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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세 일기

빠꼼임 2020. 1. 19. 15:46

김형석의 100세 일기


[아무튼, 주말] 참된 권위는 사랑을 실천할 때 생긴다던 H형… 당신이 그립습니다

조선일보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일러스트=이철원
일러스트=이철원
90을 넘기면서 가장 힘든 것은 늙는다는 생각이 아니다. 찾아드는 고독감이다. '나 혼자 남겨두고 다 떠나가는구나'하는 공허감이다. 자녀도 다 제 길을 찾아가야 한다. 친구들도 소식 없이 떠나버린다.

얼마 전에는 옛날 동창들 가운데 누가 남아 있나 생각해 보았다. 국내에는 한 사람도 없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살던 C목사의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브라질로 이민 간 H형이 최근 세상을 떠난 것 같다는 소식뿐이다.

H형은 해방 직후 내가 고향에서 중학교 책임자로 있을 때 함께 수고해준 친구 중 한 사람이다. 후에 서울로 와 교수로 있다가 정부의 차관직을 맡고 있었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고 잔꾀 부리는 것을 싫어한 친구였다.

그 친구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연애에 빠져 공부를 하지 못했다. 일류 대학 입시에 낙방을 했다. 이류 대학으로 가느냐, 재수하느냐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결국 H형이 택한 길은 우리와 좀 달랐다. '다른 친구들은 대학에서 4년 공부로 끝내겠지만 나는 이류 대학이라도 좋으니까 10년은 열심히 공부하자. 10년 후에 누가 성공하는지 경쟁해보자'는 결심이었다.

그가 차관으로 있을 때다. "지금은 일류 대학을 나온 이들이 내 밑에서 일하고 있다"면서 웃었다. 나도 H형의 선택이 옳았다고 인정했다. 열성이 있는 친구였다.

한번은 몇이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이야기를 나누다가 종교 얘기가 나왔다. 신학을 전공한 친구도 있었고 모두가 교회에 다니는 편이었다. 이야기가 계속되다가 '종교적 신앙에는 참된 권위가 있어야 하는데 무엇이 신앙적 권위인가'라는 화두가 떠올랐다. 후에 신학대학의 교수가 된 선배의 얘기를 듣다가 H형이 느닷없이 꺼낸 질문이다.

나는 부모 성격을 닮아서 그런지 누구에게 복종하거나 권위 같은 것은 인정하지 않고 살았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 앞에서는 꼼짝 못했다. 어머니는 내 주장이 마땅치 않으면 "이놈아, 내가 너를 낳아 키웠다. 지금도 너를 내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면서 산다. 내 앞에서 할 말이 그거냐?"라고 책망했다. 그러면 나는 할 말이 없어졌다. 나는 그것이 어머니의 권위라고 생각한다. 나에 대한 사랑이다. 어머니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니까.

목사들은 설교도 잘하고 신학자는 좋은 학설을 펴내기도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권위를 터득하기에는 거리가 멀다. 현대인들은 예수의 의심 깊은 제자(도마)와 같이 십자가에 못 박힌 상흔을
보여주기 원한다.

참된 신앙적 권위는 사랑을 실천할 때 생긴다. H형의 지난 얘기를 회상하면서 작고하기 2년 전쯤 암 치료를 받고 있었을 때 만난 이태석 신부 생각이 났다. 그는 아프리카 톤즈라는 마을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어주다가 세상을 떠난 성직자였다. 우리는 크리스천으로 자처하면서 남에게 그런 희생적 사랑을 보여주거나 나누어주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1/25/20190125020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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