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석의 100세 일기] 내 누울 자리를 정하고 나서
[아무튼, 주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일러스트= 김영석
지난 11월 14일, 1년 만에 강원도 양구에 갔다. 코로나19 사태로 모든 행사는 취소되었다. 확진자가 없는 양구에 서울 사람이 간다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3월에 안병욱 선생의 묘소를 옮긴 뒤 나와 함께할 새로운 묘역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안 선생 묘는 공원 서북쪽 산 밑으로 옮겨졌다. 내외분의 안식처에 검은색 묘비가 잔디 위에 나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 왼쪽에 같은 색깔과 크기의 묘비가 장만되어 있다. 내가 갈 곳을 미리 준비해 준 것이다. 두 묘비 중간 조금 앞자리에는 ‘여기 나라와 겨레를 위해 정성을 바쳐 온 두 친구 잠들다’라는 작은 돌비가 누워 있다. 내 자리는 잔디가 깔린 채로 비어 있을 줄 알았는데 비문 없는 가묘가 만들어졌다. 여기가 내 안식처가 되었다는 감회가 피어올랐다.
1947년, 30년 가까이 살아온 고향을 떠날 때부터 나는 실향민이다. 만경대 서남쪽으로 접경인 송산리 예배당에서 어려서는 벗들과 뛰어놀았고 커서는 어린이들도 가르쳤는데, 지금은 찾을 방법이 없다. 청소년 놀이터 공원으로 바뀌면서 고향 사람들과는 상관이 없는 이방인들의 생활 터가 되었다. 나는 다시 고향에 다녀오지 못했다. 꿈에만 몇 차례 찾아보았을 뿐이다.
70년 넘게 서울 신촌 지역에 4대가 살면서 나보다는 가족들의 고향을 장만해 준 셈이다. 모친이 고령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는 경기도 파주의 야산 약간 높은 자리에 무덤을 정했다. 장례를 치르고 며칠 후였다. 어머니께서 꿈에 나타나 ‘내가 있는 곳이 참 좋다’고 말씀하셨다. 멀리 개성 송악산이 보이고 아버지가 잠들어 계시는 북녘이 그리우셨던 것이다.
7년 후에는 아내도 먼저 갔다. 모친 산소에서 내 자리를 건너 안식처를 정했다. 후에 가족 묘지를 정리하면서 동생과 아들이 내 무덤도 그 중간에 장만했다. 공사를 미리 끝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무덤 셋이 생기고 내 자리는 빈 무덤으로 남겨 두었다. 함께 갔던 딸들이 살아 있는 아버지의 무덤을 보면서 마음이 언짢았던 것 같다. 내가 “무덤을 미리 만들어 두면 더 오래 산단다”라고 위로해 주었다. 그런가, 하고 안심하는 표정들이었다.
파주에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내 빈 무덤이 있는데, 양구에 또 하나의 빈 무덤이 생긴 것이다. 언젠가는 어머니도 아내와 함께 마지막 고향인 양구로 오게 되어 있다.
8년쯤 전이다. 양구에 뜻을 같이한 분들의 호의였다. 90이 넘었으나 갈 곳이 없는 우리 둘에게 제2의 고향을 장만해 주기로 했고 감사히 그 뜻을 받아들였다. 기념관 ‘철학의 집’을 신축해 주었고 우리 안식처를 준비해 준 것이다. 안 선생은 병중이어서 처음 길이 마지막 고향길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양구를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고향이 되도록 여러분과 힘을 모으고 있다. 한반도의 정중앙인 양구가 겨레의 정신적 기초가 되는 인문학의 중심지가 되었으면 좋겠다. 고향으로 가는 길이 내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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