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직 대통령이 네 사람이나 철창신세를 지는 그런 나라가 지구 상에 또 있을까. 이승만이 감옥에 가지 않은 것은 하와이로 망명길에 올랐기 때문이다. 18년 집권했던 박정희는 그의 심복 김재규가 궁정동에서 권총을 들고 현직 대통령을 살해했기 때문에 투옥되는 모욕을 당하지 않았다. 노무현이 만일 스스로 목숨을 끊지 않았다면 아주 먼 곳에서 만세 수를 누렸을까. 만일 김영삼이 김대중에게 대통령 될 길을 열어 주지 않았더라면 퇴임 후에 본인도 아들도 철창신세를 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대통령에게 비리가 있으면 재임 중에 사임하도록 해야지 임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잡아가다니! 이 나라의 정치 풍토는 선조 때 싹이 트기 시작한 사색 당쟁 때문에 반대파의 씨를 말리려는 참혹한 살생이 벌어졌다고 생각한다. 왜 그 악습을 청산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오늘, 구속되어 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는 이 나라 17대 대통령 이명박에게 어떤 개인적 감정이 있어서 하는 말은 아니다. 나 자신이 부끄러워서 하는 말이다. 나는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일에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가 서울시장 재임 중에 청계천을 복원한 것과 서울 시내 교통 문제를 시민이 편리하도록 개선한 사실들을 큰 업적이라고 나는 평가하였다. 이명박 자신이 나는 생긴 것도 한심하고 목소리도 좋지 않아 대통령이 될 만한 인물이 못 된다고 매우 겸손하게 말한 것이 매력적이기도 했다. 정치인도 아니면서 우리 몇 사람은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전국을 누비었다. 심지어 미국까지 가서 동포들을 모아놓고 "이번 대선에서는 이명박이 반드시 당선돼야 한다"고 여러 번 핏대를 올렸다. 일본을 최초로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이명박을 비교하기도 하였다. 두 사람의 관상이 비슷하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섞어가면서 나는 그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였다.
이명박 후보는 대통합민주신당의 후보 정동영을 531만표 차로 누르고 당당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 뒤에 나는 그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그가 비서실장 정정길을 시켜 우리를 시내 음식점으로 초대하여 저녁 대접을 하고 청와대에서 만든 기념품을 전해 준 것은 사실이지만 청와대에 오라는 말은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정 실장에게 "우리가 무슨 전염병 환자인가. 청와대에 들르면 큰일 나는가" 하였을 때 실장은 매우 난처한 표정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 선거 공약의 하나였던 대운하 공사를 포기하였다. 그 동기는, 서울대 교수 100여 명이 연서로 탄원서를 만들었는데, 대운하 공사는 국토와 그 환경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그들을 설득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 공약을 접어 버렸다.
그는 러시아 정부의 초대를 받아 떠날 때 말썽 많던 작가 황모씨를 대동하고 출국했다. 대통령이 누구와 어디를 가든 우리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자유민주주의의 큰 깃발 하나만을 들고 나가야 할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나는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오로지 중도만 가는 실용주의자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곧 내 의견을 털어놓았다. "정치적 식견이 없으면 침묵을 지킬 것이지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니고 중도를 간다는 사람은 대개 우왕좌왕하는 사람이다"라고 듣기 싫은 소리를 퍼부었다. 나는 그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데 기여한 사실을 지금도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이명박이 대통령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내 마음 한구석에는 그가 미국 16대 대통령 링컨처럼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941년 오사카 근교 어느 목장에서 노동을 하던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 살림도 고달팠지만 해방되고 식구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찢어지는 가난 속에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삶을 살았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고생에 고생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대학에 진학하여 졸업은 했지만 취직이 안 돼 고생하던 터에 현대에 입사, 정주영을 회장으로 모시고 승승장구하여 마침내 그 회사 사장도 되고 회장도 되면서 그는 상당한 재산을 모을 수 있었다. 그 뒤 현대를 물러난 그는 전국구 국회의원이 되었다. 다음 선거에서는 지역구에서 당선됐지만, 공직선거법 위반 등 의원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사면받으면서 그는 서울시장에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 당선되었다. 특히 청계천 복원 사업이 국민을 감동시켜 2007년 마침내 그는 이 나라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그는 링컨처럼 되지 못하고 영어(囹圄)의 몸이 되어 불행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이 나라의 많은 가난한 젊은이에게 이명박은 마땅히 희망을 주어야 했는데 왜 그들에게 절망을 안겨주는가. '링컨처럼 되라'는 말은 아직도 듣기 좋지만 '이명박처럼 되라'는 말은 듣기도 싫다.
나는 현직 대통령에게도 책임은 있다고 본다. 만일 그가 이명박 내외를 청와대에 초대하고 저녁을 대접한 뒤에 "부정 축재하신 액수가 어마어마하더군요. 1000억 정도를 희사하면서 장학 재단을 하나 크게 만들라고 당부하시면 제가 이명박 대통령의 뜻대로 하고 이 대통령의 명예는 끝까지 지키겠습니다. 사법
처리를 한다는 건 피차 민망한 일이 될 것입니다"라고 한마디 했으면 오늘 같은 불상사는 없었을 것 아닌가! 대통령이군자가 돼야지 소인이 되면 나라가 어지럽다.
오늘의 대통령은 어제의 대통령 명예를 지켜줘야 한다. 그를 감옥에 넣어서 대한민국이 더 자랑스러운 나라가 되지는 않는다. 19대 대통령도 임기를 끝내고 국민의 존경이 차고 넘치는 대통령이기를 바란다.
해방이 되고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을 때 우리나라에는 민주 교육을 위한 삼총사가 건재하였다. 이 박사 세 분은 국민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큰 스승이었다. 성함은 백낙준, 김활란, 오천석인데 나는 그분들을 '민주 교육을 위한 삼총사'라고 부르고 싶다. 이번에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오천석은 평안남도 강서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따라 동경에 가서 청산학원 중등부에 입학하였다. 그는 거기서 장차 이 나라의 유명 인사가 될 문인을 여럿 만났다. 문학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기에 이광수, 김동인, 주요한, 전영택 등을 사귀게 되었다. 학교 공부보다는 도쿄 간다에 있는 헌책방을 뒤지며 닥치는 대로 문학작품을 읽었다. 그래서 학교 성적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지만 무난히 졸업은 하였다. 바로 그해 3·1운동이 터졌고 그의 삶에는 큰 변화가 생겼다. 그는 자기를 위해 살지 않고 남을 위해 사는 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오천석은 인생의 황혼기라는 70대에 접어들어 '외로운 성주'라는 책을 한 권 썼다. 자서전이다. 그런데 이 자서전에는 제 자랑은 한마디도 없고 그저 자기가 못난 사람이라는 넋두리뿐이다. 그래서 이 회고록은 재미있다. 흥미진진하다. 하도 재미있어서 읽다가 도중에 접을 수가 없다. 그는 자기 자신을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세상에 남길 만한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고 황혼을 맞이했다고 뉘우치지만, 이 나라에 오천석만큼 성공한 교육자가 누가 있는가. 그의 부친은 강서에서 서울로 올라와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였고 목사 안수를 받았으며 전도를 위해 일본에 파송되었다. 그래서 아들을 일본에 데리고 가서 공부시킬 수 있었다.
그 뒤 지방 감리사로 발탁된 그의 아버지는 한국을 대표하여 미국 감리교 총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때 오천석의 유학을 도와주겠다는 미국 목사 한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오천석은 미국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아이오와의 시골 마운트버넌에 자리 잡은 코넬 대학의 캠퍼스는 꿈의 나라처럼 아름다웠다. 이 학교에서 그는 졸업을 앞두고 '파이 베타 카파(Phi Beta Kappa)'라는 전 미국 우등생 모임의 회원으로 뽑혔다. 우리 동포 중에서는 남가주대학을 졸업한 신흥우와 오하이오 웨슬리언대에 다닌 김활란과 하버드에서 수학한 하경덕 등 수재들만이 회원으로 뽑힌 모임이다. 오천석은 그래도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었다고 우길 수 있을까.
그는 미국에 가서 10년 고생을 했는데 2년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중노동을 하였다. 그러나 노스웨스턴에서는 1년 만에 석사 학위를, 컬럼비아에서는 3년 만에 박사 학위를 받은 재사를 '평범한 학생'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미군정 문교부장을 지냈고 제2공화국에서는 문교부 장관이 되었다. 대한교육협회 회장, 유엔 총회 한국 대표 등을 역임한 천원(天園) 오천석을 그 누구도 평범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은 일찍이 '위대한 것은 이해되기 어렵다'는 말을 남겼거니와 나는 그가 자기 자서전 제목을 '외로운 성주'라고 붙인 까닭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오천석은 시대를 앞서가는 선각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컬럼비아를 찾았을 때 민주 교육의 태두 존 듀이는 이미 은퇴하고 없었지만 기라성 같은 그의 제자들이 컬럼비아를 지키며 미국의 교육계를 휘어잡고 있었다.
오천석이 공부를 마치고 조국 땅을 다시 밟았을 때가 1932년이었는데, 오랜 세월 해외에 나가 있던 그를 아는 사람도 몇 없었고 그가 발붙일 직장도 찾기 어려웠으나 다행히도 보성전문의 김성수가 불러서 기회를 주어 몇 년 그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점차 일제가 심하게 교육을 규제하였기에 그의 학문적 이상을 구현하지는 못하고 한동안은 영어밖에 가르칠 과목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천석이 1972년 발간한 '스승'이라는 책자는 출판되자 15만부가 팔렸다는데 나는 그 책을 읽으면서 교사로 살아온 나의 한평생을 크게 반성하였다. 그는 그 책의 서문을 기도로 시작하였다. 교사라는 천직은 십자가를 질 각오가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그는 강조하였다. 그 책은 모든 교사가 마땅히 읽어야 할 책이다. 나도 읽었지만, 전교조 조합원들도 빠짐없이 이 책을 읽었으면 한다. 개정판을 내면서 문교부 장관을 지낸 제자 정원식이 그 스승을 흠모하는 간절한 심정을 간행사에 털어놓았다.
민주 교육의 삼총사 백낙준은 민주주의를 위해 젊은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쳤고 김활란은 민주 정신으로 여성 교육에 전념하여 세계 최대 여자대학을 하나 만들었다. 오천석은 그 모든 민주 교육의 확실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그 삼총사의 활약이 없었던들 대한민국의 교육이 오늘과 같은 틀을 마련할 수 있었을까? 그의 이름 '천석'은 하늘의 뜻을 받들어 백성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주석 지팡이가 되라는 뜻으로 그의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이다. 그의 아호 '천원'은 하늘나라의 꽃동산을 가꾸는 아름다운 일꾼이 되라는 뜻이다. 87년 동안 그는 흔들림 없이 그 외길을 걸었다. 돈과 명예를 멀리하고! 스승의 십자가를 혼자 지고! 오늘도 하늘나라의 꽃밭을 가꾸고 있을 '천원'의 그 부드러운 미소가 무척 그리운 초가을 아침이다. 다시 한 번 그 웃는 얼굴을 보고 싶고야.
1972년 10월 초 대학가에 손바닥만 한 전단이 나돌았다.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주최하는 대강연회가 10월 5일 저녁 5시 30분에 서울 시내 대성빌딩 대강당에서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그 강연회 개회사는 동아일보 천관우가 하고 인사 말씀은 한신대 김재준, 그리고 연사는 함석헌을 비롯하여 세 사람인데 그중에는 내 이름도 끼어 있었다. 천관우는 이 나라 민주주의가 호흡 곤란하던 그 답답하던 시절 우리 모두의 매우 가까운 친구였다.
그는 1925년 충북 제천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 신동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사실이 당시 동아일보에 기사화된 것을 나도 몇십 년 뒤에 읽어 본 적이 있다. 그는 청주고보를 졸업하고 일제 말기에 경성제대 예과에 입학하였다. 해방이 되고 교명과 학제가 바뀌는 바람에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때 쓴 논문 제목이 '반계 유형원'이었다.
6·25가 터진 뒤 부산으로 피란 간 천관우는 '대한통신' 기자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워낙 글 솜씨가 뛰어나 서른이 되기 전에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발탁되었고 2년 뒤에는 조선일보 편집국장 자리에 올라 명실공히 이 나라의 저명한 기자가 된 것이었다. 1963년에는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겨 주필로 활약하다가 '신동아'에 실린 그의 글이 필화로 번져 한동안 자리에서 물러난 적도 있다.
그러다 3선 개헌을 계기로 박정희 독재가 표면화되자 언론인으로서 보고만 있을 수 없다고 판단해 그는 민주화 운동의 일선에 나섰다. 함석헌이 창간한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으로 장준하, 이태영, 계훈제, 법정 등과 더불어 자유 언론 수호에 앞장섰다. 그 잡지에 내가 '용감한 백성이라야 산다'는 제목의 글을 한 편 올렸는데 며칠 뒤에 만났을 때 그는 내 손을 잡고 "매우 무서운 글을 쓰셨습니다. 국민이 모두 안중근 같은 용감한 사람이 돼야 한다고 하셨으니!" 하며 나를 두둔하였다. 군사정권은 드디어 발악하여 유신 체제를 선포하고, 언론을 탄압하였다기보다 봉쇄하기에 이르렀다. 말 한마디 잘못해도 글 한 줄 잘못 써도 남산 중앙정보부의 그 흉악한 지하실에 끌려가 곤욕을 치러야 했던 참담한 세월이었다.
은인자중하며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국사학자 천관우는 두문불출하며 본업인 한국사 연구에 몰두하였다. 특히 고조선과 삼한 시대를 깊이 있게 연구하였고 가야사 발굴에도 기여한 바가 크다. 그가 비록 동아일보를 물러났지만 해직당한 젊은 기자들에게는 '가장 존경받는 언론인'이었고 흠모 대상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신군부가 들어서 그를 국토통일원 고문으로 추대하고 평통자문위원회의 요직을 떠맡기자 젊은 기자들의 태도는 돌변하였다. 한겨레신문의 초대 사장이 된 송건호도 천관우가 변절했다고 공언하였고, 문화일보 사장 남시욱은 내가 은거하던 문경새재에 들렀을 때 "천 선배의 처신이 매우 유감스럽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천관우가 그런 비난을 받게 된 데는 말 못 할 사연이 있었다. 그는 동아일보를 물러날 때 받은 퇴직금을 가지고 서울 어디에 몇 평 안 되는 땅을 구입한 적이 있었는데, 소유권이 복잡하여 명의 변경이 불가능한 줄 모르고 샀기 때문에 팔 수 없는 땅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중앙정보부에서 사람이 찾아와 '그 땅을 천 선생님 명의로 꼭 바꿔 드리겠습니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말에 쉽게 넘어갈 천관우가 아니었다. "당신들 도움을 받으면서까지 그 땅을 찾을 생각은 없어요"라고 그 자리에서 거절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끈질기게 졸랐다. 옆에서 한평생 그를 받들던 부인이 "될지 안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한번 맡겨 보는 것이 어때요" 하며 허락할 것을 은근히 종용하면서 "우리는 앞으로 뭘 먹고 살 겁니까"라고 덧붙였다. 부인은 가난한 살림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약해진 천관우는 그 이상 버틸 수가 없어서 그자에게 한번 해보라고 승낙하였다. 그런데 얼마 뒤에 그 사람은 천관우 명의로 된 완벽한 토지 문서를 만들어 그에게 바친 것이었다.
신문이나 잡지에 게재된 그의 글을 읽어 보면 그가 한때 신동이라고 불릴 만하였다고 느끼게 된다. 명문이고 논리가 정연할 뿐 아니라 은은한 여운도 남긴다. 그러나 그의 재능은 역사학자로서 더 두드러졌다. 연세대 사학과 교수 홍이섭, 민영규, 손보기 등이 천관우를 연세대에 데려가려 합의를 보았지만 남산의 호랑이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젊은 기자들을 거느리고 편집국장으로, 주필로 일하면서 밤늦게까지 술을 마셔야 하는 힘겨운 나날을 보냈다. 살림만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의 건강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의사의 무서운 경고를 받았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그는 60대도 다 살지 못하고 그 고달픈 일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저서가 여러 권 있지만 그중에서도 '한국사의 재발견'은 나의 애독서이다. 1974년 출간되자마
자 안양 교도소에서 즐겁지 않은 나날을 보내던 나에게 곧 전달되었다. 이 책에는 '도서 열독 허가증(74년 10월 21일)'이 붙어 있고 나의 수인 번호 '95'와 내 이름 석 자가 적혀 있다. 그의 얌전한 교사 출신 부인과 예쁜 외동딸은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궁금하지만 알아볼 생각도 못 하고 나는 나이만 먹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다.
산나물 같은 사람을 찾아 헤매던 시인 단지 사나운 표범에 쫓겨 일제와 인민군 지지했을뿐 놀란 사슴 같은 슬픈 눈빛 사무치게 그립고야
시인 노천명은 1911년 9월 황해도 장연에서 잘사는 집의 딸로 태어났다. 오빠도 있고 언니도 있고 동생도 있어서 매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태어날 때 부모가 지어준 이름은 '기선'이었는데 여섯 살 때 지독하게 홍역을 앓아서 20일이나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살아났다. 성당에 다니던 부모는 그를 살린 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믿고 그 딸의 이름을 '천명'이라고 고쳐 호적에 올렸다.
내가 아는 노천명은 항상 외롭고 쓸쓸하였다. 나는 그의 두 눈을 볼 때마다 순진한 사슴 한 마리의 근심 어린 두 눈을 연상하였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노천명의 '사슴'의 첫 절은 그의 사람됨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한마디이다. 내가 그를 가까이 알게 된 것은 이화여대 김활란 총장의 가장 가깝던 친구 이정애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김 총장이 그 친구에 대한 추억을 모아 책을 한 권 만들고 싶다면서 시인 노천명과 뒤에 프랑스 공사를 지낸 이화여대 불문과 교수 최완복, 나를 불러 그 일을 맡기면서다.
우리 세 사람은 가끔 만나서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두 사람과 나는 나이 차이가 어지간하였지만 그들의 의견이 서로 충돌될 때에는 젊은 내가 중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일로 하여 노천명은 나를 잘못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책 제목은 '우리 친구 이정애'였는데 출간된 것을 보지 못하고 나는 미국 유학 길에 올랐다. 당시 미국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환송하는 장소가 소공동의 반도호텔이었다. 시인 노천명은 거기까지 와 저도 나도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전혀 모르고 서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천명은 내가 귀국하기 몇 달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미국 유학 중에 나는 노천명의 편지 한 장을 받았다. 그 편지에 적혔던 한마디가 오늘도 그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을 애절하게 만든다. 그는 6·25가 끝나고 이듬해 '나의 생활백서'라는 수필집을 하나 냈다. 피란 시절 어느 아침 부산의 한 재래시장에 들렀다가 시골 아낙네들이 뜯어온 싱싱한 산나물 보따리를 보면서 '산나물 같은 사람은 없는가'라고 그 책에 한마디 썼다고 한다. 그런데 편지에 나를 가리켜 그가 찾던 '산나물 같은 사람'을 드디어 만났다고 써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편지 한 장을 내가 얼마나 소중하게 간직하였겠는가. 그러나 신촌 집을 몇 번씩 뜯어고치면서 내가 집에 없는 동안 그 편지가 들어 있던 허술한 편지 묶음을 영영 잃어 버린 것이다. 누군가가 쓰레기통에 버린 것이겠지.
천명은 일찍이 아버지를 잃었고, 어머니가 가산을 정리한 뒤 서울로 이사 왔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서 소학교를 마쳤고 진명여고를 졸업한 뒤 드디어 이화여전의 문과에 입학하여 영문학 교수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던 월파 김상용에게 시를 배웠다. 여학교 시절부터 그가 선생들과 친구들을 놀라게 한 것은 그의 언어 선택과 구사가 천재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당시의 신문사나 잡지사에 글을 썼는데 순수하다 못해 어리석다고 할 만큼 정치에 무관심하던 노천명은 발악하던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일본을 찬양하는 내용의 한심한 글을 몇 편 쓴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를 친일파로 모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그의 생애에는 비슷한 일이 또 있었다. 인민군이 남침했을 때 미처 피란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가 월북했다 돌아온 임화 등 친북 작가들이 주도하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그들의 궐기대회에도 모습을 나타내 국군이 다시 서울을 탈환했을 때 천명은 구속되어 20년 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그러나 김광섭, 모윤숙 등이 적극적으로 구명운동을 해 풀려났다. 그는 일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저질러 일제 말기에는 일본을 두둔하는 글을 썼고 인민군 치하에서는 그들을 지지하는 발언을 하여 서울이 수복되고 나서는 부역자로 몰려 한동안 영어의 몸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평생 친일파가 되어 본 적도 없고 공산주의자가 되어 본 적도 없고 단지 사나운 표범에게 쫓기는 사슴 한 마리처럼 갈팡질팡하였을 뿐이다.
그런 엄청난 수난을 겪으면서 노천명은 더욱 내성적이 되고 사람들을 멀리하게 되었다. 놀란 사슴 같은 맑은 두 눈을 가지고 인생의 가시밭에 번번이 쓰러져 피를 흘린 것뿐이다. 그는 빈혈로 청량리에 있는 위생병원에 입원했으나 입원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고 그런 처지에 있으면서도 동료 문인들이 성금을 모아 입원비를 대납하겠다고 했을 때 완강히 거부하였다. 친구 하나가 그의 병실에 찾아왔을 때 그는 원고료를 받기 위해 병원 벽에다가 원고지를 대고 원고를 쓰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 달쯤 뒤에 또다시 쓰러져 백혈병이란 진단을 받았지만, 병원에 입원하지 않고 누하동의 허술한 자기 집에서 혼자 요양하다가 1957년 6월 16일 새벽, 한 많은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46년의 매우 짧은 삶이었다. 시인이자 평론가이던 잘생긴 김기림의 끈질긴 구애도 물리치고.
그대의 겁에 질린 그 눈빛을 마지막 본지도 어언 60년의 매우 길고 긴 세월이 흘렀건만 그 처절하게 슬픈 눈빛이 이 글을 쓰는 어제도 오늘도 사무치게 그립고야.
♣ 바로잡습니다 ▲9월 1일 자 B2면 '김동길의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노천명'에서 노기남 대주교는 시인 노천명과 친척 관계가 아니므로 바로잡습니다.
‘원로 주먹’ 조창조, 자전적 소설 ‘전설’ 출판기념회 전국 조폭 1000여 명, 전직 총리 장관도 참석 경찰 "오버 말라" 경고에 "아우들 빠져라" 몸 사렸지만...
"자~ 오늘은 온화하고 고급스럽게 합시다. 의전 중인 아우들은 전부 밖으로 빠져주세요." 30일 오후 서울 중구 장충동 그랜드 앰배서더 서울 호텔로 짧은 머리에 검은색 양복, 건장한 체격의 사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20~30대 젊은이들은 가슴에 ‘STAFF’(스태프)이라고 적힌 이름표를 달았다. 벤츠·BMW 등 고급 외제승용차가 쉴 새 없이 들어왔다. 한쪽에선 관광버스에서 우르르 내리더니 줄을 맞춰 들어갔다.
2층 그랜드볼룸에 올라서니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중년들이 가득했다. 500여 석 원탁 테이블은 빈자리 없이 빼곡했다. 백발의 곱슬머리 사내가 들어서자 모두 허리를 90도 숙여 인사했다. "형님 건강하십시오", "형님. 오래오래 사십시오" 소리가 이어졌다. 주먹계 ‘큰형님’으로 불리는 조창조(80)씨였다. 이날은 그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 ‘전설’ 출판기념회 겸 팔순 잔치. 하객은 1000명도 훨씬 넘어 보였다. 가족과 고교동문, 정·관계, 문화·예술계 인사가 여럿 참석했지만 대부분은 ‘주먹들’이었다.
◇전·현직 두목급 주먹들 한자리에 오후 2시쯤 사회자가 행사 시작을 알리며 "아우들은 빠져달라"고 하자, 테이블마다 2~3명씩 서 있던 젊은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나갔다.
‘국기에 대한 경례’로 행사는 시작됐다. 축가로 드라마 ‘야인시대’ 주제곡이 연주됐다. 이어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의 축사가 이어졌다. 그는 축사에서 "조창조는 이 시대를 사는 가장 사나이다운 사나이"라고 했다.
서울과 부산, 대구, 광주, 전주, 마산 등 전국에서 이름만 대면 알만한 두목급들이 대거 참석했다. 70년대 서울 명동을 장악했던 신상사파 신상현(84)씨와 부산 칠성파 이강환(74)씨는 축전을 보냈다. 드라마 ‘야인시대’에 출연했던 배우 정일모씨는 ‘연예계의 협객’이라고 소개됐다. 1987년 이른바 통일민주당 창당 방해사건인 이른바 ‘용팔이 사건’ 주범이었던 김용남(68·목사)씨도 VIP석에 앉아 있었다. 행사 진행 관계자는 "경찰이 조폭들 모임처럼 보이지 않게 하라고 여러 차례 경고를 해서 현역(조폭)들은 상당수 참석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날 경찰도 긴장감 속에 행사를 지켜봤다. 서울경찰청 광역수사대와 서울 중부경찰서에서 형사 30여 명이 투입돼 행사장과 호텔 주변을 살폈다. 경찰 관계자는 "명목상 출판기념회라 제재할 수는 없지만, 조폭들이 90도 인사를 하는 등 다른 호텔 이용객들에게 위협감을 주는 행동들을 자제하라고 권고했다"고 했다.
◇이수성·최시중 등 정·관계 인맥도 과시 조창조씨는 시라소니(이성순) 이후 맨손 싸움의 1인자로 불린 원로 주먹이다. 김두한을 ‘곰보형’, 이성순을 ‘시라소니형’이라고 부르니 우리나라 주먹계 2세대쯤 된다. 1938년 평양에서 태어나 광복 직후 8살 때 월남했다. 서울 종로의 덕수초등학교를 다니던 중 사업하는 외삼촌이 있던 대구로 갔다. 학창시절을 보낸 대구가 사실상 고향이 됐다. 마침 6·25전쟁을 맞아 또래들보다 2년 늦게 진학했다. 중학교 시절부터 복싱과 유도, 씨름을 즐겨했고, 그때부터 싸움판에서 진 적이 없었다. 고교 시절엔 이미 ‘대구 최고의 주먹’으로 알려졌다. 일본말로 ‘어깨’를 뜻하는 ‘가다’라고 불렸다.
고교 졸업 후 상경해 서울 염천시장에 터를 잡았다. 시장 내 소매치기와 거지들을 내쫓으며 상인회 경비대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무교동 일대 호남 출신 폭력배들의 ‘큰 형님’으로 불리며 명동 신상사와 함께 서울 양대 주먹으로 불렸다. 1975년 1월 2일 한참 후배였던 조양은(68)씨가 호남 출신들을 이끌고 사보이호텔에 있던 신상사파를 공격한 ‘사보이호텔 습격사건’의 배후로 지목됐다. 조씨는 당시 조양은씨의 뒤를 봐주면서 결국 조씨를 검찰에 자수시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사건은 영화에 나오듯 회칼과 각목이 등장하고, 폭력배들의 죽고 죽이는 이른바 ‘전쟁’이 시작된 계기가 됐다.
1987년 대선 때 노태우 후보의 사조직인 태림회에서 활동했고, 1991년에는 경북 김천관광호텔 살인 사건 배후로 지목돼 안동교도소에서 8년간 복역했다. 당시 주임검사가 박근혜 정부 시절 민정수석을 지낸 고(故) 김영한 수석이었다. 2015년에는 ‘조희팔 다단계 사기 사건’에 연루돼 검찰 조사를 받았으나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조씨와 의형제를 맺고 지낸다는 이수성 전 국무총리와 조씨의 대륜고 3년 선배인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이재오 전 특임장관, 이의익 전 대구시장 등이 참석했다. 주호영 자유한국당 의원과 조재구 대구 남구청장, 박팔용 전 김천시장, 배우 김용건씨 등은 축하 화환이나 축전으로 대신했다. 이 전 총리는 "과거 일본 야쿠자로부터 테러 위험이 있었는데, 조창조 회장이 소리소문없이 일을 처리해줬다는 이야기를 한참 후에 들었다"며 "그만큼 조 회장은 자기가 한 일도 감추며 알아서 도와주는 의리 있는 사나이"라고 했다.
서울에서 경비용역업 등에 관여하던 조씨는 그동안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생활했다. 그러나 이날 행사를 끝으로 대구로 삶의 터전을 옮긴다고 했다.
◇일대기 그린 영화제작도 준비 중 이날 소개된 소설 ‘전설 – 최고의 사나이 조창조 1부(3권)’는 웹툰 강남화타, 소설 고고학자 등을 쓴 작가 묘재(妙才·필명)가 썼고, 형제기획(대표 이명재)이 펴냈다.
어린 시절을 주로 다룬 1부에서는 1960~1970년대 시대상을 비롯해 거지왕 김춘삼, 명동칼국수 창업자 등 실존 인물과의 숨겨진 인연을 소개했다. 또 곳곳에 격투장면이 묘사된다. 1975년 ‘사보이 호텔 습격사건’이 발생하기 직전까지 이야기만 담았다. 주먹 세계에서 가장 충격적인 사건으로 회자되는 이 사건의 전말은 2부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조씨는 당시 무교동 호남파와 명동 신상사파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일어난 배경, 그 과정에서 왜곡된 진실, 알려지지 않은 뒷이야기 등을 낱낱이 공개할 예정이라고 한다.
소설 원작을 바탕으로 조창조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제작도 준비 중이다.
기획사 관계자는 "현재 1차 시나리오 작업을 마친 상태로, 시나리오 보완 작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조창조씨는"먹고 살기 어려웠지만, 우리 때는 사내들이 맨주먹으로 싸우는 낭만이 있는 시대였다. 건달들도 힘없는 사람들 괴롭히지 않았고, 싸우고 나면 먼저 손 내밀어 화해를 청하는 멋이 있었다"며 "지난 시절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역사적 인물의 이름에는 직함이나 존칭을 붙이지 않는 것이 원칙이므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정주영은 이 시대를 살고 간 특이한 인물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현대'라는 기업을 뺄 수 없다면 그 기업을 일으킨 창설자가 역사에 남을 인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아마도 그는 보통 사람인 우리와는 전혀 다른 손금을 쥐고 나왔을 텐데 나는 그의 손금을 본 적은 없다.
나는, 정치를 시작하여 정치 일선에서 밤낮으로 같이 지내던 시절의 정주영만 알 뿐이지, 그가 어떻게 현대를 시작했고 어떻게 현대를 키웠는지는 아는 바가 없다. 그는 1992년 봄이 되기 전 어떤 추운 날, 나를 시내 모처에서 만나고 싶다는 전갈을 보내왔다. 기업으로 크게 성공한 그가 대학에서 한평생을 보내고 은퇴한 나를 왜 보자고 하는지 그 뜻을 잘 모르고 만났다. 그는 같은 내용이 적힌 서류 2통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가 썩으니 기업을 하기도 어렵습니다. 돈은 내가 벌어서 가지고 있으니 우리가 힘을 합하여 정치를 바로잡는 일을 한번 해 봅시다." 그 서류는 정주영과 김동길이 의형제를 맺는다는 내용이었는데, 의형제가 되는 것을 문서로 밝힌다는 일이 내게는 생소한 경험이었다. 그는 문서 2통에 이미 자기 도장을 찍어 와서 나에게도 날인할 것을 요구했고 나는 오른손 엄지손가락으로 지장을 찍었다. 우리가 나눠 가진 그 문서 한 장은 내가 여러 해 간직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의형제 문서'에 지장을 찍다
그 자리에서 정주영은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 "이제 머지않아 대통령 선거가 있을 터인데 우리가 만드는 당의 대통령 후보는 국민 사이에 인기가 좋은 김 교수가 나가야지요." 나는 그에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고 말하지 않고 묵묵히 담벼락만 보고 앉아 있었다. 그 후 곧 통일국민당이라는 새로운 당이 출범했고 그는 당대표가 되었고 나는 최고위원이 됐다. 그 신당은 현대의 그 많은 직원을 동원해서 날마다 활발하게 움직여 그해 3월 총선에서 지역구와 전국구를 합해 31명을 당선시켰고, 나는 서울 강남갑에 출마해서 당선됐다. 그리고 우리 당은 그해 12월에 실시될 대통령 선거 후보를 선출하기 위한 후보 지명 전당대회를 5월로 예정하고 있었다.
전당대회를 며칠 앞두고 정주영은 내가 빌려서 살던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로 혼자 찾아와 대뜸 이렇게 말했다. "김 교수,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어야 해요." 엉뚱한 이야기를 들은 내가 "나이도 이제 60이 넘었고 결혼할 때는 지났습니다" 하고 대답했더니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김 교수도 결혼해서 가정이 안정되어야 해요. 김 교수가 결혼한다면 내가 200억은 줄 수가 있는데." 나는 분명히 대답했다. "앞으로 내가 결혼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입니다."
그다음 날 이른 아침 광화문 당사에서 만났을 때 그는 내게 말했다. "이번 대통령 선거에는 아무래도 내가 나가야겠어요. 나는 이번밖에 기회가 없지만 김 교수는 아직 나이가 있으니까 다음 대선에 출마해도 될 겁니다." 나는 그 말의 뜻을 파악하려고 망설이다가 단 한마디도 따지지 않고 "그럼 그렇게 하시지요"라고 대답했다. 당대표였던 그는 나의 그 한마디로 통일국민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후보 지명 전당대회에서 김광일 당원과 이주일 당원이 각각 발언했다. "왜 약속한 대로 하지 않고 정 대표 자신이 대통령 후보로 나가십니까?" 그러나 내가 반발하지 않는 한 당대표가 대통령 후보로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결혼하면 200억 주겠다" 약속
대선 투표 바로 전날 효제국민학교 교정에서 마지막 선거 유세를 할 때까지도 통일국민당 후보에게 전달되는 쪽지들의 내용은 미국 CIA나 그 나라의 방송사 CNN의 여론조사 결과가 한결같이 정 후보의 당선이 확실하다고 점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미국 CIA와 CNN이 무엇 때문에 그토록 한국 대선에 관심이 많은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그것이 그날 밤 상황이었다. 그다음 날 밝혀진 대선 결과는 정 후보 주변 사람들의 추측이나 보고와는 정반대였다. 통일국민당은 참패를 면치 못했다.
정주영이 14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김영삼으로부터 호되게 당한 것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는 여당으로 들어간 김영삼에게 "군인들이 당신에게 대통령 후보 자리를 줄 가능성이 전혀 없으니 내가 정당을 만들면 우리 당 대통령 후보로 나가세요" 하고 권면한 사실이 있다. 같은 대통령 후보가 되어 자신을 압박한 정주영을 김영삼은 용서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 멀지도 않을 어느 내일,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낯선 땅에서 정주영을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만나면 그의 손을 꽉 잡으면서 "형님, 오래간만입니다. 그동안 편안하셨나요"라고 한마디 하고 난 뒤 "그런데 형님은 통일국민당이라는 무거운 짐을 내 어깨에 지워놓고 이 동생을 왜 단 한 번도 알은척하시지 않았나요?" 하고 물을 것이다. 물론 그는 웃고만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누가 뭐라고 해도 '현대의 기적'을 창출한 정주영은 이 시대의 영웅이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김동길의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내가 만난 현대사의 거인들… 감히 그들을 말한다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평가는 역사가의 몫… 평생 일관해 온 철학… 편견 배제한 비판을
김동길
발행일 : 2017.11.11 / Why B3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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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표 지성인이자 정치·시사평론가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가 '김동길 인물 에세이―100년의 사람들'을 연재한다. 올해 구순(九旬)을 맞은 김 교수는 거의 1세기에 걸쳐 대통령부터 코미디언까지 수많은 한국인과 직접 교류해 왔다. 김 교수는 매주 이들을 한 명씩 소개하며 한국의 지난 100년을 되돌아볼 예정이다.
한평생 만난 사람들 가운데 한마디씩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이들을 골라서 내 의견을 짧게 적어 달라는 부탁을 예전부터 받아왔다. 도대체 내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볼 때 남기고 갈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그런 부탁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의 이력서'니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이니 하는 제목의 글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내 생각에는 남길 필요 없는 이야기들이 태반인 것 같아서 그런 요청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에게는 누님이 한 분 계셨는데 대학 총장 자리를 18년이나 지켰다. 그가 아직 임기가 남아 있는 그 자리에서 물러날 때 동생인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총장 노릇을 한 학교에서 20년 가까이 하다 보니 어떤 교수가 총장실을 찾아와 무슨 얘기를 하건 내가 다 아는 이야기일 뿐, 별로 신통한 이야기로 들리지가 않았다. 이런 지경에 왔으니 이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믿는다." 나는 누님의 그 말을 들으면서 총장 자리를 자진하여 물러나는 모습에 찬사를 보냈었다. 누님은 자서전을 쓰라는 요청을 거절하면서 이런 말도 했다. "과거를 돌이켜 보니 잘못한 일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고 잘했다고 여겨지는 일들만 생각나니, 그런 일들을 적어서 남긴다는 것이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누님은 정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나도 남길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인생을 살고 언젠가 그렇게 떠나갈 것이라고 믿는다.
인물평은 결국 역사가의 몫
내가 100년 가까이 살면서 만나 본 사람들은 많지만 그중에서 몇 사람을 골라 평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뭐라 해도 이미 세상 떠난 분들은 할 말이 없겠지만 아직 살아 있는 분 중에는 항의할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어떤 인물에 대한 평가가 나와 딴판인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게다가 "가까이 지낸 아무개 이야기는 왜 안 쓰십니까?"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대답하기 곤란하지 않을까?
나의 무례한 모습을 본 사람도 더러 있을 수 있지만 나는 한평생 예의를 지키며 살고자 노력했다. 선배나 후배에게 될 수 있는 대로 무례한 언행은 삼가면서 살아왔다. 그러니 이 나이가 되어 가까이 알던 이들에게 실례되는 말을 할 리가 없다. 그러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 있지 않은가. 바보를 철학자로 잘못 볼 수도 있고 한심한 졸장부를 영웅호걸로 잘못 알 수도 있다. 그런 의견 차이 때문에 나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싶지는 않다. 인물에 대한 궁극적인 평가는 한 시대를 같이 산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역사가들에게 맡겨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은 보다 넓은 시야에서 보고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을 존중할 수밖에 없다.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무엇인가? 내가 만난 사람들에 대하여 느낀 바 또는 받은 인상을, 그들의 사람됨을 솔직하게 묘사해 보겠다는 말밖에는 할 수 없다.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평가도 아직 제대로 하기 어렵다고 한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함께 살아온 사람들에 대한 평이 매우 공정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 아닌 것과 싸워온 한평생
나의 조상은 대대로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살아왔다. 나의 본관은 풍천(豊川)인데 그 성을 가지고 조선조에 벼슬을 한 사람이 꼭 한 분 계셨다. 그렇게 보잘것없는 족보를 가지고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 영국 시인 토머스 그레이의 말을 빌린다면 "보잘것없이 단순한 이력밖에 없는 사람들의 후손"이라고 하면 족할 것이다. 내가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나의 부모가 정직하게 살아온 선량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매우 평범한 후손일 뿐이다.
평범한 혈통에서 태어난 나는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다. 90년을 살면서 역사에 남을 만한 일을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방된 조국 땅에서 지적으로 성장한 셈인데 김일성이 주도하던 속칭 공산주의가 숙청이라는 미명하에 수많은 동족을 가둬 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리며 잔인하게 다루는 현실을 보고 평양을 탈출해 3·8선 이남으로 월남한 사람이다. 나는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배우고 익히며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의 철학은 자유 아닌 것, 민주주의 아닌 것과 맞서 싸우는 것일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가 서기 전에도 그러했고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그러했다. 6·25사변 때도, 9·28 수복 때도, 자유당이 장기 집권을 감행하던 때도, 군사 쿠데타가 벌어지던 때도, 18년 군사독재가 지속되던 때도 나의 철학과 가치관은 한결같이 자유를 숭상하고 독재를 미워하는 입장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대학교수라는 신분에 유신헌법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군사재판도 받고 징역 15년에 자격 정지 15년이라는 엄청난 형벌을 받기도 했다. 그런 정권을 상대할 이유가 없다고 믿고 항소를 포기하고 안양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특별사면으로 출옥한 지식인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내 가치 판단의 기준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즉 나의 인물평은 한결같이 민주적 시대정신에 입각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편견으로 비판하지는 않겠다
대통령 선거에서 어느 후보가 당선되어 대통령 자리에 오른다 해도 내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볼 때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는 사람은 5년 동안 한 번도 그 이름 뒤에 대통령이라고 붙여서 불러본 적이 없다. 상식에 벗어난 일이라고 탓할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평생 만난 사람들을 두고 무슨 소리를 어떻게 하게 될지 나 자신도 잘 모른다. 그러나 원칙 한 가지는 있다. 그가 살아 있건 이미 저세상에 갔건 편견 어린 비판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인물을 골라 평가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사람과 의논해서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에 미리 무슨 말을 하기도 어렵다. 100년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 아는 이가 많을 것이라는 신문사의 추측은 틀리지 않지만 깊이 있게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친숙한 사람이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어찌 생각하면 노인이 기억을 더듬어 우리 사회에 조그마한 공헌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최선의 노력을 다할 생각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인물에 대한 평가는 한결같기가 어렵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는 엇갈린 의견이 있을 수 없지만 태종이나 세조에 대하여는 상반된 견해가 나올 수도 있다. 일제하 역사를 놓고도 안중근이나 이봉창이나 윤봉길 같은 의사들에 대한 평가는 엇갈릴 수 없지만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엉뚱하게 다를 수도 있기 때문에 평하기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에 대해서도 무슨 말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내 입장도 그렇지만 신문사 입장이 난처해질 수도 있다. 예컨대 대통령을 지낸 전두환이나 노태우에 대해 좋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내 주변에도 많다. 김대중에 대한 견해도 그렇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이 잘못한 일을 난들 왜 모르고 지냈겠는가? 그러나 지구 상 어떤 인물도 잘못한 일만 들추어내면 잘한 일은 단 한 가지도 밝혀내기 어렵다. 어떤 인물이 잘못한 일들을 지적해 달라고 하면 글 쓸 용기가 나지 않지만 내가 익히 아는 잘한 일들을 열거해 달라고 하면 응할 준비가 돼 있다. 고려 말 선비 이색이 어지러운 세태를 바라보며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하고 탄식한 바 있는데 나의 심경이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 하노라면 한 줄의 글도 쓰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그런 틈바구니에서라도 자기 의견을 털어놓고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하는 것이 배운 사람의 책임이 아니겠는가?
백년 가까이 살고 보니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 중에 오늘도 매우 그리운 이들이 있고, 아직 살아 있어도 만나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인간관계에도 '궁합'이 있어 맞는 사람이 있고 안 맞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남들도 다 좋아하리라고 생각할 수도 없고 내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세상이 다 싫어할 것이라고 믿을 수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 사이에 어떤 넘지 못할 담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런 말을 구구하게 늘어놓는 이유는, 90이 되기까지 살고 보니 인생사가 모두 그렇고 그런 것 아니겠는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너그럽게 읽어주시기를 감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