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료

무박2일 걷기

빠꼼임 2025. 4. 12. 12:31

일몰부터 일출까지… 무박2일 걷기, 무념무상 극기

테스형(히포크라테스)은 말씀하셨다. “우울하면 걸어라.” 그래도 우울하면? “더 걸어라.”

해 질 녘, 부산 다대포해수욕장에 1300여 명의 남녀가 모여들었다. 밤새 걸을 요량으로. 무박 2일, 풀코스 56㎞ 걷기 행사 ‘오륙도(56道) 투나잇’이 열렸던 것이다. 낙동강을 따라 대저생태공원을 지나 수영강 등등을 넘고 넘어 해운대해수욕장까지 도달하는 여정. 강원도 춘천부터 제주도에서까지 인파가 몰려왔다. 연령 폭도 넓었다. 심지어 중학생까지. 일몰과 함께 일제히 걸음을 뗐다. 역사는 밤에 이뤄진다던가.

해넘이를 바라보며 장거리 걷기 체험에 나선 참가자들. /정상혁 기자

무박 2일 걷기, 이름하여 ‘나이트 워크’는 전국에서 궐기하고 있다. 걷기 열풍에 더해 야경까지 즐기는 이색 운동. 서울 ‘한강 나이트 워크 42K’(42㎞), 경주 ‘신라의 달밤 165리 걷기 대회’(66㎞), 강원도 ‘원주 나이트 워크 챌린지’(30㎞)…. 밤에 더욱 만개하는 조명발, 주요 관광지와 도심의 색다른 면모를 드러내는 관광 유인 효과도 크다. 다음 달 광화문 일대에서 처음 열리는 ‘펀 나이트 워크 5K’(5㎞)처럼 단거리로 조성해 코스마다 공연 이벤트를 배치하는 식으로도 진화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난달 29일, 안면을 때리는 해풍을 헤치며 걷고 걸었다. 백사장과 갈대밭을 지났다. 오후 7시쯤 해가 완전히 지자, 풍경은 극적으로 변신했다. 일단 보라색 바다가 펼쳐졌다. 반대쪽으로 눈을 돌리면 일찍 핀 벚꽃, 불 밝힌 대교(大橋)와 가로등과 야행성 빌딩으로 도시는 불야성이었다. 도로는 한산했고, 행인도 거의 없었다. 걷기에는 최상의 컨디션. 부산걷는길연합 박경애 사무국장은 “밤샘 걷기라는 콘셉트가 발길을 끌어 참가자가 작년보다 2배 가까이 늘었다”며 “올해 처음 시청 측의 지원금까지 편성됐다”고 말했다.

서정적 풍광이 족저근막의 아픔을 덜어준다. 다만 밤새 걷기 위해서는 단단한 준비가 필수다. /정상혁 기자

걷기는 극기의 동의어. 2시간쯤 지나자, 대퇴부가 뻐근해졌다. 재잘대던 사람들이 점차 침묵의 현자가 돼갔다. 경로를 이탈해 인근 커피숍으로 향하는 무리도 포착됐다. 게다가 별스럽게 추운 날이었다. 수도권에는 난데없는 눈까지 내렸다. 쉴 새 없는 맞바람에 골이 띵했고, 낙조정 잔디밭에서 야외 석식을 먹고 나서는 체감 기온이 영하로 떨어졌다. 걷기는 경쟁과 무관하다. 완보냐 아니냐, 그뿐. 그러나 본 기자는 이 와중에도, 이왕 왔는데, 선두권으로 골인해야 한다는 좀스러운 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사달은 금정산성 고갯길에서 터졌다. 짐 때문이었다. 노트북 서류가방. 오후 업무를 마치고 급히 오느라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걷기 대열에 합류했는데, 짐 보관 장소가 보이지 않아 그냥 들고 출발한 게 패착이었다. 나중에 재보니 6㎏이었다. 왼손·오른손 번갈아 들다가, 등에 업었다가, 품에 껴안고도 걸었다. 가방은 번뇌 그 자체였다. 게다가 이 워크(walk)는 사실상 워크(work) 아닌가. 화가 치밀었다. 하중이 1㎏ 증가할 때 관절에 가해지는 부담은 4~5㎏씩 증가한다고 한다. 하산하면서 결국 허벅지가 다 털려버렸다.

새벽 2시, 남은 거리 18㎞. 이때부터는 두 발을 끌다시피 걸었다. 장 자크 루소는 ‘고백록’에서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고 고백했다. 센텀시티로 이어지는 텅 빈 새벽의 온천천 시민공원을 지나며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곱씹었다. 걸으면 누구나 철학자가 된다. 그러나 걷고 또 걷다 보면 무념(無念)이라는 또 다른 경지에 이른다. 생각이라는 작은 무게라도 덜어내려는 육체의 생존 본능 같은 것이라는 생각. 내려놓는 연습. 한참 뒤처져 있던 할머니들이 기자를 추월해 걷기 시작했다.

다대포해수욕장을 출발한 지 13시간이 지나 해운대해수욕장에서 받은 56㎞ 완보증. /정상혁 기자

5시 30분쯤, 사위가 희붐해졌다. 긴 철야(徹夜)의 끝을 알리며 떠오르는 해. 그러나 9㎞가 더 남아 있었다. 첫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그냥 버스를 탈까? 유혹이 엄습했다. 간사한 마음이 자꾸 타협을 제안할 때 그냥 앞으로 걸어가는 힘, 그것을 양심이라 부를 것이다. 이날 풀코스 도전자 중 완보에 성공한 건 247명. 오전 7시 10분, 해운대해수욕장에 도착해 결국 ‘완보증’을 받았다. 출발 13시간 만이었다. 그리고 곧장 부산역을 향해 터벅터벅 발길을 옮겼다. 좌석에 앉자마자 세상 근심이 사라졌다. 테스형의 말씀이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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