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악인 김창호(49) 대장은 2013년 최고와 최악의 순간을 하루 새 겪었다. 그는 산소 탱크 없이 8848m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8000m급 히말라야 고봉(高峰) 14개 무산소 등반의 피날레였다. 국내 첫 기록이자 세계 등반사에서 흔치 않은 쾌거였다. 하지만 다음 날 새벽 함께 내려오던 후배가 정상 아래 7950m 캠프에서 숨졌다. 산소마스크를 쓰지 않고 버티다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런 높이에선 산소량이 평지의 40%밖에 안 된다고 한다. 그는 무산소 등정을 지키려는 후배를 못 말린 죄책감에 시달렸다.
▶산악인에게 등반 사고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김창호는 2007년에도 에베레스트 정상 직전 캠프에 있었다. 무전기에서 근처 캠프에서 자던 박영석 원정대 대원 둘이 추락사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김 대장은 정상 공격을 포기하고 시신 수습을 돕기 위해 철수했다. 7년 전 박영석이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됐을 때도 김창호는 구조대에 자원했다. 박영석은 2001년 히말라야 14좌(座)를 완등한 한국 산악계의 전설이었다. 수색 작업에 나선 김창호는 절벽을 오르다 로프가 빠지는 바람에 큰 사고까지 당할 뻔했다.
▶김창호 대장이 엊그제 네팔 구르자히말 산에서 조난당해 숨졌다. 기존 등반로가 아닌 새 루트를 뚫는 길에 나선 터였다. 그는 남들이 가지 않은 새 등반로를 개척하는 '코리안 웨이'의 선구자였다. 두 해 전 네팔 강가푸르나 남벽에도 신(新)루트를 개척했다. 이런 공로로 작년 산악계 오스카상으로 꼽히는 '황금피켈상'을 한국인 최초로 받았다.
▶김창호 대장은 4년 전 조선일보가 통일의 꿈을 내걸고 유럽과 아시아 1만5000㎞를 달린 원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 평화대장정 원정대를 책임졌다. 베를린서 출발한 원정대가 우랄산맥과 시베리아를 건너 고비사막, 만리장성을 거치는 동안 대원들을 다독이며 일으켜 세웠다. 김 대장은 "원정대 제1 목표는 대원 모두가 무사히 원정을 마치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다짐대로 한 사람의 낙오 없이 96일간의 원정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From home to h
ome' 김창호 대장은 "가장 성공한 원정은 대원 모두가 집 문을 열고 나가서 닫고 들어오는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이런 베테랑도 어찌할 수 없는 순간이 있는 모양이다. 한 해 전 본지 인터뷰에서 왜 산에 오르냐는 질문에 그는 "그 답을 찾기 위해 오른다"고 했다. 후배 산악인들은 남이 가지 않은 길을 찾아나선 그의 도전에서 답을 헤아렸을 것 같다.
김창호(49·사진) 대장 등 한국인 5명이 히말라야 등반 도중 돌풍과 눈사태가 베이스캠프를 덮치는 사고로 사망했다. 사고는 지난 12일 네팔 구르자히말산 해발 3500미터 지점에서 일어났고, 이튿날인 13일 새벽 김 대장 등 한국인 원정대 시신이 베이스캠프 부근에서 발견됐다.
주(駐) 네팔 한국대사관 측은 "13일 새벽 김 대장 일행의 베이스캠프 인근에서 김 대장 등 한국인 5명과 네팔인 가이드 4명의 시신을 발견했다"면서 "베이스캠프는 눈사태에 파괴된 채 하루전 발견됐다"고 했다. 사고 당일 돌풍은 나무가 통째로 뽑힐만큼 강했고, 무너져내린 눈더미는 베이스캠프를 완전히 파괴시킬만큼 심각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창호 대장이 이끄는 ‘2018 코리안웨이 구르자히말 원정대’는 지난달 28일 구르자히말 남벽 직등 신루트 개척에 나섰다. 11월 11일까지 45일 일정이었다.
원정대는 당초 6명이었다. 그러나 한명이 건강 악화로 산기슭에 남았고, 나머지 대원들은 등반을 이어갔다. 사고가 난 12일 하산할 예정이었던 대원들이 소식이 없자, 산기슭에 잔류하고 있던 대원이 네팔인 가이드를 보내 눈사태로 베이스캠프가 부숴진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사망자는 김창호 대장을 비롯해 유영직(51·장비 담당), 이재훈(25·식량 의료 담당), 영화감독 임일진(49), 그리고 정준모 한국산악회이사 등 5명과 이들을 돕던 네팔인 가이드 4명 등 총 9명이다.
김창호 대장은 2013년 한국인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무산소로 완등한 산악인이다. 대원들 중 가장 연장자인 유영직 대원은 2011년 네팔 마칼루(8643m)를 등반하고, 2013년 네팔 아마다블람(6859m) 동녘 신루트를 등반한 베테랑 산악인이다. 이재훈 대원은 부경대 산악부 출신으로 식량과 의료 지원을 담당했다.
임일진 감독은 다큐멘터리 촬영을 위해 원정대에 참가했다. 임 감독은 주로 산악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었던 대표적인 산악영화 감독이다. 대표작으로 '히말라야', '벽' 등이 있다. 당초 원정대 명단에 없던 정준모 이사는 현지에서 원정대에 합류했다 변을 당했다.
사고 지역에는 아직도 헬기와 인력이 접근하기 어려워 실종자 수색과 시신 수습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부는 주네팔대사관과 현장대책반을 구성하고, 네팔 경찰 당국과 베이스캠프 운영기관 등을 접촉해 시신 수습 및 운구 등 향후 진행사항에 대해 협의하고 있다.
외교부 측은 "수색에 나선 헬기가 소형이라서 시신을 발견하긴 했지만,
수습까지는 어려웠다"며 "수습장비를 구비한 헬기를 이용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시신을 수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구르자히말은 히말라야 다울라기리 산무리의 봉우리 중 하나다. 높이는 7193m로, 산 남쪽에는 3000m 이상의 대암벽이 있다. 등반하기 쉽지 않은 산군으로 꼽힌다. 골짜기 깊숙한 곳에 소수민족 찬탈족(Chantyal)이 모여사는 마을이 있다.
산악인 김창호(49) 대장에게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동반자이자 친구였다. 산을 오르면서 서로 모르는 모습을 알아 가는 그런 존재였다. 김 대장은 그래서 늘 "미지의 산과 빙하를 발견하는 순간 정말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했다.
김 대장이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무(無)산소 완등에 도전한 것도 자신의 힘과 의지만으로 산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김 대장은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개척자이자 탐험가였다. 2016년 네팔 아샤푸르나(7140m)와 강가푸르나(7455m), 2017년 인도 다람수라(6446m)와 팝수라(6451m)에 아무도 밟지 않은 새로운 루트를 뚫었다. 세계산악연맹은 이 길을 '코리안 웨이(Korean Way)'로 공식 인정했다.
김 대장은 12일 밤 동료 대원들과 함
께 네팔 구르자히말(7193m) 남벽 등정 도중 베이스캠프에 불어닥친 강한 돌풍과 산사태에 휘말려 참변을 당했다.
그는 대원 모두가 등반을 마치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는 게 성공적인 등반이라는 'From Home To Home(집에서 집으로)'을 모토로 삼았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던 '영원한 개척자'는 결국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히말라야의 품에 잠들게 됐다.
산악인 김창호(49) 대장에게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동반자이자 친구였다. 산을 오르면서 서로 모르는 모습을 알아 가는 그런 존재였다. 김 대장은 그래서 늘 "미지의 산과 빙하를 발견하는 순간 정말 가슴이 벅차오른다"고 했다.
김 대장이 히말라야 8000m급 14좌 무(無)산소 완등에 도전한 것도 자신의 힘과 의지만으로 산과 하나가 되기 위해서였을지도 모른다. 김 대장은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는 개척자이자 탐험가였다. 2016년 네팔 아샤푸르나(7140m)와 강가푸르나(7455m), 2017년 인도 다람수라(6446m)와 팝수라(6451m)에 아무도 밟지 않은 새로운 루트를 뚫었다. 세계산악연맹은 이 길을 '코리안 웨이(Korean Way)'로 공식 인정했다.
김 대장은 12일 밤 동료 대원들과 함
께 네팔 구르자히말(7193m) 남벽 등정 도중 베이스캠프에 불어닥친 강한 돌풍과 산사태에 휘말려 참변을 당했다.
그는 대원 모두가 등반을 마치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오는 게 성공적인 등반이라는 'From Home To Home(집에서 집으로)'을 모토로 삼았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던 '영원한 개척자'는 결국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히말라야의 품에 잠들게 됐다.
다울라기리 구르자히말 남벽은 수직고가 3000m가 넘는다. 아직 단 한 번도 인간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난벽(難壁)이었다. 김창호 대장은 이곳에 한국인의 힘으로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다 유영직(51) 장비담당, 이재훈(24) 식량의료담당, 임일진(49) 다큐영화 촬영감독 등 원정대원 3명과 정준모(54) 한국산악회 이사와 함께 생(生)을 마감했다.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이 내 길"
김창호 대장이 앞서 14좌를 완등한 선배 산악인들과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면 산악계로부터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김 대장은 국내의 대표적인 '등로주의(登路主義)' 산악인이다. 이미 개척된 루트를 따라 가는 '등정(登頂)주의'와 달리 새로운 루트를 개척하는 것에 의미를 뒀다. 김 대장은 히말라야 14좌 무산소 완등에 도전하는 과정에서도 틈틈이 사람의 발이 한 번도 닿지 않은 미답봉 (未踏峯)에 눈을 돌렸다. 파키스탄 바투라2봉(7762m·2008년), 네팔 힘중(7140m·2012년) 등은 김 대장이 세계 최초로 정상을 밟은 산이다. 그가 세계 최초로 오른 산만 3곳이고 8개의 새 루트를 개척했다.
김 대장은 "14좌 완등 후 어떤 길을 갈까 고민하다 아무도 닦지 않은 길을 개척하겠다고 마음먹었다"고 했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명예로운 현실에 안주했을 나이였지만, 그는 "산에 가지 않으면 진정한 산악인이라고 할 수 없다"며 도전을 택했다. 이번 등정은 그의 '코리안 웨이' 세 번째 목표였다.
◇'제로 투 서밋'의 사나이
김 대장은 2012년 네팔 힘중을 등정해 '산악계의 오스카'로 불리는 황금피켈상 아시아 부문상을 받았다. 지난해엔 강가푸르나 남벽 새 루트 개척으로 황금피켈상 심사위원 특별상도 받았다.
하지만 그는 명예와 상업성에 눈을 돌리지 않는 순수한 산사나이였다. 2006년 가셔브룸 1봉(8068m)부터 2013년 에베레스트(8848m)까지 히말라야 8000m급 14곳을 무산소로 완등했다. 특히 에베레스트 등정때는 해발 0m인 벵골만 바닷가에서 카약을 타고 시작해 자전거로 1000여㎞를 달렸다. 그리고 베이스캠프까지 걸어서 이동한 다음 산소통 없이 정상에 올랐다. "신과 공정한 게임을 하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김 대장은 2014년 조선일보가 기획한 '원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평화 대장정' 원정대장으로 참여했다. 독일 베를린에서 시베리아 벌판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오는 1만5000㎞의 대장정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일어나 미리 답사를 다녀오는 등 대원들의 안전과 루트를 책임졌다. 이인정 대한산악연맹회장은 "돌풍이 베이스캠프를 덮치는 자연재해에 당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엄홍길 대장도 "평소 안주하지 않고 도전을 실천하는 후배여서 큰 충격을 받았다"며 슬퍼했다.
◇상금·후원금 받으면 후배 원정에 쾌척
1969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김 대장은 서울시립대 무역학과 입학 후 우연히 산악부에 입회하며 '산사나이'가 됐다. 김 대장은 뛰어난 친화력으로 선후배 산악인의 존경을 받았다. 2011년 10월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을 찾기 위해 에베레스트 도전을 늦추고 네팔행을 자원하기도 했다. 그는 받은 상금이나 후원금은 늘 후배들 원정기금으로 쾌척했다. 그는 서울시립대 산악부 4년 후배인 아내와 세 살짜리 딸(단아)을 두고 있다. 김 대장은
원정에 앞서 유라시아 원정을 함께 한 대원들과 만나 단아 사진을 보여주며 "내 가장 큰 행복이다. 돌아오면 가족 셋이 '캐나다 유콘강으로 카약 타러가자'고 약속했다"고 했다. 하지만 안타깝게 그 꿈을 이룰 수 없게 됐다. 김 대장을 비롯한 원정대 시신은 14일 구조작업을 통해 수습돼 네팔 수도 카트만두의 병원에 안치됐다. 17일 한국으로 운구될 예정이다.
The copyright belongs to the original writer of the content, and there may be errors in machine translation results.版权归内容原作者所有。机器翻译结果可能存在错误。原文の著作権は原著著作者にあり、機械翻訳の結果にエラーが含まれることがあります。Hak cipta milik penulis asli dari konten, dan mungkin ditemukan kesalahan dalam hasil terjemahan mesin.Bản quyền thuộc về tác giả gốc của nội dung và có thể có lỗi trong kết quả dịch bằng máy.
해발 0m에서 시작..산소통 없이 에베레스트 올라 가장 높이 도달하기보다 '가지 않은 길' 걸어 험한 'K2' 높이 8611 휴대전화 뒷 번호로 사용
[앵커]
김창호 대장은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택하며 늘 조금 더 힘들게 산을 올랐습니다. 그의 휴대전화 뒷 번호는 8611, 이 숫자는 히말라야의 K2 높이인데 가장 높지는 않아도 험하디 험한 봉우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좌우명도 '집에서 집으로'입니다. 등반이란, 집에서 떠났다가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와야 마무리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는 더 이상 그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됐습니다.
강나현 기자입니다.
[기자]
해발 8000m의 정상에서는 숨 쉬기조차도 어렵고, 연탄가스를 마신 듯 몽롱해 잘 기억하기도 힘듭니다.
그래도 힘겹게 한마디를 내뱉습니다.
[김창호 대장 /2013년 5월, 에베레스트 : 살았어]
인도 벵골만 해발 0m에서 시작해 40일 동안 노를 젓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쉼 없이 올라간 김창호 대장, 그 다음에는 산소통의 도움 없이 8848m의 지구 꼭대기, 에베레스트에 닿았습니다.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만 올라야 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믿었고, 가장 높이 도달하는 것보다 조금 더 어렵지만,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걸었습니다.
에베레스트보다 높지 않지만 '죽음을 부르는 산'으로 불릴만큼 험한 K2의 높이 8611을 휴대전화 뒷 번호로 쓰기도 했습니다.
전 세계 험한 산 이곳 저곳을 누볐지만 삶의 좌표는 '집에서 집으로'였습니다.
등반의 마지막 목표는 가족을 떠났다 다시 가족 곁에 안전하게 닿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정상에 서는 것 못지 않게 산에서 살아서 돌아오는게 중요하다고 얘기했지만 그 바람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화면제공 : 몽벨 민치앤필름 울주산악영화제)
無산소·無동력 신화 '김창호 대장' 히말라야에 지다
입력 2018.10.13 14:39 | 수정 2018.10.13 20:22
"‘저 모퉁이를 돌면 어떤 게 나올까,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하는 궁금증이 항상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어요. 그러던 가운데 등산을 접하게 됐고 산의 매력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산악인 김창호(49) 대장은 2013년 3월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을 앞두고 언론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신기록을 앞두고 있기는 하지만 처음부터 14좌 완등을 목표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다"며 "기록에 대한 욕심도 없다. 중요한 것은 등반 그 자체다"라고 말했다.
그는 무(無)산소, 무(無)동력 산악인이다. 산악계 용어로 ‘알파인 스타일(alpine style)’이라고 한다. 포터(짐꾼)나 지원조의 도움 없이 고정캠프나 고정 로프를 사용하지 않고, 산소 기구를 사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베이스캠프를 출발해 자력으로 정상까지 계속 밀어붙이는 등반 방식을 말한다.
김 대장은 2013년 한국인 최초로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무산소로 완등했다. 앞서 2012년에는 아시아 최고의 알피니스트들이 받는 '황금피켈상 아시아'를 수상하기도 했다.
김창호 대장은 1969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서울 시립대 무역학과에 입학한 후 우연히 산악부에 입회하며 산에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는 평소"산은 정복을 위한 대상이 아니다. 내가 가진 힘만으로 산에 오르고 싶다"고 자주 말했다고 한다.
1993년 그레이트 트랑고타워(6284m)를 완등하며 히말라야 도전을 시작했다. 김 대장은 이 등반 도중 80m를 추락해 갈비뼈가 부러지는 사고에도 끝내 완등했다. 본격적인 파키스탄으로의 행보는 2000년부터 2006년까지 1800일 동안이나 이어졌다. 그는 2012년까지 8000m급 13개봉에 16차례나 올랐고, 7000m급 2개봉을 세계 최초로 등반했다. 5000~6000m급 5개봉 역시 초등을 일궈냈다.
그는 지난달 28일 유영직(49·장비담당)씨와 이재훈(25·식량의료담당) 등 산악인 4명과 촬영감독인 임일진(49)씨와 함께 또 히말라야 등반길에 올랐다. 건강 문제로 대원 1명을 산기슭에 남겨둔 채 5명 네팔 구르자히말산 해발 3500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차렸다. 그러나 지난 12일 나무가 뽑힐만큼 강한 돌풍이
몰아치면서 눈사태가 일어나 변을 당했다. 이들은 13일 새벽 베이스캠프 근처에서 주검으로 발견됐다.
김 대장의 모토는 'from home to home(집에서 집으로)'였다. 가장 성공한 원정은 대원 모두가 집 문을 열고 나가서, 무사히 산행을 마친 뒤 문을 닫고 집에 들어오는 것이라는 뜻이다.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 그의 소식에 대한민국은 슬픔에 빠졌다.
The copyright belongs to the original writer of the content, and there may be errors in machine translation results.版权归内容原作者所有。机器翻译结果可能存在错误。原文の著作権は原著著作者にあり、機械翻訳の結果にエラーが含まれることがあります。Hak cipta milik penulis asli dari konten, dan mungkin ditemukan kesalahan dalam hasil terjemahan mesin.Bản quyền thuộc về tác giả gốc của nội dung và có thể có lỗi trong kết quả dịch bằng máy.
[경향신문]
히말라야 구르자히말을 전에 없던 방식으로 오르고자 했던 김창호 대장과 그 과정을 기록하고자 나섰던 임일진 감독, 그리고 유영직, 정준모, 이재훈 산악인 영결식이 19일 엄수됐습니다. 울림과 아쉬움을 남기고 떠난 이들의 명복을 빕니다.
수많은 산악인들이 히말라야에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셰르파들이 등반을 돕다 생을 마감했습니다. 지난 12일 세상을 떠난 김창호 대장과 5명의 한국인 곁에도 네 명의 네팔인 셰르파가 있었습니다.
8000m를 넘는 14좌 가운데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를 오르다가 숨진 사람 셋 중 하나는 이들 셰르파입니다.
■ 셰르파는 누구인가
‘셰르파’는 티베트어로 ‘동쪽(셰르)에서 온 사람(파)’이라는 뜻입니다. 16세기 티베트에서 네팔로 이주한 히말라야 고산 민족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들의 후손 중에는 성이 아예 셰르파인 사람도 많습니다. 지금 셰르파는 ‘일로서 등반을 돕는 사람’이라는 말로 널리 쓰입니다.
이들은 대개 히말라야 산자락에서 농사일을 하면서 등산 안내인으로 활동합니다. 초창기에 외국 원정대의 짐을 운반하는 단순한 일만 했지만 최근에는 등반 기술을 익혀 사실상 대원 역할까지 수행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직업으로서 셰르파의 기원은 1900년대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920년대에 서구 강대국들이 히말라야 탐사를 국가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영국에서 첫 에베레스트 원정대가 나섰는데, 정찰과 시험 등반에 짐꾼과 막일꾼이 필요했습니다. ‘셰르파족’이 높은 고도에 잘 적응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각국 원정대가 이들을 정식으로 고용했습니다.
처음에 단순히 짐을 운반하는 일만 하던 셰르파는 최근에는 등반 기술을 익힌 대원 역할까지 수행합니다. 이외에 짐꾼(포터)과 조리사(쿡) 등 지원인력으로 나서는 사람도 많습니다.
■ 유명한 셰르파들
전문가로서 셰르파의 존재를 널리 알린 사람은 단연 텐징 노르가이입니다. 노르가이는 1953년 에베레스트 최정상에 세계 최초로 오른 뉴질랜드 등반가 에드먼드 힐러리와 바로 그 현장에 같이 있던 사람입니다. 노르가이가 먼저 정상에 올랐지만 힐러리를 위해 최후 한 발을 남겨두고 양보했다는 설도 전해집니다. 힐러리는 노르가이의 공을 인정해 1960년 히말라야트러스트라는 단체를 설립해 네팔에 학교를 세우고 셰르파를 위한 복지제도를 마련했습니다.
노르가이는 1914년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어린시절 아버지가 진 빚을 갚기 위해 야크와 소떼를 몰았습니다. 키우던 야크들이 병으로 죽어 생계가 어려워지자 네팔로 옮겨와 하인 생활을 합니다. 이곳에서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원정대를 접한 그는 1935년 21살 나이에 에릭 십턴이 이끄는 영국 원정대에 처음으로 참여했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등반해 이름을 알리고 영국 9차 원정대에 셰르파 우두머리이자 대원으로 참여합니다.
힐러리와 등반에 성공한 이후 그는 다시는 에베레스트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그저 가난을 벗기 위한 호구지책으로 여겨진 일이었지만, 텐징이 정상에 서자 셰르파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합니다.
2011년에는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셰르파도 나왔습니다. 그 주인공인 아파 셰르파도 역시 12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포터로 일을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에베레스트를 가장 많이 오른 셰르파는 키미 리타 셰르파(48)입니다. 그는 스물 네 살이던 1994년 처음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고, K2, 초오유, 안나푸르나 등 해발고도 8000m가 넘는 산을 연이어 올랐습니다. 그는 아직도 등반을 중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이 깨질 가능성도 있습니다. 리타에 앞서 두 명의 셰르파가 21번씩 에베레스트에 오르는 기록을 세웠는데 지금은 모두 은퇴했습니다.
여성도 셰르파 일을 합니다. 올해는 히말라야 14좌를 한 시즌 25일 내에 모두 오르는 기록을 세운 여성 셰르파도 나왔습니다. 니마 장무 셰르파(28)가 그 주인공입니다. 네팔 관광청에 따르면 그는 네팔 여성 가운데서는 최초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세 개 봉우리를 오른 사람이기도 합니다.
셰르파와 함께 산에 오르는 것은 올해부터 의무사항입니다. 네팔 정부는 지난해 12월 외국인 등반객의 단독 등반을 금지하는 조항을 안전규정에 포함시켰습니다. 안전을 도모하는 동시에 자국민 일자리도 늘리고자 한 것입니다.
■ 셰르파의 죽음과 ‘47만원’
2014년 4월 에베레스트 눈사태로 네팔인 셰르파 16명이 한꺼번에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당시 셰르파들은 숨지거나 실종된 동료를 기려 등반을 거부했습니다.
이면에는 셰르파 처우 문제가 있었습니다. 정부 측이 사망자 유족 당 단 415달러(현재 환율로 약 47만원)를 보상하겠다고 하자 셰르파들은 크게 반발했습니다. 이때 임금과 보험료를 올리고 셰르파의 인권을 개선하자는 여론이 국제적으로 일었습니다.
2015년에는 네팔에서 규모 7.8의 대지진이 났습니다. 지진으로 8000여명이 사망했고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서만 산악인 19명이 숨졌습니다. 4월18일 대지진 이후로 중단됐던 등반을 셰르파들이 다시 시작합니다. 네팔 산악연맹 소속 셰르파 9명이 그해 5월11일 에베레스트 산 정상 등반에 성공했습니다.
에베레스트 등반객을 안내하려면 짐을 대신 지고 베이스캠프까지 스무 번을 넘게 왕복해야 합니다. 고되고 위험이 큰 일입니다. ‘엘리트 셰르파’가 한 시즌 약 두달 간 등반객을 안내하고 버는 돈은 5000달러 가량인데, 네팔 1인당 국민소득 750달러의 몇 배나 됩니다. 이들이 생계를 위해 산을 오르는 배경입니다.
1990년대부터 일반인도 돈을 내면 셰르파와 전문 산악인 도움을 받아 정상에 오를 수 있는 ‘상업 등반’이 활성화됐습니다. 초기에는 에베레스트 입산에 제한을 두던 네팔 정부도 막대한 관광수입 때문에 입산 제한을 계속 풀어왔습니다. 2006년에 네팔 내전이 끝나면서 히말라야 등반이 급증하자 셰르파 수입도 늘어났습니다. 자녀를 미국 등지로 유학 보내고 법률가, 사업가, 의사 등으로 전업하는 사례도 일부 나왔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위험하다는 것은 여전히 부인할 수 없습니다. 아웃도어 전문매체 <아웃사이드>는 2014년, 셰르파라는 직업이 이라크 전쟁에 미군으로 참전하는 것 보다 훨씬 위험하다는 결론을 냅니다. 미국 노동통계국 통계에서 사용하는 직업 사망률(풀타임 십만명 당 사망자 수)에 셰르파 사망률을 빗대본 것이었습니다. 셰르파가 매 시즌 하는 노동을 ‘풀타임’ 직업으로 간주하기는 쉽지 않지만 산악 전문가와 셰르파들과 상의해 파악한 수치를 사용했다고 <아웃사이드>는 밝히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 사망률을 비교하니 다음과 같았습니다.
『미국 광부(2000~2010년) : 25명
미국 어부(2000~2010년) : 124명
알래스카 지역 비행기 조종사 ‘부시 파일럿’(1990~2009년) : 287명
이라크전 참전 미군(2003~2007년) : 335명
에베레스트 셰르파(2004~2014년) : 4053명
19일 현재 위키피디아의 8000m급 14좌 사망자 명단에는 총 981명이 올라 있습니다. 이 가운데 네팔 국적자는 207명, 전체의 21%입니다. 에베레스트만 따로 떼어 보면 사망자 297명 중 114명이 네팔 사람이었습니다. 세 명 가운데 한 명 꼴입니다.
■ 죽음을 끼고 걷는 길
엄홍길 대장은 2011년 10월 경향신문 기고에서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으로 ‘셰르파 도르지의 죽음’을 꼽았습니다.
그 내용을 발췌해 전합니다.
정상을 오르는 길이 옆구리에 죽음을 끼고 걷는 길이라는 걸 그 전까지는 미처 몰랐다. 그러다 첫 사고가 발생했다. 바위처럼 단단했던 의지가 진흙처럼 물러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캠프3에서 캠프4로 가는 길이었다. 앞이 보이지 않을 만큼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해발 7500쯤에서 설벽을 타던 셰르파 술딤 도르지가 추락했다. 공처럼 몸이 통통 튀더니 산 아래로 굴렀다. 1000m가량을 그렇게 굴렀다. 서둘러 도르지를 찾으러 달려갔다. 찢어진 배낭, 피묻은 옷자락만 바위에 끼어 있었다. 처참한 죽음이었다. 아무리 찾아도 그의 시신은 없었다. 처음으로 목격한 죽음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내려오는 길에 팡보체라는 셰르파 마을에서 그의 어머니와 부인 히파디기를 만났다. 가족들은 나를 원망했다. 셰르파 도르지의 나이는 당시 열여덟. 결혼한 지 넉 달밖에 안된 신혼이었다. 울먹이면서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내가 먼저 앞서가야 했어. 혼자 보내는 게 아니었어…’ 고통으로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한 사람을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고 나니 히말라야에 다시 오르고 싶지 않았다. 두렵고 무서웠다.』 그러나 “자석처럼 마음을 이끄는 힘”이 히말라야에는 있어 그는 등반을 계속합니다. 1985년부터 22년 동안 38번을 도전해 아시는 바와 같이 2008년까지 14좌를 완등했고 이에 속하지 않지만 8000m를 넘는 2개 봉우리를 더 올라 2008년 ‘16좌 완등’ 기록을 세웠습니다. “그 대신 히말라야에서 나는 산악인 6명, 셰르파 4명 등 모두 10명의 소중한 친구들을 잃었다.” 엄 대장은 “나는 지금 그들을 위해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다시 한 번 12일 히말라야에서 숨진 아홉 분의 명복을 빕니다. 최미랑 기자 rang@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