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남북] 왜 200억 들여 ‘대한제국 영빈관’을 다시 짓나
외세에 의존했던 고종이 세운
호화로운 서양식 건물 ‘돈덕전’
100년 만에 굳이 새로 만들며
‘자주 외교’라고 미화하다니

요즘 덕수궁 돌담길을 돌다 보면 서쪽 언덕에서 예전엔 볼 수 없었던 장대한 건물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뾰족한 탑과 붉은 벽돌, 푸른색 창틀이 있는 근대 서양식 건축물 돈덕전(惇德殿)이다. ‘서경’의 ‘덕 있는 이를 도탑게 하고 어진 이를 믿는다(돈덕윤원·惇德允元)’는 순(舜)임금 말에서 딴 것으로, 르네상스와 고딕 양식을 절충해 1903년 완공한 대한제국의 연회장이자 영빈관이었으며 황제의 외국 사신 접견장이었다.
당시 이곳을 찾은 한 독일인은 이렇게 썼다. “접견실은 황제의 색인 황금색으로 장식했다. 황금색 비단 커튼과 황금색 벽지, 이에 어울리는 가구와 예술품들, 이 모든 가구는 황제의 문양인 오얏꽃으로 장식했다.” 이 호화로운 건물에서 고종은 즉위 40주년 기념식을 열려고 했으나 무산됐고, 아이러니하게도 몇 년 뒤 강제 폐위되고 나서 아들 순종의 즉위식이 여기서 치러졌다.
‘미국 공주 행차’라는 촌극(寸劇)의 현장이기도 했다. 을사늑약 두 달 전인 1905년 9월 방한한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가 이곳에 묵었다. 앨리스를 공주쯤으로 여긴 고종은 극진히 환대했으나 미국이 그 직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의 한국 침탈을 용인했다는 사실은 통 모르고 있었다. 앨리스는 “황제다운 존재감 없이 애처롭고 둔감했다”며 고종을 비웃었다. 멸망을 목전에 둔 나라가 펼치던 웃지 못할 외교전이었다.
1897년 선포한 대한제국이 ‘황제의 나라’를 내세운 것은 분명 자주(自主)를 표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외화내빈(外華內貧)이었다. 왕실이 황실로 격상함에 따라 불어난 유지비는 백성들 몫이었다. 황제국 선포 뒤 사실상 새로 지은 덕수궁에는 돈덕전·석조전 같은 장엄한 서양식 건물도 신축했다. 같은 임금 때 무리한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의 고혈을 빤 지 불과 29년 뒤 일이었다. 내실을 갖춘 개혁은 ‘제국’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다. 세금을 내는 백성들이 오히려 나랏빚을 대신 갚아주자고 국채 보상 운동을 벌여야 했던 취약한 나라가 대한제국이었다.

미·영 두 열강의 공관 사이 절묘한 위치에 지은 돈덕전은, 대한제국이 외세에 의지해 연명(延命)을 노린 굴욕적 역사의 상징과도 같다고 평가할 수 있다. 건물은 오래가지 못했다. 1910년 나라가 망하고 1919년 고종이 승하한 뒤 더 쓸 일이 없어진 돈덕전은 방치됐다. 1920년대에 철거됐고 그 자리엔 어린이 유원지가 들어섰다.
사라졌던 돈덕전을 다시 지은 것은 2018년 본격화한 ‘덕수궁 제 모습 찾기’에 따른 것이다. 발굴 조사를 마친 뒤 돈덕전 복원이 시작돼 최근 외부 공사를 끝냈다. 오는 5월 현판식에 이어 9월 개관할 예정이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복원’이 아니라 ‘재건’이라고 말을 바꿨다. “자료 부족 때문에 원형대로 지을 수 없었고 사진 등을 참고해 새로 만들었다.” 결국 건물의 많은 부분을 상상력으로 채웠다는 얘기다.
이렇게까지 해서 문화재적 가치도 의문인 돈덕전을 다시 짓는 이유는 뭘까. 담장 밖 안내판에는 ‘자주 외교를 통한 주권 회복의 장’이었다고 쓰여 있다. 한술 더 떠 문화재청은 “근대화를 향한 대한제국의 못다 이룬 꿈을 재조명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정신 승리’가 진정 우리가 역사에서 얻는 교훈일까. 재건된 돈덕전을 찾을 관람객들은 그 ‘자주 외교’라는 것이 돈덕전 낙성 2년 만에 숨이 끊어질 수밖에 없었던 허울 좋은 간판이었음을 이해해야 맞지 않는가?
돈덕전 재건에 투입된 비용은 약 200억원이다. 과연 그 돈을 들여 다음 세대에게 무엇을 가르치려는 것인가. 권위나 명분, 화려한 의전, 말로만 ‘자주’를 외치는 일 따위로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냉혹한 현실을 깨치는 것이 먼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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