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100세 일기]
지난 월요일 저녁이었다. 좀 일찍 강연 장소에 도착했다. 몇 사람이 와서 내 책에 사인을 부탁했다. 5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이가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펴 보이면서 "일기문의 주인공이 혹시 교수님 자신이 아니시냐"고 물었다. 자주 듣는 독자들의 질문이다. 강연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내 책 얘기 하나를 소개했다.
오래전이다. 강원도지사 K의 청탁을 받고 춘천에 있는 도청 강당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사회자가 "지사님께서 직접 강사님을 소개하기로 되었는데 갑자기 청와대로 갈 일이 생겼습니다. 가급적 속히 돌아오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하면서 대신 나를 소개해 주었다. 70분에 걸친 강연을 마쳤다. 늦은 시간이기는 했으나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총무과장이 꼭 지사님을 만나 저녁을 같이 하시라고 권했다.
어느 호텔 식당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K 지사가 나타났다. 군 장성 출신으로 강원도지사 임명을 받은 이였다. 식사가 끝날 즈음이었다. 지사가 꼭 나를 보고 싶어 한 이유를 들려줬다. 다음은 K 지사 얘기다.
10여 일 전에 책이 들어 있는 소포를 받았다. 발신인의 주소나 이름은 없었다. 그런데 글씨는 어디서 보아 온 것 같아 뜯어보았더니 책 표지 안에 편지가 들어 있었다. '약속을 어기고 글월을 올려 죄송합니다. 이 책 ○페이지부터 시작되는 일기문을 읽어 보세요. 어쩌면 오래전 우리들의 사연 같아 여러 번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눈물자국이 남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슬퍼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잊어야겠기에 이 책을 보내드립니다. 바쁘시더라도 꼭 읽어보세요' 하는 사연이었다.
K 지사는 그날 저녁 늦게까지 책을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고 고백했다. "교수님도 그런 과거가 있으셨어요? 저는 읽을 때마다 울곤 했습니다. 제 첫사랑을 잊을 수가 없었거든요. 정말 사랑했어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 것 같기도 하고요."
내가 "그 책을 가지고 계세요?" 물었더니 "집으로 가져갈 수는 없지요. 책상 서랍에 넣어 두고 열쇠로 잠가 두었습니다. 어제 저녁에도 읽어 보았고요. 교수님과 저녁을 같이하면서 그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래 그 첫사랑 애인에게 연락을 하셨고요?"라고 물었다. K 지사는 "아닙니다. 우리는 헤어질 때 연락을 끊고 서로의 행복을 빌기로 약속했습니다. 아마 행복하게 살 겁니다
그 책이 출간된 지 60년이 된다. 당시에 많은 독자가 공감해 주었다. 주로 대학생이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젊음과 더불어 자라고 있었다. 착하고 아름다운 영혼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시기였을까. 그 글을 쓸 때의 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