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료

섣달 그믐날

빠꼼임 2022. 12. 31. 12:10

[아무튼, 주말] 섣달그믐날

[김황식의 풍경이 있는 세상]

김황식 전 국무총리
입력 2022.12.31 03:00
 
한 해의 마지막 날인 ‘섣달 그믐날’, 참 정감이 느껴지는 말입니다. 이 말에서 느끼는 저의 감회는 살같이 빠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실속 없이 세월만 보냈다는 아쉬움에 마음이 허전해지는 것이지만, 마냥 싫지만은 않습니다. 이날은 한 해를 돌아보고 마무리하며 새 희망의 새해를 준비하는 날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섣달은 한 해를 다 보내고 새해 설날을 맞게 된다는 뜻의 ‘설윗달’ 또는 ‘서웃달’에서 나온 말입니다. 또 그믐날의 ‘그믐’은 보름달이 날마다 줄어들어 눈썹같이 가늘게 되다가 마침내 없어진다는, ‘사그라지다’와 같은 뜻의 순우리말 ‘그믈다’의 명사형입니다. 섣달 그믐날은 한자어로는 제일(除日)이라고도 했습니다. 제(除)는 옛것을 없애고 새것을 마련함을 뜻합니다.

일러스트=김영석

민가에서는 이날 집 안팎을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가는 해를 먼지 털듯이 털어내고 묵은 것을 다 쓸어버려야 액(厄)이 모두 물러나 새해에 복이 들어온다는 생각에서 그랬습니다. 또한 집 안 곳곳에, 심지어 외양간과 변소까지 기름 등잔을 켜서 환하게 밝혀놓았습니다. 불을 켜두면 잡귀가 들어오지 못하고 집에 밝은 기운이 들어온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날에는 새벽녘 닭이 울 때까지 잠을 자지 않고 수세(守歲)하면서 새해를 맞이하였습니다. 수세는 지나간 시간을 반성하고 새해를 설계하는 것으로 마지막 날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생각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우리가 12월을 섣달이라 부르듯이 일본 사람들은 12월을 사주(師走·시와쓰)라고 부릅니다. 이상한 이름입니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스님이 불경 외우기를 서두르는 마지막 달 또는 한 해가 다 무르익었다는 표현에서 차음(借音)하였을 것이라고 하지만, 제 생각으로는 글자 그대로 점잖은 스님이나 선생님도 바삐 뛰어다니는 때라는 정도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밀린 일을 정리하여 한 해를 잘 마무리해야 하니까요.

 

실제로 일본 사람들은 섣달 그믐날을 오미소카(大晦日·おおみそか)라고 하여 이날 대청소를 하였습니다. 설날은 새로운 한 해의 신(神)을 맞이하는 날이기에 미리 깨끗하게 청소하고 신을 맞이한다는 겁니다. 옛 풍습은 두 나라가 많이 닮았습니다.

세월 흐름에 따라 풍습은 변했지만, 지나간 한 해를 회고하며 잘 마무리하고 새해를 설계하며 소망을 그려보는 것이 섣달 그믐날에 할 일임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한 해를 회고하면 잘한 일, 잘못한 일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잘한 일로는 우리나라 정치가 ‘대립과 갈등’에서 ‘대화와 타협’의 정치로 발전하도록, 그 모델로서 독일의 정치를 분석한 ‘독일의 힘, 독일의 총리들’을 연초에 발간하고 이를 국회의원들에게 배포한 일입니다. 정치가 좋은 방향으로 바뀌었으면 하는 것이 온 국민의 소망일 테니까요. 그리고 조선일보에 칼럼 ‘풍경이 있는 세상’을 쓰기 시작한 것도 잘한 일이었습니다. 세상 살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 가운데 이웃에게 전하여도 무방할 만한 이야기를 써서 공감할 수 있다면 저로서는 영광이자 기쁨이니까요.

 

한편 잘못이라고 생각되는 일도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는 역시 칼럼 ‘풍경이 있는 세상’을 쓰기 시작한 일도 들어 있습니다. 아무리 주말판에 칼럼 제목처럼 조금은 여유롭게 쓴다고 하지만 소재가 적절한지, 내용이 격에 넘치거나 부족한 것은 아닌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지는 않는지, 설사 불편하게 하더라도 필요하다면 괘념치 않고 써야 하는 것은 아닌지 등 걱정거리가 적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상반된 생각은 칼럼을 시작하면서 이미 가졌던 대목이니까, 그리 자책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칼럼을 시작하면서 품었던 생각, “그만 썼으면 좋겠다는 말이 나오기 전, 즉 아니다 싶으면 나 스스로 그만두어야지. 추하지 않도록”, 이것이 저의 새해를 맞는 작은 다짐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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