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100세일기] 안병욱 탄생 100주년… 나는 왜 그를 자주 인용하나
조선일보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20.08.22 03:00
[아무튼, 주말]
일러스트= 김영석
지난 11일 서울 숭실대에서 고(故) 안병욱 교수 탄생 100주년 기념식이 있었다.
숭실대학은 평양에서 내가 다닌 숭실중학교와 한 캠퍼스 안에 있었다. 14세에 나를 기독교 신앙으로 이끌어 준 산실이다. 서울 캠퍼스에는 내가 출강을 했고 개교 70주년 기념 신앙부흥회에 강사로 초청받아 설교도 했다. 숭실은 내 모교이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성장과 봉사의 고장이다.
안병욱 선생의 생애와 관련이 깊은 흥사단은 나의 공적 생활과 깊은 인연을 만들어 주었다. 도산 안창호는 나에게 애국·애족을 키워준 은인이다. 월간 '사상계'와 더불어 흥사단이 주관한 금요강좌와 강연회는 한때 우리 정신계의 두 기둥 같은 역할을 했다. 나는 일찍부터 강연회 연사로 지성적 활동의 길을 개척했고 금요강좌에는 자주 출강했다. 안 선생과의 간접적인 인연들이다.
1961년 늦은 여름이었다. 안 선생과 같이 미국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비행기 일등석을 배정받고 안 선생은 일반석에 앉게 되었다. 그다음부터 내가 "일등석 귀빈과 일반석 손님은 다르지…"라고 놀리면, 안 선생은 "혼자서는 못 가겠으니까 데리고 가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누군데?"라고 응수했다. 사실은 내가 같이 가주면 좋겠다고 청했다. 미국 생활을 끝낸 후에 둘이 다시 만나 유럽과 중동 지역 등을 도는 세계 일주 여행을 가기로 했다. 그 여행으로 절친한 우정을 갖게 되었다.
귀국 후에 우리는 좀 더 차원 높은 교수 생활과 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나와 연세대에 같이 있다가 서울대로 적을 옮긴 김태길 교수도 합류했다. 우리 셋은 철학에서도 비슷한 영역이 전공이었고, 함께 교단철학을 넘어 인문학과 사회적 가치관 창출을 위해 한 주류를 육성했다고 자부한다. '철학계 3총사'로 불리기도 했고 업적도 적지 않았다. 20세기 후반기에는 많은 저서와 활동을 통해 철학문화를 주도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 셋은 동갑내기로 서로를 격려하면서 정신문화와 사회에 이바지하려는 열정을 갖고 지냈다. 지금도 나는 많은 사람으로부터 두 친구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달받는다. 그러나 세월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 90을 맞이하면서 김태길 선생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안 선생도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50년 우정과 일에도 한계가 찾아들었다.
김태길 교수는 고향 선산에 잠들었다. 하지만 나와 안 교수는 실향민이어서 갈 곳이 없었다. 그때 강원도 양구의 뜻있는 분들이 우리를 위한 안식처를 제안해왔다. 안 선생과 나는 함께하기로 했다. 안 선생이 먼저 부인과 같이 가셨다. 그 옆에 내 자리가 마련돼 있다.
안병욱 교수 탄생 100주년 기념식에서 그가 남겨 준 유언을 다시 되새겼다. "김태길 선생과 나는 먼저 가겠지만 김형석 선생은 우리보다 정신력이 강하니까, 우리가 남겨 둔 일들을 마무리해주시기 바랍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21/202008210315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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