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부가’ 부르며 스러진 서른한 살 안중근에겐 左도 右도 없었다
[아무튼, 주말]
[김윤덕 기자의 사람人]
청년 안중근의 마지막 1년 그린
영화 ‘영웅’으로 돌아온 윤제균
‘내게 남겨진 마지막 시간/ 내가 걷던 이 길 끝까지 가면/ 이룰 수 있나 장부의 뜻/ 내 살갗을 파내듯 에이는 이 고통/ 내 어머니 가슴을 헤집는 이 시간/ 나는 무엇을 생각하나/ 하늘이시여 지켜주소서, 우리 꿈 이루도록/ 장부의 뜻 이루도록.’
10년 전 겨울, 윤제균(53)은 객석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뮤지컬 ‘영웅’.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가” 묻는 사형집행관에게 안중근이 ‘장부가’로 답한 뒤 교수형에 처해지는 극의 마지막 장면에서다. 서른한 살, 그 뜨거운 청춘이 가여워서 울었다.
아들을 가슴에 묻을 어머니와 식민지 조국에 남겨질 자식들을 뒤로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사내가 참담했다. “나라면 할 수 있을까. 내 모든 걸 버리고 조국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을까.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그 청년의 유해는 100년이 지나도록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윤제균이 안중근을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이유다.
안중근 의사의 마지막 1년을 다룬 영화 ‘영웅’이 개봉 8일 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했다. 뮤지컬 영화라는 장르의 제약으로 개봉 초반 고전이 예상됐지만, LG아트센터 마곡에서 개막한 동명의 원작 뮤지컬(내년 2월28일까지)과 시너지를 일으키며 전 세대 관객을 끌어모으는 중이다.
지난 21일 서울 용산 CGV에서 윤제균 감독을 만났다. ‘해운대’ ‘국제시장’으로 ‘쌍천만 감독’이란 별명을 얻은 그는, “흥행보다는 안중근이란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영화로 만드는 것이 나의 소망이었다”고 했다.
#. ‘천주여, 부디 꼭 잡아주소서/ 나 만약 성공한다면/ 그를 위해 평화 위해/ 기도할 짧은 순간을 허락하소서/ 남겨질 불쌍한 나의 가족/ 가슴에 나를 묻을 어머니/ 그들 기억 속에서 부디 제가 잊혀지게 하소서.’ -영화 ‘영웅’ OST
-‘국제시장’ 이후 8년 만의 복귀작이다. 어떤 영화보다 힘든 작업이었다고 했던데.
“누적 관객 100만을 목전에 둔 뮤지컬 원작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 쉽지 않았다. 더구나 안중근 의사가 소재라, 제대로 만들지 못하면 난 더 이상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지 못할 거란 생각에 잠이 오지 않더라.”
-개봉 날 함박눈이 내렸다. 관객 반응은 어떤가.
“영화 만들 때 목표 중 하나가 뮤지컬 본 분들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원작을 본 분들은 평가 기준이 엄격할 수밖에 없는데 그들이 영화를 보고 칭찬을 많이 해주셔서 안도했다. 특히 뮤지컬 ‘영웅’을 제작한 윤호진 대표가 시사회를 보고 전화하셔서 ‘너무 많이 울었다. 잘 만들어줘서 고맙다’고 해서 울컥했다.”
-경쟁작이 ‘아바타2’라 신경이 쓰였겠다.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러나 둘은 아주 다른 영화다. ‘아바타’가 시각적 즐거움을 주는 영화라면 ‘영웅’은 가슴을 뜨겁게 하는 영화다. 두 영화 모두 잘되지 않을까 생각한다(웃음).”
-왜 안중근이었나?
“2012년 영화 ‘댄싱퀸’을 제작할 때 배우 정성화를 만났다. 자기가 주연하는 뮤지컬이 있는데 보러 오라고 하더라. 안중근 소재의 뮤지컬이라는 것만 알고 갔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내내 오열하면서 봤다. 특히 두 장면에서 울었다. 사형수 아들에게 수의를 지어 보낸 뒤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를 부르는 어머니, 그에 대한 답가로 사형대에 올라선 아들이 ‘장부가’를 부르며 죽어가는 대목. 공연이 끝난 뒤 자리에서 일어설 수가 없더라. 안중근이 멋지다, 위대하다가 아니라 그냥 불쌍했다. 그리고 죄송했다. 이름 없이 스러져간 수많은 독립투사들에게. 그분들 희생이 발판이 되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데, 우리는 그들의 유해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른다.”
-한국 문단의 두 거장도 안중근을 소설로 썼다. 2010년 이문열은 ‘불멸’로, 2022년 김훈은 ‘하얼빈’으로. 윤제균의 안중근은 어느 쪽에 가까운가.
“‘불멸’은 아직 못 읽고 ‘하얼빈’만 읽었다. 소설에서 제일 많이 나오는 단어가 ‘청년’이었다. 청년 안중근. 나도 청년의 시간을 지냈지만, 서른한 살에 그는 의병군 참모중장이었고 ‘동양평화론’이라는 사상을 남겼다. 동시에 그는 흔들리는 청춘이었다. 소설 ‘하얼빈’에 이런 문장이 있다.
‘총을 쥔 자가 살아있는 인간이므로 총구는 늘 흔들렸다.’ 안중근이 이토를 저격하는 순간 총구가 흔들린 건 단순히 거총을 할 수 없는 권총이라서가 아니라, 이걸 쏘는 순간 (우리 영화의 대사처럼)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내 꿈도 끝이고, 어머니에겐 최고의 불효자가 되고, 아내와 자식들에겐 몹쓸 짓을 하는 아비가 되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고뇌들이 찰나의 순간에 일어나지 않았을까. 지금 모두가 힘들지만 나라조차 없던 시대를 살아야 했던 한 청년의 이야기를 우리 젊은이들이 꼭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중근에 대해 우리가 잘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나.
“고2, 고3 아들에게 안중근이 누구냐고 물었다.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사람, 손가락 하나를 자른 독립운동가로만 알고 있더라. 주위 사람들에게도 안중근의 직업이 뭐였는지 아느냐고 묻자 절반 이상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이었다. 김좌진, 홍범도 급은 아니지만 국내 진공작전을 진두지휘해 승리를 거둔 주역이다. 황해도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유복하게 살아도 되었을 그가 독립운동 자금 댄다고 쌀집 하다 망하고, 백성을 계몽시켜야 한다며 학교를 하다 망한다. 그러다 아예 군인으로 투신한 그의 운명을 ‘회령전투’가 송두리째 바꿔놓는다.”
-영화에 나오는 그 전투 장면인가?
“그렇다. 부하들이 일본군 포로를 처형하려고 하자 안중근이 제네바협정에 나오는 만국공법, 즉 전쟁포로를 죽여서는 안 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풀어준다. 그러나 풀려난 이들의 밀고로 일본군대가 의병군 주둔지를 기습해 전멸시킨다. 자신의 실수로 수많은 부하들을 잃자 태극기 앞에서 단지(斷指) 동맹을 하는 안중근은 이토를 처단해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겠다는 목표를 세우게 된다.”
-청산리, 봉오동전투는 알아도 회령전투는 모르는 이 많을 것 같다.
“학교에서 우리 역사를 비중 있게 가르치지 않는다. 대학 갈 때 역사 성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 씁쓸했다. 수학 미적분, 이차방정식은 잘 풀면서 우리 역사는 왜 모를까.”
-이문열은 안중근의 삶을 “선택한 가치를 위해 자기 삶을 봉헌한, 긴 예배 같은 삶”이었다고 썼더라.
“정확하다. 조국의 입장에선 영웅이지만 한 가족의 입장에서 그는 재앙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순교자의 길을 택한다. 나라 위해 모든 걸 버린다.”
-일본의 왜곡으로 ‘안중근은 테러리스트’로 인식된 적도 있다.
“많은 이들이 안중근이 이토를 처단한 뒤 자결해야 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권총에 총알이 한 발 남아 있기도 했다. 그러나 안중근은 자결할 생각이 1퍼센트도 없었다. 이토를 처단한 건 그 이유를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였다. 최고 권력가인 그를 처단하면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될 것이고, 자신이 재판을 받게 되면 언론이 그의 입에 주목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 앞에서 일본을 꾸짖고, 동양평화론을 강변하려 했다. 욱하는 충동이 아닌, 철저한 계산으로 이토를 처단한 것이다.”
-극중 법정에 선 안중근이 ‘우선 이토를 살해한 것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죄드리오’라고 말하는 대목이 인상 깊었다. 친일 프레임이 여전히 작동하는 한국 사회에서 이 대사를 넣는 것이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흥행을 목표로 했다면 망설였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인간 안중근’을 그리고 싶었다. 부부싸움도 하고, 동료들과 티격태격 농담도 하는 남자. ‘사죄’하는 대목은 천주교도로서 안중근을 보여주기 때문에 중요했다. 일본 간수에게도 안중근은 ‘나는 일본인을 미워하지 않는다. 다만 제국주의의 야욕을 드러내는 일부 사람들이 미울 뿐이다’라고 말한다. 그것이 이토의 대동아공영론에 맞서 각 나라의 자주적 독립과 평화를 부르짖은 ‘동양평화론’의 핵심이었다.”
#. ‘내 아들, 나의 사랑하는 도마야/ 떠나갈 시간이 왔구나/ 멈추지 말고 뒤돌아보지 말고/ 큰 뜻을 이루렴/ 한 번만, 단 한 번만이라도 너를 안아봤으면/ 너를 지금 이 두 팔로 안고 싶구나.’ -영화 ‘영웅’ OST
영화 ‘영웅’에는 뮤지컬을 통해 명곡으로 사랑받은 노래 14곡이 등장한다. 그중에서도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나문희)가 사형 선고를 받은 아들의 배냇저고리를 끌어안고 부르는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는 영화의 최고 명장면으로 꼽힌다. 울지 않는 관객이 없다. 윤제균은 “’국제시장’이 한국전쟁 이후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들의 이야기였다면 ‘영웅’은 어머니들의 이야기”라고 했다.
“감독은 냉철해야 하는데, 그 장면에선 안 되더라. 조마리아는 항소하려는 아들에게 ‘목숨을 구걸하지 말고 그냥 죽으라’고 말하는 강인한 어머니였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아들을 ‘한 번만이라도 안아봤으면’ 하고 가슴을 치는 연약한 여인이기도 했다.”
-나문희가 읊조리듯 흔들리며 부르는 노래여서 더 감동적이었다는 평이 많다.
“촬영 전 리딩(reading) 연습을 할 때 나문희 선생의 노래를 듣고 현장에 있던 모든 배우들이 울었다. 정성화 배우가 그러더라. 노래를 잘한다는 게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기교도 중요하고 파워도 중요하지만, 결국 감정을 진솔하게 전달하는 게 제일 잘하는 노래더라고.”
-정성화는 초연 후 14년간 뮤지컬에서 안중근 역을 도맡아 했다. 그러나 영화로 캐스팅할 때 반대한 제작진도 많았다더라. 수퍼스타가 출연해도 망하는 영화가 즐비한데 왜 정성화여야 했나?
“우리나라에서 안중근 역을 정성화보다 잘할 사람 있을까. 흥행을 목표로 했다면 네임밸류, 티켓파워도 고려했겠지만 세계에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콘텐츠가 되려면 첫째도 실력, 둘째도 실력, 셋째도 실력이었다. 그 수많은 의심들을 정성화가 실력으로 증명해줬다.”
-명성황후 시해를 목격한 조선의 마지막 궁녀로, 적진 한복판에 들어가 정보를 빼내는 설희 역의 김고은도 화제다. 그가 영화에서 실제로 노래를 부른 건지 궁금해하는 관객도 많다.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에게 노래 잘하고 연기도 잘하는 여배우를 추천해달라 했더니 딱 두 사람 나오더라. 김고은과 박진주.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잘 부른다고 했다. 김고은은 실제로 소찬휘만큼 잘 불러서 모두 놀랐다. 만두가게 여동생 역의 박진주는 캐스팅 당시만 해도 모르는 대중이 많았는데, 코로나로 개봉이 3년 미뤄지는 사이 스타가 돼 있더라(웃음).”
-뮤지컬 영화의 장벽을 우려했지만, 오히려 노래하는 대목이 더 좋다는 평가도 많다.
“대사와 노래가 이질감 없이 이어지게 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노래가 나왔을 때 관객이 뜨악해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리를 맞댔다. 그래서 나온 게 ‘송 모멘트(song moment)’다. 관객에게 이제 노래가 시작된다는 걸 알리는 신호. 설희의 술잔에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지면서 전주가 시작되고, 안중근이 독방에서 나와 사형장으로 첫발을 내디딜 때 전주가 나오는 식으로 모든 곡에 모멘트를 두었다.”
-영화에 로맨스가 없다는 것이 감독 입장에선 아쉬웠을 것 같다. 극중 김고은(설희)이 정성화(안중근) 연인으로 나오는 줄 아는 사람도 있다.
“내 목표가 ‘삼천만 감독’이 되는 것이었다면 로맨스를 어떻게라도 넣으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오롯이 인간 안중근에 관한 것이다. 세계 시장에서도 인정받을 작품을 만들기 위해 본질에만 충실하기로 했다.”
‘배고픈 청춘이여/ 먹고 먹어도 배가 고픈 건/ 어머니가 그립고/ 따뜻한 정이 고픈 것/ 고달픈 청춘, 달랠 만두 하지!’ -영화 ‘영웅’ OST
부산 출신으로 고려대 경제학과를 나온 윤제균은 광고회사 LG애드에서 일하다 영화감독이 됐다. 1998년 터진 IMF 외환 위기가 월급재이었던 그의 운명을 바꿨다. “전 직원이 돌아가며 한 달씩 무급휴직을 했는데, 그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때였다. 돈만 있으면 한 달 세계여행도 할 수 있는 기회인데, 나는 결혼하면서 장만한 군포 다세대 주택 대출 이자를 갚느라 주머니에 돈 만원이 없었다.” 한 달간 돈 없이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궁리하다 시작한 것이 글쓰기다. 그때 쓴 시나리오 ‘신혼여행’이 공모전에 당선됐고, 두 번째로 쓴 ‘두사부일체’가 영화로도 제작돼 대흥행하면서 윤제균은 한국 영화계에 샛별로 떠오른다.
-원래 글 재주가 있었나?
“내게 글 재주가 있다는 걸 나이 서른에 알았다(웃음).”
-골방에서 시나리오를 쓰면서 처음 알았다는 뜻인가?
“시나리오 쓰는 법은 학교 다닐 때 누구나 배운다. 발단, 전개, 위기, 절정, 결말, 다섯 단계로 쓰면 되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생각하면 단계마다 20신(scene)을 할애해 100신을 만들면 영화 한 편이 만들어진다. 일기 쓰듯 하루에 10개 신을 만들면 열흘에 100신이 나온다.”
-영화를 전공한 사람들이 들으면 허탈하겠다.
“모든 일이 쉽게 생각하면 쉽고, 어렵게 생각하면 어렵다. 시나리오 쓰는 걸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예 시도를 안 하는 거다. 그런데 해보면 ‘콜럼버스의 달걀’ 같은 거다. 더욱이 생계를 위한 거라면 세상에 어려운 일은 별로 없다(웃음).”
-조폭 코미디물인 ‘두사부일체’부터 역사물 ‘영웅’까지 스펙트럼이 너무 넓어서 윤제균의 정체는 뭔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인간 윤제균은 웃음도 많고 눈물도 많다. 어깨에 힘 주는 걸 제일 못 한다. ‘국제시장’이나 ‘영웅’이 시종 무겁지 않고 웃음을 주는 대목이 많은 것도 그 때문 아닐까.”
-학창시절에도 친구들을 잘 웃겼나?
“공부만 하는 모범생이었다. 경상도 집안의 장손에 장남이고 외아들이었다. 남자는 그저 과묵해야 한다는 교육을 받은 탓에 내 안에 있던 끼를 나이 서른까지 몰랐고, 그걸 억누르며 살았던 것 같다.”
-“나는 고급스러운 아트보다 대중성 있는 영화를 연출하는 게 더 좋다”고 했더라.
“내가 만든 영화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을 때 가장 행복하다. 하느님이 내게 이런 재주를 주신 건, 각박하고 험한 세상에 작은 행복을 주는 크리에이터가 되라는 것 아니었을까. 잔인한 영화는 지금도 못 본다.(웃음)”
-칸이나 아카데미 수상엔 욕심이 없나.
“전혀. 다만 한 가지 드리고 싶은 말은, 많은 분들이 나를 대중적이고 상업적인 감독으로만 아는데, 실은 ‘국제시장’이 베를린영화제 초청작이다. 베를린 가서 레드카펫도 밟았다. 영화 기자들도 그 사실은 모르더라(웃음).”
-윤제균에겐 쇠복, 금전운이 있다고 하더라. 그런데 JK필름 대표로 제작한 작품 중에는 ‘7광구’처럼 혹평받으며 엎어진 것들도 꽤 있다.
“‘두사부일체’ ‘색즉시공’ 단 두 작품으로 떴다가 ‘낭만자객’으로 고꾸라졌다. 악플이 하도 많아서 6개월간 인터넷을 끊고 살았다. 그때 영화계 사람들이 ‘이제 윤제균은 끝났다’고 했다. 4년 뒤 ‘일번가의 기적’으로 재기하고, 다시 2년 뒤 ‘해운대’로 천만 관객을 동원하자 영화계에선 ‘윤제균이 저렇게 될 줄 알았다’고 하더라. 그후 ‘7광구’로 망하니 ‘또 저렇게 될 줄 알았다’,
‘국제시장’으로 쌍천만 감독이 되니 ‘또 저렇게 될 줄 알았다’ 하더라. 이제는 사람들의 말과 평가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한 가지 배운 게 있다면, 일이 잘될 때 교만하지 않고 실패했을 때 낙담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내 인생이 오르막에 있으면 감사해하고, 내리막이면 언젠가는 올라갈 테니 최선을 다하면 된다. 다만 올라갈 때 조금 많이 올라가고 내려올 때 좀 덜 내려와서 인생이 우상향 곡선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웃음)”
-그러고 보니 ‘국제시장’과 ‘영웅’은 닮았다. 밑바닥에서 모진 세월 견디며 살아낸 이들이 대한민국을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헌사랄까.
“‘국제시장’ 때도 그 얘기를 한 건데 기성세대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라며 욕을 하더라. 우리 부모 세대는 삼시세끼 밥을 먹을 수 있다면 행복하다 여겼다. 그때는 나라라도 있었지. ‘영웅’은 나라조차 없던 시절을 살아낸 분들에 대한 찬가다. 후손으로서 부채와 고마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윤제균은 우파인가?
“‘국제시장’을 만든 뒤 ‘넌 어느 쪽이냐’는 질문을 쉴 새 없이 받았다. 그때마다 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답했다. 안중근 의사에게 좌우가 있었던가. 그에겐 나라와 민족밖에 없었다. 왜 우리는 아직도 조국보다 이데올로기가 앞서야 하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이 시대의 영웅은 누구인가?
“자신이 처한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사람들. 안중근은 결코 평범한 삶을 살지 않았지만, 여느 남자와 다를 바 없는 흔들리는 청춘이고 아파하는 아들이자 눈물 많은 아버지였다. 평범했으나 나라와 가족을 지극히 사랑한 이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