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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빈(金洪彬·45·광주 송원대 OB)씨는 지난 1월 2일 남극 최고봉 빈슨매시프(4,897m) 정상에 올라섬으로써 세계 7대륙 최고봉 완등의 꿈을 이루었다. 전문 산악인들은 돈과 시간만 있으면 가능한 목표라고 넘겨 버릴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원대한 꿈이었다.
그는 손가락이 없다. 동상으로 열 손가락을 모두 잘라냈다. 지퍼조차 마음대로 올리고 내릴 수 없는 장애우다. 게다가 원정 한 번 나가는 데 최소 200만 원에서 3,000만 원이 넘는 큰돈이 드는 고산 원정을 계속 나간다는 것은, 특히 김홍빈씨처럼 경제력이 탄탄하지 못한 이들에게는 결코 쉬운 일일 수 없다.
그런 그가 엘브루즈(5,642m), 킬리만자로(5,895m), 아콩카구아(6,959m), 매킨리(6,194m) 그리고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에 이어 코지어스코(2,228m)와 빈슨매시프에 이르기까지 세계 7대륙 최고봉을 오르기까지 누구보다 혹독한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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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홍빈·김영학·정득채씨(왼쪽부터)가 무등산 증심사 계곡에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다. 어려웠던 옛날 일들이 이제는 아름다운 추억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사진=전판성 영암군청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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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겨울비가 촉촉이 내리던 전날과 달리 맑은 하늘 아래 무등산에는 벌써 봄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토요일 휴일을 맞아 증심사 산길은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등산인들로 북적였다. 김홍빈씨는 선배인 김영학(49·서강정보대 OB)씨와 후배 정득채(45·″)씨 그리고 그의 홍보와 매니저 역할을 해주는 전판성(53·영암군청 공보실 홍보팀장)씨와 함께 무등산으로 접어들었다.
“그들이 있기에 오늘의 제가 있는 겁니다”
김홍빈씨는 한때 촉망받는 산악인이었다. 한마디로 잘 나갔다. 1983년 송원대 산악부원으로 산에 입문한 이후 1984년 광주전남 암벽대회 2위, 전국 등산대회 3위, 토왕빙폭 등반 등으로 차츰 성장해 나아갔고, 1989년 동계 에베레스트 등반과 1990년 낭가파르밧(8,125m) 원정을 통해 히말라야 고산등반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촉망받는 산악인으로 급부상한 그는 1991년 큰 원정을 앞두고 매킨리 원정에 나섰다. 앞서 시도한 두 차례의 고산 원정을 통해 이루지 못한 등정의 꿈을 그해 가을에 나설 시샤팡마ㆍ초오유 원정에서 꼭 이루고 말겠다는 각오로 경험을 쌓기 위해 나선 등반이었다. 거기서 그는 열 손가락을 잃고 말았다.
“구조될 때까지 며칠이 지났는지조차 몰랐어요. 정상 공격에 나섰다가 도중에 포기하고 캠프로 내려선 다음 탈진해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거죠. 제가 머문 데날리패스는 아무도 캠프를 치지 않는 곳이었어요. 춥고 바람이 엄청나게 몰아치는 곳이거든요. 별별 꿈을 다 꿨어요. 물고기 신세가 되어 팔려 가기도 하고, 죽어가기도 했어요. 구조된 다음에는 인육(人肉)으로 팔려 가는 꿈을 꿨어요.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저를 바위 위에 올려놓더니 전기톱으로 잘라내려 하는 거예요. 허, 참. 헬기에 실려 이송된 앵커리지 병원에서 어떻게든 손을 살려보려고 일곱 번이나 수술했는데 안 되니까 결국 잘라내고 말더군요. 그래서 지금처럼 된 거예요.”
현재 김홍빈씨는 남아 있는 엄지와 검지 일부로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숟가락이나 포크로 밥은 먹지만 신발 끈은 마음대로 맬 수 없는 상태다. 그런 그가 7대륙 최고봉에 모두 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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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영원한 동생 정득채씨. / 2 영원한 형 김영학씨. / 3 매니저를 자청한 전판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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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슨매시프 정상에 올랐을 때 수많은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한 명 한 명이 고마웠다. 그들이 아니면 지금 이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생각하니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었다.
1991년 당시 김홍빈씨의 처지를 안타까워한 병원 측은 1억5,000여만 원에 이르는 엄청난 입원치료비를 받지 않고, 원한다면 미국에서 살게 해주겠다며 따뜻한 손길을 내밀었다. 그 역시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미국에서 사는 게 낫겠다 싶었다. 그러나 “꼭 한 번만이라도 고향으로 돌아와 어미가 지어준 밥을 먹어 달라”는 어머니의 간곡한 소망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어머니만큼 가슴이 아플 이가 또 있으리오마는 공항에 마중나온 선후배들 역시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홍빈씨는 마중나온 선후배들을 보면서 멋쩍은 마음에 씩 웃었지만, 김영학씨와 정득채씨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형은 제 사부였어요. 우상이었지요. 등반도 잘하고, 모든 면에서 에프엠이었으니까요. 형과 시샤팡마ㆍ초오유 원정을 함께 갈 꿈에 부풀어 있었어요. 그렇게 심각할 줄 몰랐지요. 참담하더군요. 산은커녕 형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걱정스러웠어요.”
매킨리 원정 전부터 두 사람은 대한산악연맹 시샤팡마ㆍ초오유 원정대에 발탁되기 위해 호남선 철길 옆에 허름한 방을 구해놓고 합숙훈련을 해왔다. 김홍빈씨는 귀국 후 순천에 계신 어머니와 잠시 지내다 광주로 돌아와 정득채씨와 함께 그 전세방에서 살았다.
“계약기간이 끝날 때까지 몇 달간 지냈어요. 목욕도 시켜주고, 대소변도 받아주면서, 정말 많이 울었어요. 형이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며 신세 한탄을 하면 부둥켜안고 엉엉 울었어요. 앞날이 막막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형이 산에 가겠다는 거예요. 그것도 바위에 말이에요. 암벽화를 신겨주고 벨트를 채워주고, 손에는 테이프를 칭칭 감아주었어요. 뱃살을 이식한 손이 아직 아물지 않았던 때라 테이프를 감은 상태에서도 바위에 부딪치면 자지러질 듯 아파했어요. 멀쩡한 저도 형이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 소름이 끼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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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암벽 등반에 앞서 정득채씨가 김홍빈씨의 안전벨트에 자일을 묶어주고 있다. / 2006년 여름 가셔브룸2봉 등정 기념사진. 가운데 서 있는 이가 자일파트너인 김미곤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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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득채씨는 홍빈씨와 워낙 오랜 세월 자일 파트너로 지냈기에 눈에 보이지 않아도 감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홍빈씨의 확보를 볼 수 있었다.
“참 여러 번 다쳤어요. 바위에서 떨어져 늑막을 다쳐 허리를 제대로 펴지 못하고, 아이젠이 허벅지를 찔러 움푹 파인 채로 집에 오고. 그럴 때면 내가 뭐 그리 바쁜 일이 있다고 형과 함께 산행도 못했나 하는 마음에 자책도 많이 했어요.”
옆에서 말을 듣던 김홍빈씨는 “말 안 해도 늘 알아서 해주는, 항상 믿음이 가는 후배”라며 “무슨 이유인진 모르겠지만 내가 참가할 형편이 못되자 득채도 탈락되고 말았고, 나 때문에 원정을 못 가게 된 게 미안할 따름”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형이 마음 고생할 때 저는 초모랑마에도 다녀왔고, 히말출리 등반도 했잖아요. 이젠 형이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등반해서 좋아요. 7대륙 최고봉에 다 오르더니 이젠 14좌에 도전했잖아요. 대단해요. 그래서 이젠 마음이 편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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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학이 형이 운전면허 따게 해주었어요”
김홍빈씨도 그간 등반을 통해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진 산악인이 되었다. 이날 세 사람이 증심사를 향해 오를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 악수를 청하고 “대단하다”며 축하 인사를 건넸다.
“사실 홍빈이 형한테 엄청 맞았어요. 그런데도 좋다고 하니 저도 참 웃기죠?”
“야! 영학이 형한테 맞은 것 생각하면 너는 어루만져준 거야.”
김영학씨는 농담을 주고받는 두 후배를 느긋하고 사랑스런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후배들이 열심히 살아주는 게 고마운 듯했다.
“처음엔 걱정이 많았어요. 그 뜨거운 혈기를 어떻게 다스릴까, 자기 힘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할 텐데 어떻게 극복해낼 수 있을까 싶었던 거죠. 참 능청스런 친구예요. 의연하게 헤쳐나가는 걸 보면 말이에요. 언젠가 바지 지퍼 고리에 링을 하나 덜렁덜렁 달고 다니더라고요. 멋있죠, 하곤 웃더군요. 조금 남아 있는 엄지와 검지로 올리려고 그랬던 겁니다.”
김영학씨가 홍빈씨를 처음 본 것은 군복무 중 휴가 나와 무등산 새인봉을 찾았을 때였다. 바위도 잘 타고 힘도 좋아 쓸 만한 친구다 싶었다. 제대 후 설악산 토막골에 함께 간 게 두 번째 만남이었다.
“짤막한 빙벽이 있기에 올라보라고 했어요. 뭔가 어정쩡한 거예요. 빙벽등반이 처음이었던 거죠. 내 말을 선배의 명령이라 받아들이고 올랐던 거예요. 이후 산행을 자주 함께 했어요. 89ㆍ90 동계 에베레스트 원정을 앞두고 훈련 삼아 수영장을 같이 다녔어요. 매킨리 원정은 홍빈이가 함께 가자고 했는데 직장 때문에 못 간 거예요. 그래서 같이 갔더라면 그런 일이 없었을 텐데 하고 많이 미안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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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6년 여름 가셔브룸2봉 등정 기념사진. 가운데 서 있는 이가 자일파트너인 김미곤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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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빈씨는 1992년부터 한 1년간 김영학씨 집에서 지냈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영학씨의 아내 우정수(서강정보대 OB)씨도 마다하지 않았다. 우정수씨는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었다. 홍빈씨는 김영학씨 집이 편했고, 영학씨는 늘 김홍빈씨가 그의 눈에 보여야 안심이 되었다.
“아내는 홍빈이한테 후배예요. 산악부 출신이다 보니까 홍빈이와 지내는 걸 텐트에서 함께 지내는 정도로 생각하더군요. 대개 육체적 장애가 있으면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는데 홍빈이는 달라요. 오히려 어떤 벽이든 뚫고 나가려고 했어요. 그럴 때마다 깜짝 깜짝 놀랐으니까요. 꾀도 많아요. 넉살도 좋고요. 이번에 빈슨매시프 등반을 끝내고 칠레 푼타아레나스에서 페루 산티아고로 가는데 좌석이 없으니까 약국에 가서 붕대를 사와 손에 칭칭 감았데요. 그리곤 공항 데스크에 서서 손을 올려놓고 버티니까 데스크 여직원이 마지못해 표를 끊어주었다더군요. 그런 재주꾼이 어디 있겠어요. 공부를 못해서 그렇지 사회 적응력도 참 좋은 친구예요.(웃음)”
“형이 운전면허도 따게 해주었어요.”
김홍빈씨는 귀국 후 한동안 버스나 택시를 탈 때마다 곤욕스러웠다. 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을 자기 손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래서 버스를 탈 때면 손님이나 운전기사에게 지갑에서 꺼내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당시만 해도 장애우에 대한 편견이 심했다. 간혹 못 들은 척하며 그냥 지나쳐 버리는 사람도 많았다.
“홍빈이가 차를 몰 줄 알아야 어딜 가더라도 가겠다 싶더군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주먹 쥔 채로 운전을 해보았어요. 해볼 만하더군요. 사고 전 홍빈이가 운전을 했던 터라 가능하다 싶었어요. 연습을 시켰죠. 금세 따더군요.”
김영학씨의 권유로 운전을 새로 배워 장애인용 운전면허증을 따낸 홍빈씨는 이후 자동차 부품제조업체에 근무했다. 화물차 운전기사였다. 할 만했다. 그런데 어느 날 선배 한 사람이 좀더 수월한 일을 하게 하려는 마음에 다른 회사 전산실로 자리를 옮겨주었다.
“컴퓨터를 다루는 일이었어요. 선배가 도와주려고 한 일이지만 컴퓨터 자판을 다루는 일을 손가락이 없는 제가 잘 할 수 있겠어요. 결국 얼마 못 다니고 그만두었어요.”
그는 1993년 순천 어머니 집으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돼지 분뇨와 왕겨를 섞은 거름을 판매하는 영업을 하다 그도 제대로 안 되자 또다시 광주로 거주지를 옮겨 골프장에 근무했다. 잘 적응할 무렵 이번에는 부도가 나고 말았다.
“골프장에서 생활하면서 포크레인 등 대형 특수장비를 많이 다뤄봤어요. 그래서 포크레인을 몰면 살 수 있겠다 싶었죠. 그런데 신체적 결함 때문에 면허를 딸 수 없다는 거예요. 막막했어요. 그러다 이렇게 지낼 바엔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하자고 마음먹었죠. 등산이었어요.”
고산등반을 위해 애를 쓴 수많은 사람들
1997년 여름 김홍빈씨는 멀쩡한 산악인도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를 세웠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를 비롯해 아콩카구아(6,959m), 매킨리(6,194m), 킬리만자로(5,895m), 엘브루즈(5,640m), 칼스텐즈(4,884m) 등 6대륙 최고봉에 모두 오르겠다는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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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렇게 기쁠 수가. 김홍빈씨가 지난 1월 중순 조벽래씨가 만들어준 아이스바일을 팔에 차고 빙벽등반을 한 뒤 기쁜 나머지 괴성을 지르며 하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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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대부분 터무니없는 계획이라며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보란 듯이 빙하를 가로지르고 설사면을 넘어서면서 목표를 하나하나 달성했다. 1997년 봄 일본 다테야마(3,015m)에서 가능성을 확인하고 그해 여름부터 엘브루즈를 시작으로 1998년 여름 매킨리에 이르기까지 4대륙 최고봉에 올랐다.
에베레스트는 걸림돌이었다. 2000년 봄 당시 14개 거봉 등정 레이스를 펼치던 한왕용(밀레 홍보부장)씨의 제안으로 마나슬루(8,167m) 원정에 참가했다.
“6대륙 최고봉만 오르겠다 마음먹었던 것은 남극 빈슨매시프는 너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이었어요. 아무튼 사고 이후 꿈으로만 간직하고 있던 히말라야 8,000m 고봉 등반에 나서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뻤겠어요. 한데 안 되더군요. 한 대장 스케줄을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어요."
그해 가을에는 동기인 김영식(대한산악연맹 청소년이사)씨의 고마운 제안으로 충북연맹팀에 끼어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다. 그러나 이 역시 다른 대원들과 보조를 맞출 수 없었다.
“매킨리에서 사고를 당할 때 폐수종과 뇌부종을 함께 앓았어요. 의사 선생님이 귀국하기 직전에 또다시 고산에 가면 죽을 확률이 50%가 넘는다고 겁을 주셨어요. 그런 이유 때문인지 멀쩡했을 때와 달리 적응 속도가 매우 떨어진 거예요. 저 때문에 등반이 늘어졌지요. 모두 제가 정상에 올라서게 하려고 애를 많이 써주었어요. 그런데 저 때문에 팀 목표에 차질이 생기겠다 판단되니까 제 욕심만 차릴 수 없었어요. 캠프3(7,200m)에서 돌아섰어요.”
2001년 귀국 후 한동안 직장생활을 하던 그는 이듬해 2002년 북미 최고봉 매킨리 등정에 성공해 10년 만에 한을 풀었다. 이후 김홍빈씨는 에베레스트 재도전을 목표로 그에 앞서 고소 경험을 쌓기 위해 2003년 키르기즈스탄 레닌피크(7,134m·등정), 중국 코스클락(7,028m), 2006년 가셔브룸2봉(8,047m·등정)과 시샤팡마(8,027m·등정)로 이어지는 고산 등반을 펼쳤다. 2007년 봄 성공한 에베레스트 등정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선행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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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운 분들이 많았어요. 2006년 가셔브룸 원정부터는 윤장현 단장님이 적극 도와주고 계세요. 스폰서도 유치해주고 건강도 챙겨주시고요. 2006년 가을엔 영학이 형이 함께 가자고 했어요. 그런데 한국도로공사팀 박상수 대장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함께 간 거예요. 정상에 오를 때까지 컨디션이 좋았어요. 그래도 후배들이 많이 도와주었기에 가능했다 싶어요.”
김홍빈씨가 C3에 올라섰을 때 해발 8,400m 높이의 발코니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구간에 고정로프가 깔려 있지 않았다. 때문에 함께 C3에 오른 김창호·김미곤씨는 로프 설치를 위해 그날 올라선 사우스콜 C4(7,950m)에서도 쉬지 않고 정상을 향했다. 이렇게 남봉(8,748m)까지 로프를 깔고 이튿날 오전 8시 하산했음에도 김미곤씨는 김홍빈·윤중현씨와 함께 오후 11시 정상으로 향했다.
체력적으로 무척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김미곤씨는 남봉까지 선배인 김홍빈·윤중현씨와 함께 오른 뒤 먼저 올라와 있던 셰르파와 함께 남동릉 루트에서 가장 위험한 구간인 힐러리스텝에 이어 정상까지 고정로프를 깔아 김홍빈씨가 안전하게 등반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덕분에 김홍빈씨는 무사히 등반을 마칠 수 있었다.
김홍빈씨와 김미곤(36·서강정보대 OB)씨는 2006년 여름 가셔브룸1·2봉 등반을 통해 호흡을 맞춰본 사이였다. 당시 원정은 둘이서 나섰다. 때문에 텐트 치는 일은 물론이고 홍빈씨의 배낭을 챙겨주는 일에서부터 양말과 삼중화를 신고 아이젠과 안전벨트를 차는 일까지도 해결해주어야 했다. 등반 중에도 직벽과 같은 상황을 만나면 위에서 당겨주고, 등강기를 이용해 등반할 때는 함께 오르다가 매듭이나 확보물을 만날 때마다 등강기를 다음 로프에 갈아 끼워주어야 했다. 이 모든 일을 묵묵히 해준 이가 김미곤씨였다.
이에 대해 김홍빈씨는 “어떤 상황에서든 싫은 표정 한 번 짓지 않는 고마운 후배”라 하고, 김미곤씨는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홍빈 형은 정말 대단한 선배”라며 서로를 추켜주었다.
남원이 고향인 김미곤씨는 올 봄 전북연맹 원정대에 속해 안나푸르나 원정에 나선다. 김홍빈씨 역시 같은 고산을 등반한다. 무등산 산행에 참가하지 못한 김미곤씨는 “팀이 달라 출발을 따로 하지만 등반을 시작하면 최선을 다해 홍빈 형을 도울 것”이라고 전화 통화를 통해 다짐했다.
김홍빈씨가 에베레스트 원정 이후 고산 등반에 나설 때마다 배낭 깊숙이 간직하는 게 있다. 고 오희준씨의 사진이다. 두 사람 역시 가셔브룸 원정 때 인연을 맺었다.
“희준이는 고산등반가로서 명성을 날리던 산꾼이에요. 서로 만날 기회가 없어서, 가셔브룸 원정 때 김해공항에서 처음 만났어요. 나보다 못 생긴 놈이 또 있구나 싶더군요. 참 묵묵한 친구였죠. 누구한테 피해도 주지 않고, 틀림없이 힘들 텐데도 누구든 도와주려 애를 썼고요. 두 달 지내는 사이 10년지기 선후배 이상 가까워졌어요. 저런 친구라면 함께 등반해볼 만하다 싶었지요. 그래서 에베레스트 등반이 끝나면 낭가파르밧과 다울라기리를 같이 등반하기로 약속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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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7년 5월16일 에베레스트 정상. 왼쪽은 정상까지 로프를 깔며 동행해준 김미곤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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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빈씨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선 다음 마지막 캠프로 내려섰을 때 비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서벽 해발 7,900m 캠프에서 동료 대원과 함께 머물던 오희준씨가 눈사태에 휩쓸려 사라졌다는 사고 소식이었다.
“지난 가을 다울라기리 원정을 밀어붙였던 건 희준이와 함께 가기로 약속했던 산이었기 때문이에요. 희준이가 못 오른 나머지 봉은 함께 오르고 싶어요. 요즘 정상에 올라설 때마다 희준이 사진을 꺼내 봐요. 등반할 때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투정도 부리고 대화도 나눠요. 살 좀 빼라고 해야겠어요. 어찌나 무거운지. 멋진 후배였어요.”
김홍빈과 함께 하는 영원한 길동무들
김홍빈씨는 빈슨매시프 등반을 마치고 귀국하자마자 빙벽 등반에 몰입하고 있다. 그가 목표로 삼은 8,000m급 14개 고봉을 완등하려면 아직 10개나 남아 있다. 별별 상황이 다 벌어질 것이고, 어떤 상황도 헤쳐 나아가려면 역시 피켈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에 앞서 토왕폭에 올라보고 싶어요. 손을 다치기 4년 전에 한 번 오르고 못 해봤거든요. 엊저녁 제 사진 보셨죠. 영동빙벽장에서 등반하는 사진이오. 그 피켈이 벽래가 만들어준 거예요.”
오희준씨와 마찬가지로 가셔브룸 원정 중 인연을 맺은 조벽래(39·동아대 OB)씨는 어지간한 등반장비는 직접 만들어 쓸 만큼 손재주가 좋다. 그에 앞서 남들 도와주는 일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산꾼이다. 햇빛을 이용해 충전할 수 있는 솔라판을 직접 만들어 여러 원정대에 제공한 적이 있는 조벽래씨는 김홍빈씨를 위해서도 장비를 만들어주곤 했다. 손가락이 없어도 사용이 가능한 등강기도 그가 만들어준 것이고, 요즘 사용하고 있는 아이스바일 역시 그가 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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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생의 영원한 길동무인 정득채·김홍빈·김영학 세 사람이 희망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무등산을 오르고 있다. (사진=전판성 영암군청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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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벽은 생각도 못했어요. 아이젠 신고 걷는 정도였지요. 그런데 벽래가 가능하게 해준 거예요. 주마와 바일 모두 손으로 잡지 않고 팔에 걸게 돼 있어요. 등강기는 한 손으로 최대한 올릴 수 있어 속도가 빨라요. 얼마 전 벽래가 만들어준 바일을 사용하니까 어지간한 빙벽은 오를 만하더군요. 그래서 좀더 연습해 내년에 토왕폭에 도전할까 하는 거예요.”
평소 김홍빈씨를 도와주는 이들은 일일이 이름을 헤아리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많다. 자그마한 아파트에서 홀로 살고 있는 그는 요즘 고교 동기인 김용·양은미씨의 보살핌을 톡톡히 받고 있다.
“밤 12시에도 밥 먹으러 오라고 해요. 수시로 보약도 해주고, 원정갈 때마다 용돈도 넉넉히 챙겨줘요. 은미씨가 신랑보다 저를 더 챙겨주는 것 같아 가끔 친구 눈치가 보여요, 하하……. 임승진(치과 전문의) 선배님은 산에 다녀오면 이부터 살펴봐요. 밥 먹다 돌 씹어 부러진 데 없나 하고요. 김형석(정형외과 전문의) 선배님은 어디 삐끗하면 신세지는 분이고요. 김세용 선배님은 2년에 한 번씩 초음파로 신장결석을 깨내주시고요. 윤장현(안과 전문의) 단장님은 봉사활동을 하도 많이 하느라 바쁘신데도 산에 갔다 오면 눈을 살펴주세요. 참, 박헌주라고 에베레스트 올라간 후배가 있는데 이 친구는 수시로 보약을 해줘요. 너무 많은 분들한테 신세만 지고 사는 것 같아 늘 미안해요. 손가락 운은 없지만 복이 많은 놈인가 봐요.”
김홍빈씨 일행의 무등산행은 증심사 아래 계곡에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보리밥집에서 닭발볶음에 막걸리 마시는 것으로 끝이 났다. 하산길. 서로 마주보며 웃고, 툭툭 치고. 김홍빈씨와 김영학·정득채씨는 요즘도 하루가 멀다 만나는 사이다. 그런데도 할 얘기가 많은 듯했다.
이들 세 사람은 영원한 길동무였다.
/ 글 한필석 차장 pshan@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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