성주군 가천면 법전리에서 가야산 칠불능선 오르는 5km 구간
52년 만의 개방이라니, 반세기 만에 처음 닿는 사람의 발자국이 아니던가. 가야산의 새 역사를 쓰는 날이라는 감격도 잠시, “여긴 내가 3년 전에도 갔고, 네댓 번은 다녀온 길이야”라는 등산객 말에 김이 새고 말았다.
지난 7월 1일, 가야산국립공원에 새 등산로가 열렸다. 1972년 아홉 번째 국립공원 지정 후 52년 만의 개방이다. 새 코스는 경북 성주군이 10여 년간 공을 들인 결과물이다. 가야산 상왕봉 정상을 기준으로 남쪽의 합천과 북쪽의 성주로 나뉘는데, ‘합천 가야산’이라는 인식이 굳어져 성주에서 상대적으로 섭섭했던 것.
10여 년간 국립공원을 설득하고 예산을 확보해 2년 전부터 새 코스 설계에 들어가 지난 7월 산문山門을 열었다. 곧장 경북 성주로 향했고, 대구 산악인 최원식(대한산악구조협회 이사)씨와 부산에서 온 이정애(부산산악연맹 산악구조대)씨가 동행했다. 새 코스 취재를 위해 가야산국립공원 조현유 계장과 권영찬 주임이 함께한다.
전형적인 시골 산 입구다. 해인사와 만물상 입구에 비하면 지극히 소박하고 좁은 길, 순수한 자연을 만날 것 같은 기대가 생기는 길이다. 작은 법전탐방지원센터와 화장실이 들머리를 알려준다. 산길 반대편에 마수폭포 가는 길이 있다. 여름하면 폭포 아닌가, 갔다가 되돌아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언제 다시 올까’ 싶어 폭포로 향한다.
짙은 숲 속에 동굴처럼 자리 잡은 폭포다. 다가가자 시원한 냉기를 뿜어내며 자연 에어컨 역할을 한다. 크지 않지만, 수량이 적지 않고, 수심이 얕아 산행 후 땀 씻기 제격이다. 입맛을 다시며 산으로 향한다.
‘봉양법전탐방로’라고 적힌 글귀가 산문이다. 봉양리와 법전리를 잇는 5km의 임도 숲길. 기대 이상이다. 정갈한 잎갈나무와 다양한 활엽수가 우거져, 걸을수록 숲이 안으로 차오른다. 소프라노 성악가 같은 새 소리, 잎을 여러 번 투영해 그늘인지 햇살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빛살. 오르막인데 즐거움의 가속도가 붙는다.
마침내 ‘칠불능선 탐방로’라 적힌 새 등산로 입구. 임도를 벗어나 좁은 산길을 오른다. 한참 동안 읽던 소설의 스토리가 급변하며, 새로 시작된 느낌이다. 길은 좁으나 닳아 있다. 탐방로 개설 실무자인 국립공원 권영찬 주임은 “중턱쯤에 암자 터가 있는데 무속인들이 기도하러 다니던 곳”이라며, 원래 있던 길이라고 한다. 공식 탐방로는 아니지만, 암암리 사람들이 다니던 산길을 공식화한 셈이다.
나무를 한 쌍이라 부를 수 있을까. 물박달나무와 노각나무,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반대 집안의 자제들이 한 뿌리에서 난 것처럼 정을 나누고 있다. 물박달은 여러 겹의 껍질이 거칠고 지저분하게 수피를 에워싸고 있고, 노각은 기린의 목처럼 매끄럽고 반질반질하다. 정반대의 모습에 끌렸을까, 아무도 오지 않는 숲에서 살고 싶었을 텐데 새 길이 열리며 들키고 말았다.
새안골 상류는 물 없는 건천이지만 새로 만든 다리가 놓여 있다. 우천 시 행여 산객들이 고립될 것을 우려해 만든 다리라고 한다. 본격적으로 고도를 높인다. 더 이상 돌려 말하지 않겠다며, 급경사로 덮쳐온다. 단도직입적인 가야산의 말을 삼키노라면, 잡념이 훨훨 날아간다. 이분법적인 생각과 이기적이었던 습성들, 화염 속 종이처럼 사라지고, 무념무상의 산길로 초대된다.
진주 산꾼 “소문 많고, 볼 건 없어”
암자 터는 산길에서 50m 이상 떨어져 있고, 개척산행을 해야 닿을 수 있다. 땀이 흥건한 몸은 눈으로 답사를 끝내고, 가야 할 산길로 이미 돌아와 있다. 쓰러진 나무가 산길 주변에 널려 있다. 권영찬 주임은 “산길을 내느라 나무를 베어낸 것이 아니다”라고 하며, 올해 2~3월에 내린 습설이 얼어붙어,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나무가 부러진 것이라고 한다. 흡사 태풍이 지나간 듯 산길 밖은 부러진 나무들이 신음하고 있다.
지능선 등걸에 올라타자, 사람을 떼어놓으려 발길질하는 야생마처럼 산길이 거칠다. 사람이 다니지 않아, 바위는 날이 섰고 길은 자연 그대로의 날것이다. 철계단이 반가울 정도로 폭염의 급경사는 진을 빼놓는다. 국립공원에서 가장 어려운 코스로 표시한 검정색 탐방로다. 위험한 곳은 없으나 심장을 삼킬 듯 덮쳐오는 급경사가 누그러들 기미가 없다.
내려오던 등산객이 동행한 국립공원 직원을 보고, 새 코스에 대한 소감을 전한다. 진주에서 온 50대 등산객은 “소문만 많고, 볼 건 없다”며, 찰나를 놓치지 않고 불만을 토로한다. 가야산이라 하면, 화려한 바위능선을 생각하기 마련인데 기대에 부응하는 명소가 없다. 권영찬 주임은 “내년에 전망데크 공사가 예정되어 있다”며 “예산 문제가 있어 처음부터 모든 걸 갖추기는 어렵다”고 새 길을 변호한다.
가혹한 계단도 여기서는 오아시스다. 계단 꼭대기에 서서 뒤돌아보자, 멀리 성주읍내가 드러난다. 주변 산이 낮게 엎드린 모양새다. 몇 시간 산행했을 뿐인데 속세를 아득히 떠나온 것 같다. 깨끗하게 시야가 열린 건 아니지만, 처음 만나는 경치는 오아시스마냥 반갑다.
법전리 새 코스는 블랙홀 같다. 잡념을 삼키고, 번뇌를 삼키고, 올라야 한다는 생각도 삼켜, 해발 1,300m대에 이르면 오름짓 자체에만 집중하게 된다.
주능선 칠불능선 삼거리에서 모처럼 뙤약볕을 마주한다. 정상에 준하는 성취감이 투명하게 온 몸을 감싼다. 고도 1,000m를 우악스럽게 올려쳐낸, 스스로는 알고 있다. 대단한 기록을 세우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않은 것의 가치를.
이토록 대단한 정상이 국내에 몇 곳이나 있을까. 압도적 존재감의 상왕봉 정상에서 경치를 즐긴다. 일대를 제압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정상의 힘을 눈으로 맛본다. 황금비율로 펼쳐진 완벽한 비경. 잊혀진 가야국의 마지막 유산 같은 고고한 아름다움이 전설처럼 펼쳐진다.
1,000년 전부터 유명한 불꽃 바위 명산
최원식 이사가 언제 챙겼는지 선물처럼 500ml 얼음물을 하나씩 쥐어준다. 달궈진 세상이 순식간에 “촤르르”하는 효과음과 함께 식으며 시야가 선명해진다. 1751년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가야산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경상도에는 석화성石火星이 없다. 오직 합천 가야산만이 뾰족한 돌이 줄을 잇달아서 불꽃같고, 공중에 따로 솟아서 극히 높고 빼어나다.’
바위가 불꽃처럼 타오르는 명산이라 평한 것.
신라의 천재 문장가라 불렸던 최치원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말년에 가야산을 터전으로 삼아, 가야산 신선이 되었다는 풍문이 생겼으며, 율곡 이이, 한강 정구, 성해응 등 1,000년 동안 숱한 명사들이 가야산을 찾았다. 조선시대 문장가인 정구는 1679년 보름간 가야산을 누비며 <유가야산록>을 남겼으며, <여지승람>에는 ‘가야산의 모양새는 천하 으뜸이요, 지덕이 비길 데 없다’고 하여 예부터 한반도 12대 명산에 속했다.
가야산은 멀리서 봐도 환상적이다. 시야가 맑은 날 지리산 주능선에서 보면 동쪽으로 이상적인 삼격형 실루엣이 드러난다. 구름 위에 솟은 천상의 성처럼 완벽한 ‘먼 산’이 가야산이다. 넓이와 품은 지리산에 비할 바 못되지만, 상왕봉, 칠불봉, 만물상, 홍류동, 남산제일봉으로 이어지는 경치는 과히 비경을 하나씩 연결해 묶은 목걸이와 같다. 가야산의 이런 명성에 비하면 성주 법전리 새 코스는 진주에서 온 산객의 말처럼, 길을 내기 위해 만든 ‘그냥 산길’이다.
칠불봉으로 간다. 여기까지 왔는데 만물상을 거치지 않을 수 없다. 칠불봉 꼭대기에서 이정애씨(부산산악연맹 구조대)가 먼저 간 선배들을 떠올린다. 50대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구조대에 가입했는데, “마음의 짐이 있어서”라고 한다. 2013년 일본 중앙알프스 산행에 나섰다가 악천후로 4명의 산악회 선배가 숨졌다. 단체 등산객 20명 중 한 명이었던 이씨 입장에서는 불가항력적인 사고였지만, 반복하지 않기 위해 늦은 나이에 어렵게 구조대에 가입했다. 회한 많은 가슴의 응어리를 풀어주려는 걸까. 몽실몽실 흘러가는 구름이 평화롭다.
새 울음소리 쩌렁쩌렁 울리는 늦은 오후의 가야산. 아직 산에 남은 이는 우리뿐이다. ‘계단 천국’을 지나 서성재에 닿자 축구 전후반을 후회 없이 뛴 선수마냥 몸이 가라앉는다. 편히 하산할 수 있는 계곡 갈림길을 두고, 오르내림 많은 바윗길인 만물상 능선으로 든다. 말은 하지 않아도, ‘산꾼이 산을 피할쏘냐’하는 마음은 같다.
상아덤을 시작으로 바위능선의 악보에 맞춰 춤을 춘다. 손으로 잡고, 발을 뻗어 리듬감 넘치는 박자로 능선을 오르내린다. 만물의 모든 상을 볼 수 있다는 만물상답게 기암열전이 펼쳐진다.
산행 시작 8시간을 넘어서자, 흥건히 쏟아낸 땀으로 몸이 축축하다. 몸은 노곤하여도 마음은 황홀경이라 의식하지 않아도 발은 안전한 곳을 디뎌, 완전한 몰입에 이른다. 어떤 두려움도 고독도 없는 작은 열반에 오른 듯, 가야산이 발끝으로 와서 안긴다. 설명할 수 없는 산과의 합일감. 행복하다.
※ 산행 정보는 <새 코스 분석> 기사 참조. 등산지도는 <특별부록지도> 참조.
“가야산에서 제일 힘든 코스지만 한적해서 좋아”
52년 만에 개방된 코스에서 “몇 년 전에도 왔던 길”이라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어르신 산꾼. 알고 보니 가야산 아래가 고향이다. 지금은 왜관읍에 살고 있지만 매년 4회는 가야산 산행을 하고 있으며, 비법정으로 지정된 후에도 “법전리 코스로 상왕봉을 몇 번 올라갔다”고, “개척 산행하느라 고생 깨나 했다”고 말한다.
법정이냐 비법정이냐 보다는 “젊을 적부터 다니던 뒷산”이라는 말로 모든 걸 정리한다. 공단 직원들이 “비법정 코스로 다니면 위험하다”고 하자, “어릴 적부터 알던 산이라 위험할 것 없다”고 웃으며 말한다. 국립공원 직원들도 설득을 포기하는 눈치다. 이 코스의 매력에 대해 묻자 “능선이 가까워지면 엄청 가파르다”며 “가야산에서 가장 힘든 코스”라고 한다. 그럼에도 찾는 것은 “한적한 산길이 좋아서”라고 말한다.
“가야산 만물상 코스 가장 좋아해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다 싶었는데, 유튜브 구독자 7만 명의 ‘싼타TV’ 운영자 김은석씨(38)를 만났다. 새 코스 개방 소식을 듣자마자, 유튜브로 소개하기 위해 찾은 것. 구독자수가 많은 유튜버는 촬영해 주는 스태프가 있지 않을까 예상했으나, 빗나갔다. 혼자 산행하고, 혼자 찍고, 편집도 스스로 한다. 그의 영상은 주로 산행 코스를 소개하는 내용이 많아 초보자들이 정보를 얻고자 보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2019년부터 등산 유튜버로 활동을 시작했으며, 도봉산 아래에서 나고 자라 부모님 따라 도봉산을 다녀 산행이 익숙하다고 한다. 직장 생활하며 운동의 필요성을 느껴서 등산을 제대로 시작하게 되었고, 지금은 직업 유튜버로 활동하고 있다.
“초보자 입장에서 등산 코스 찾는 게 힘들더라고요. 제가 목말라서 만든 정보들이예요. 350개 정도 영상을 올렸고, 200개 정도 산을 소개했어요. 개인적으로는 설악산과 지리산을 가장 좋아해요. 코스만 놓고 보면 가야산 만물상을 가장 좋아해요.”
초보자들을 위한 추천 산행지를 묻자, “육산의 매력을 체험하려면 서울 청계산과 아차산 용마산을 추천하고, 바위산 매력을 체험하려면 사패산과 불곡산을 추천한다”고 논리 정연하게 말한다. 더불어 “정상까지 무리하게 산행하는 분이 많은데, 자기 체력에 맞게 산행하기”를 당부한다.
“성주와 합천 잇는 산길이자 다양성 주는 길”_
권영찬(32) 주임은 가야산의 행동대장이다. 시설 담당이라 등산로 관련 작업을 도맡고 있어 일주일에 최소 1회는 가야산의 탐방로를 답사한다. 새 코스는 경북 성주군에서 지역 활성화를 위해 10년 전부터 노력해 2022년 개설이 확정되었고, 지난해 코스 조율이 끝났다.
법전리 코스가 열린 지 며칠 되지 않았지만 하산길에 공원 사무실을 방문해 “엄청 힘들기만 하고, 볼거라곤 나무밖에 없다”고 항의와 하소연을 섞어 이야기하는 탐방객이 많다고 한다. 권 주임은 “탐방로가 완성되려면 사람들의 발길도 필요하고 시간이 필요하다”며 “지자체에서 차차 예산을 확보해 전망데크와 벤치 같은 시설을 늘려갈 예정”이라고 한다. 또 “다양한 활엽수가 많아 가을에 오면 단풍이 보기 좋을 것”이라고 한다.
지리산 자락이 고향이며 지금도 가족이 산청에 있다는 조현유(45) 계장은 원래 등산을 즐기지 않았으나 직업적으로 다니면서 등산의 즐거움에 눈을 떴다. 그는 “이렇게 맑은 공기와 깨끗한 자연을 직업으로 다닐 수 있어서 좋고, 산에서 만나는 사람도 좋은 분들이 많다”며 “보람되고 즐거운 일”이라고 한다.
법전리 코스를 만들면서 가장 중점을 둔 것은 “안전”이라며, 새 코스의 매력은 “성주와 합천을 잇는 산길이자, 가야산 전체로 보면 산행의 다양성을 준다”고 설명한다. 특히 “힘든 만큼 정상에 올랐을 때 성취감은 크다”고 말한다.
월간산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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