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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세 일기. 여자 친구들이 다 도망갔다

빠꼼임 2018. 9. 28. 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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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목요일 오후였다. 원고를 정리하다가 머리가 무거워지는 것 같아 뒷산을 거닐었다. 오래된 습관이다. 지난밤까지 내린 비 때문일까, 산과 숲 전체가 생기에 넘치고 있었다. 언덕 위를 지나면 나무의자에 앉아 쉬곤 한다.

오늘은 나이 들어 보이는 신사가 먼저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나가려고 하는데 그 노인이 일어서면서 "선생님, 이렇게 오르내리는 산길인데 힘드시지 않으세요?"라며 인사를 했다. 신과대학을 은퇴한 M교수였다. M교수와 나는 70년간 사제 관계를 이어온 사이다. 중앙학교 때 담임을 했던 제자였고, 연세대에서도 내 강의를 들었다. M교수가 학위를 받은 후에는 나와 함께 교수 생활을 했다. 그런 과거였기 때문에 지금도 흠 없이 지내면서도 남달리 예의를 갖추고 지내는 제자이다.
대화를 나누다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회 E목사가 연대 출신이던데요?"라고 했더니 "예, 제가 가르친 제자입니다"라는 것이다. 그 교회의 신도만 해도 수만 명인데, 그런 목회자를 많이 길러 낸 M교수가 나보다 더 많은 후배를 키웠다는 생각을 했다. 칭찬하고 싶었는데, 그런 M교수가 내 제자이니까, 사실은 내가 더 자랑스러워진 것 같기도 했다. 내 생각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M교수가 "선생님, 제 제자의 제자가 벌써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께서는 가정으로 따지면 증조할아버지 격의 스승이십니다"라면서 좋아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다. 부자 관계는 30년 전후가 대를 잇기 마련인데, 사제 관계는 20여 년이면 뒤를 계승할 수 있다. 그러니까 나는 가정에서는 증손주까지 있는 셈이지만 대학에서는 4대를 이어온 고조부 스승이기도 하다.

제자와 헤어져 혼자 산책을 하면서 옛날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M교수는 나보다 키가 작은 편이다. 그 옆자리에는 외무장관이었던 변영태의 아들 혜수군이 앉아 있었다. 변군은 내 뒤를 이어 철학을 전공했다. 후에는 미국 뉴욕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한번은 "중앙 학생 때는 선생님을 대하면서 철학자가 근사하게 보여 철학 공부를 했는데 교수가 되어 나 자신을 보니까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라면서 웃었다. M교수가 내 신앙을 계승했다면 변 교수는 철학을 이어준 고마운 제자이다.

내가 중앙학교에 머문 기간은 길지 않았다. 그런데 국내와 미국 등지에서 교수가 된 제자가 20명이 넘는다. 토론토 대학의 윤택순은 한국인 최초의 캐나다 정교수(물리학)가 되었다. 서울대 국어학 의 주축을 차지한 이기문, 김완진 교수도 중앙학교 때 제자다. 춘원의 아들인 이영근 교수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혈통을 밝히는 DNA 검사를 하듯이 스승과 제자의 정신과 인간적 인과를 밝히는 검사법이 개발된다면 교육계 4대에 걸친 내 직간접 제자의 수는 엄청날 것이다. 뉴질랜드 인구보다 많을지도 모른다. 교육자가 되기를 잘했다. 오래 살기도 잘한 것 같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19/2018101902138.html

 

 

[Why] 이기붕의 선택이 주는 교훈

조선일보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10.13 03:00

[김형석의 100세 일기]

[김형석의 100세 일기]

서울 광화문으로 가던 버스가 서대문 농협박물관 앞에 멈춰 섰다. 길 건너편을 바라보았더니 '4·19 기념도서관' 건물 간판이 눈에 띄었다. 4·19 전에 있었던 이기붕 일가의 알려지지 않은 일이 생각났다. 그 당시 이기붕의 비서였던 한글학자 한갑수로부터 들은 얘기다.

자유당 시절 이승만 대통령의 후계자로 알려지고 있던 이기붕은 건강이 좋지 못했다. 정치적 격동기를 겪으면서 건강 악화를 참아오던 이기붕은 비서 한갑수에게 이렇게 지시했다. "비밀이니까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고 이번 토요일 오전 10시에 중대 성명이 발표될 것이라고 언론에 알려라. 그리고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정계에서 은퇴한다는 성명서를 준비해라."

지시를 받은 한갑수가 성명서를 작성해 결재를 받았다. 토요일 10시에 자신이 대독할 예정이었다. 이기붕은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두 사람만의 비밀이었다.

토요일 9시쯤 되었을 때였다. 자유당 강경파로 알려져 있던 세 사람이 찾아왔다. 이기붕에게 "무슨 성명이냐"고 물었다. 세 사람은 정치적 혼란을 해결하기 위한 내용일 것으로 기대했던 모양이다. 이기붕은 한 시간 후에 알려질 내용이기 때문에 '정계를 떠나기로 했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그 얘기를 들은 세 사람이 "연로한 대통령을 위해 꼭 필요한 시기에 그렇게 은퇴하면 이승만 박사는 어떻게 되고 이 난국을 누가 책임지느냐"고 항의하면서 한갑수 비서에게 그 성명서를 보자고 했다. 이기붕의 허락을 받고 보여주었다. 한 사람이 성명서를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며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라고 만류했다. 성명 발표는 무기한 연기한다는 내용으로 바꾸어 버렸다. 이기붕도 세 사람을 설득하지 못하고 "알아서 하라"는 말을 남기고 뒷방으로 들어갔다.

시민들과 정계 인사들은 어떤 중대한 발표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가 아무 소식도 얻지 못했다. 다섯 사람의 숨겨진 사건으로 끝난 셈이다. 한갑수는 나에게 '이기붕은 큰아들(이강석)을 양자로 입적시킬 정도로 이 박사와 인연을 맺었고, 부인 박마리아 여사에게도 알리지 않았던 정계 은퇴 결심을 실제로 단행하기에는 정권에 대한 애착이 남아 있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뒤이어 4·19 사건이 벌어졌다. 피신할 곳이 없었던 이기붕 가족은 전방의 한 사단장에게 은신처를 요청했으나 뜻대로 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경무대(지금의 청와대)로 찾아갔다. 이 박사도 환영할 처지가 못 되었다. 한쪽 방 을 얻어 머물려고 했다. 그러다가 이강석의 뜻에 따라서 가족을 총으로 쏘고 자결하는 비극으로 끝났다. 그때 찾아온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두 사람은 영어(囹圄)의 신세가 되었다.

나는 당시의 일들을 회상하면서 '역사는 과거가 현재를 결정지어 주지만 현재는 언제나 선택의 가능성을 열어 준다. 그 가능성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12/2018101201836.html

 

[김형석의 100세 일기] 여자 친구들이 다 도망갔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발행일 : 2018.09.22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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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가 알려지면서 몇 안 되던 여자 친구들이 다 떠나버렸다
제자가 놀려 주었다 "꼬부랑 할머니들이 지팡이 짚고 찾아올지 누가 알아요?"

지난달 말 금요일이었다. 차편이 생겨 오래간만에 예술의전당을 찾아갔다. 화가 샤갈의 전시회를 보기 위해서다. 오래전 모딜리아니 때만큼 인상적이었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했다. 샤갈의 그림에는 언제나 이야기가 있고 향수가 넘친다. '비테프스크 위에서' 그림은 더욱 그랬다. 전시를 보고 출판을 기념하는 저녁 회식장으로 갔다.

작년에 불광동 성당에 갔는데 본당 입구에 내 강연 주제인 '독서하는 국민이 되자'가 쓰여 있었다. 그날 나는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일본 등 다섯 나라의 문화 혜택을 받아 인류가 밝은 문화의 햇볕 밑에 살고 있다. 우리나라는 일본이나 중국과 더불어 아시아 문화권을 이끌어 갔으면 좋겠다. 그 기초 작업은 간단하다. 국민의 절대 수가 100년 이상 독서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먼저 소개한 다섯 나라가 그러했다고 보는 것이 내 생각이다"고 말했다.

2년 전에 '백년을 살아보니'를 출간했는데, 15만 부 이상 팔렸다. 내가 감사히 생각하는 것은 50~60대 장년층이 책을 읽는다는 사실이다. 그 뒷받침을 하고 싶어 다시 '행복예습'이라는 신간을 내놓았다. 내용과 수준은 먼저 책보다 약간 높은 것 같다. 그 출판을 기념해 출판사가 베풀어 주는 저녁식사 자리에 도착했다.

조촐한 모임이었다. 10명 정도의 출판사 실무진이 기다리고 있었다. P상무가 "'백년을 살아보니'가 많은 독자에게 사랑받아서 감사하며, 이번 책은 내용이 풍부하고 흥미롭기 때문에 더 많은 독자가 애독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인사를 했다. 다들 내 표정을 지켜보았다. 한마디 할 것으로 기대했을 것이다.

나는 "그 말씀은 사실입니다. 출판사에도 도움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자인 나는 얼마나 큰 손해와 타격을 받았는지 모르실 겁니다. 우선 내 나이가 백 세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몇 명 안 되던 내 여자 친구들이 1~2년 동안에 다 떠나버리고 말았어요. 이제부터는 혼자 외롭게 고독을 이겨내면서 여러분의 행복을 원해야 하는 심정과 처지는 모르시지요?"라고 했다. 모두 웃었다. 내 눈에는 아직 어려 보이는 한 여직원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표정이었다.

식사를 끝내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다. 동행했던 제자가 "선생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백 살 넘은 꼬부랑 할머니들이 지팡이를 짚고 찾아올지 누가 알아요?"라며 놀려 주었다. 나는 웃으면서 "백 살이 되니까 그런 옛날의 꿈은 다 사라진 것 같아요. 지금 바라는 것은 좀 더 많은 사람이 내 책을 통해 행복해졌으면 감사하겠어요"라고 했다. 나 한 사람의 행복보다는 독자들의 행복이 더 소중하기 때문이다.

 
 

기고자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장르 : 고정물
본문자수 : 1303

 

 

[김형석의 100세 일기] 나이 60에 수영을 시작했다

1년 더 지나 100세 되면 나도 지팡이 짚고 나서야 하나 아직은 괜찮다… 지금도 일주일에 사흘 수영한다

김형석


발행일 : 2018.03.10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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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 교수의 '100세 비법' 공개합니다

99세 철학자인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의 100세 일기를 시작합니다. 몸과 영혼의 건강을 위해 이 백수(白壽)의 노학자가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구체적으로 공개합니다. 첫 회는 왜 내가 선택한 운동은 등산이나 테니스가 아니라 수영이었나.

60세를 앞두면서부터는 건강을 위해 한 가지 운동은 필수적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내 경우는 등산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긴 시간을 잡아야 하기 때문에 단념했다. 정구를 시도했으나 장소와 시간뿐 아니라 짝이 있어야 한다. 시작했다가 중단했다. 혼자서 시간의 구속을 받지 않는 운동을 찾다가 수영을 만났다. 50대 후반부터 시작했으니까 40년 가까이 계속한 셈이다.

남산에 있는 체육관으로 갔다. 언제나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거의 빼놓지 않고 수영을 즐겼다. 물속에 들어가 있는 시간은 30분 안팎이다. 그리고 무릎 관절을 위한 다리 운동도 하는 게 보통이다.

외국에 여행을 갈 때도 수영장이 있는 호텔을 정했다. 수영은 누적된 피곤을 풀어줄 뿐만 아니라 하고 나면 새로운 정신적 작업을 할 의욕이 솟았다. 그러는 동안 아흔 살이 됐다. 남산은 집에서 거리도 멀고 자동차와 운전기사도 떠나게 되면서 수영장을 옮기기로 했다. 그런데 90이 넘으니 어디에서도 회원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내 아들이 이곳저곳을 알아보다가 서대문구청에서 운영하는 문화회관을 소개받았다. 마침 늙은이들을 위한 효도 수영이 마련돼 일주일에 세 번은 정해진 시간에 이용할 수 있었다.

구민증을 보여주고 신청서를 작성했다. 여직원이 "73세를 왜 93세로 적었느냐"며 73세로 정정해 쓰면서 회원 카드를 만들어줬다. 90세가 넘은 사람은 회원 자격이 없을 테니까 내 얼굴을 보면서 73세쯤으로 여겼던 모양이다. 93세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쫓겨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나는 속으로 걱정했다.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까 봐 숨어 다니다시피 수영장에 다니는 동안 또 4~5년이 지났다. 이제는 마음 편히 다니고 있는데, 내가 누군지 알려지기 시작했고 나이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고려대 철학과 출신 부부가 체육관에 나오면서 들통이 난 모양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일주일에 사흘씩 오후에 수영을 하며 혜택을 받고 있다. 직원들은 알면서도 묵인해주는 것 같다. 100세가 다 된 노인이 불쌍해서 모르는 체하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

나는 후배들이나 아는 사람들에게 60대가 되면 건강을 위해 적당한 운동을 하라고 권고한다. 운동을 한 사람과 하지 않은 사람은 80대쯤 되면 확연히 다르다. 나는 중학생 때 자전거 통학을 했기 때문에 그 운동이 도움이 되었다고 믿는다. 오늘의 도시인들은 자동차를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다리 운동이 부족하며 관절 질환이 먼저 찾아온다. 수영은 물속에서 다리 운동을 겸할 수 있어 전신운동도 되고 하반신과 다리 관절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1년이 더 지나 100세가 되면 나도 지팡이를 짚고 나서야 하나 하는 걱정을 가끔 한다. 아직은 괜찮다. 수영의 혜택을 감사히 생각한다.

조금 더하고 싶을 때 그만두는 것이 오래 즐겁게 운동을 계속하는 비결이다. 나는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게으르거나 일을 외면하는 사람은 건강하지 못하며 인생의 가치도 상실하게 된다. 일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회에 기여한다는 뜻이다. 운동은 건강을 위해 필요하듯이 건강은 일을 위한 전제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기고자 : 김형석
본문자수 : 1780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김형석의 100세 일기] 아침 6시반 토스트 반 조각

아침에 우유 한잔, 계란 하나, 토스트, 호박죽, 과일, 커피…

김형석


발행일 : 2018.03.17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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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6시 30분이 되면 조반을 먹는다. 아는 사람들은 혼자 지내면서 왜 그렇게 이른 시간에 식사를 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내게는 이유가 있다. 최근에는 우리 사회에도 조찬 모임이 많아지는 추세다. 바쁜 사람들이 아침 시간을 이용해 모임을 갖는다. 나는 그런 모임에 강사로 초청받는 일이 있기 때문에, 나름 책임을 감당하려면 습관을 살려둬야 한다.

조반의 내용은 지난 50년 동안 거의 변화가 없다. 우유 한 잔, 계란 하나, 토스트 반 조각, 호박죽 조금, 과일, 커피 반 잔이면 된다. 90세를 넘기면서부턴 그 양이 조금씩 줄고 있으나 빼놓지는 않는다.

장수하는 사람들은 소식(小食)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일부러 소식하는 것은 아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활동량이 적어질 뿐 아니라, 위의 기능도 약해지기 때문에 자연히 식사량이 점차 줄어든다. 백수가 되고부터는 더 먹으라고 권해도 사양하게 된다. 나는 밀가루, 감자, 쌀을 가리지 않고 식사를 한다. 그러나 빵과 감자로 식사를 하다 보면, 온종일 쌀을 먹지 않는 때도 있다.

또 건강과 장수를 위해서는 육식보다 채식이 좋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음식물에서 다양한 영양을 섭취하는 것이 좋다. 지금도 육식, 생선, 채식을 가리지 않는다. 일을 하기 위해서는 고기류가 필요하며 또 먹고 싶어진다. 먹고 싶은 음식을 먹어야 몸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 아닌가 생각한다.

점심은 집에서 먹기도 하지만, 외식을 자주 하는 편이다. 혼자 지내기 때문에 점심을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하는 경우가 많은데,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때로는 내가 초청하기도 한다. 양식, 중국 음식, 일본 식당을 돌아가면서 찾아간다. 내게는 그 식사가 하루의 주식이 된다. '외식은 사치'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선택에 따라서는 가정 식사와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사회경제를 위해서는 절약과 저축이 미덕이라는 생각에서 좀 벗어나는 것이 좋다. 돈이 돌아야 경제도 돌기 때문이다. 나같이 늙은 사람들도 여유만 있으면 아름다운 소비가 값있다는 점도 인정해야 한다.

나에게 가장 아쉬운 것은 저녁 식사를 식당에서 혼자 하는 일이다. 몇 해 전에는 저녁 식사를 하는데, 봉사하는 여직원들이 "사모님하고 같이 오시지 왜 혼자 다니세요?" 라고 물었다. 내가 할 말이 없어서 "어떻게 지내다 보니 결혼이 늦어서 그렇다" 고 했더니, 한 여직원이 "그러셨구나! 늦어도 너무 늦었다"고 해서 혼자 웃었다. 그 직원들도 비가 오는 저녁 시간에 늙은이가 혼자서 식사하는 것이 쓸쓸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50대 후반이 되면서부터 식사가 건강과 가장 가까운 관련을 갖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식사 문제는 젊어선 활동량이 많다 보니 식사량에 신경을 쓰지 않고 먹었으나, 지금은 식사의 양보다는 질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시절에는 토스트를 한 조각을 먹어야 했는데 지금은 반 조각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한 끼 한 끼의 식사에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 음식으로 주어지는 건강을 일로써 보답하자는 뜻을 갖고 식탁에 앉는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기고자 : 김형석
본문자수 : 1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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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세 일기] 15년 전 아내가 먼저 떠난 뒤… 외롭다는 마음은 지울 수 없다

    김형석

발행일 : 2018.03.24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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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이다. 고등학교 선생 할 때의 제자들과 점심을 같이 하고 그중 한 제자의 차로 돌아오고 있었다. 그 제자가 "선생님 저는 상배를 하고 5년이 지났습니다. 마음에 드는 여성이 생겨 재혼을 하고 싶은데 아들딸의 반대가 심해 고민 중입니다"라고 얘기했다.

내가 "재산이 좀 있는가 보다" 했더니 "어떻게 아십니까?" 물어왔다. 나는 이렇게 조언했다. "부모가 갖고 있는 재산이 많으면 자녀들이 그 재산 때문에 재혼을 반대하게 되니까, 먼저 재산 정리를 끝내라. 재혼 후 쓸 재산만 남기게 되면 일이 술술 풀릴 것이다. 더 남겨줄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갖게 해라."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라 해도 필요 이상의 공짜 돈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되기 쉽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서는 혼자된 부모 중 한 사람을 위한 진정한 효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자녀들이 적지 않다. 재혼을 해서 외로움 없는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는 아량도 대단히 중요하다.

내 후배 교수 중에 80세가 된 미국 친구가 있다. 자녀가 없이 지내다가 불행히도 혼자가 되었다. 내가 위로해 주고 싶었으나 도와줄 방법이 없고, 자기도 남은 노후를 생각하면 캄캄했을 것이다. 그리고 2년쯤 지냈다. 그 교수에게서 전화가 왔다. 재혼한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도 사별하고 혼자 지내고 있어 그 실정을 알기에 "정말 잘되었다"고 축하해 주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 교수의 답은 좀 뜻밖이었다. 대학에 있을 때 잘 아는 여학생이 있었는데 그 여자의 어머니가 혼자된 지 5년이 지났다는 것이다. 제자였던 딸이 어머니에게 재혼을 재촉해 혼자된 은사와 중매를 했던 것이다. 물론 나는 그 여제자를 모른다. 그러나 그 제자는 결혼생활을 경험하면서 어머니에 대한 사랑 중 으뜸은 노후에 짝을 찾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노후에 혼자되었다고 해서 모두가 다 같은 상황에 머무는 것은 아니다. 혼자된 어머니의 경우는 다감해서 아들딸들이 자기 집에 오라고 청하기도 한다. 그러나 늙어서 혼자된 남자는 자기 살림도 꾸려가지 못한다. 아들딸들도 같이 있자고 반겨주지 않는다. 재산이 있으면 몰라도.

어머니께서 남겨주신 유언을 기억하고 있다. "나는 늙었으니까 먼저 가야겠고 병중에 있는 네 처도 오래지 않아 떠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집이 비게 될 텐데 어떻게 하면 좋겠니?"라는 걱정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마음을 그때는 헤아리지 못했다. 어머니는 늙어가는 아들이 혼자 남는 것이 안쓰러우니까 '네가 혼자 살지 말고 재혼이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충고를 한 것이다. 15년 전 아내가 내 곁을 떠났다. 그리고 3~4년이 지난 후에야 어머니의 마음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 전해지는 통계를 보면 독신으로 남은 남자는 5년, 여자는 3년 수명이 단축된다고 한다. 내 얘기를 보태면 '배우자가 아닌 좋은 여자 친구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동안 10여 년 세월이 흘렀다. 여러 가지 일에 매달리며 부지런히 살아왔으나 외롭다는 마음은 지울 수 없다.

100세, 이제는 너무 늦은 것 같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기고자 : 김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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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세 일기] 책을 30분간 읽기도 벅차다

30대까지는 많이 읽었다… 70부터는 쓰는 시간이 더 길어져

김형석


발행일 : 2018.03.31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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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안경을 바꾸었는데도 긴 시간 동안 책을 읽을 수는 없다. 40분 정도 지나면 눈앞이 흐려지곤 한다. 노안으로 시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사전을 들출 때는 안경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확대경(돋보기)을 사용해야 한다. 그래도 노년에 책을 읽는 즐거움은 양보할 수가 없다.

중학교에 다닐 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읽었다고 말하면 지금의 중학생들은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나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전쟁과 평화'가 장편소설 중의 하나라는 것을 모르면서 읽었으니까. 그러나 기억력이 왕성할 때여서 그 줄거리와 사상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 자신을 무모하다고 생각은 했어도, 한편으론 자랑스러웠다고 칭찬하고 싶어진다. 그 책들을 안 읽었다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휴머니스트(인문주의자)로서의 눈을 떴을 테니까.

30대를 넘길 때까지는 많이 읽었다. 그러나 40 이후부터는 읽는 시간과 쓰는 시간이 비슷해졌다.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다가 70 고개를 넘기면서부터는 읽는 시간보다 쓰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매일 사색하는 시간도 가지게 되었다. 오히려 사색하고 쓰는 데 들이는 시간의 총량이 독서 시간보다 많아진 것 같다.

사람들은 청각이 시각보다 고등한 감각이라고 말한다. 시각에는 상상과 관념적 내용이 생기지 않으나 청각은 사상과 예술을 풍부히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앞을 못 보는 사람도 철학자나 시인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청각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은 학자나 사상가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어쩌면 지금의 내가 그렇다. 음악을 듣거나 강연을 들을 때는 90분 정도 계속해도 피곤하거나 듣기 싫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읽는 일은 30분만 지나면 집중력이 흐려지고 눈을 비비게 된다. 90대 후반기가 되면서는 한참씩 쉬거나 가벼운 안약을 넣기도 한다. 내 모친은 100세가 되면서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다가 가까이 왔을 때에야 "네가 왔구나!"라고 말하곤 했다.

나도 한두 해 더 지나면 독서는 끝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는 누군가가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대신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가져 보기도 한다. 독서를 못하는 인생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 욕심이 채워질지는 나도 모른다. 내 나이가 되면 누구나 보청기를 쓰게 된다. 그런데 소리는 크게 들리는데, 말은 알아듣기가 힘들어진다. 음성이 흐트러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좀 더 지나게 되면 기억력이 쇠퇴할 것이며, 사고력의 한계도 찾아올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발음까지 어눌해진다. 나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바빠진다. 그때가 다가오기 전에 주어진 일의 마무리를 해야겠기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기고자 : 김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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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세 일기] 꽃다운 나이, 방년 86세입니다

50년 전 모임서 알게 된 여교수를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됐다

김형석


발행일 : 2018.04.07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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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초순이었다.

집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그랜드힐튼호텔에 들렀다. 정중한 옷차림을 한 할머니가 내 앞에 서면서 "혹시, 연세대학교 김형석 교수님이 아니세요?"라고 인사를 했다. "그렇습니다" 하면서 쳐다보았으나 누군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까 50여년 전에 정부가 주관하는 방송영화윤리위원회에서 함께 회의에 참석하곤 했던 S대학의 김모 교수였다. 김 교수는 나를 보면서 "몇 번 뵌 일은 있는데 너무 젊어 보여서, 결례를 하면 안 되겠다 싶어 그냥 지나치곤 했습니다"면서 "저도 방년(芳年) 86세가 되었습니다"라고 웃었다. 86세에 꽃다운 나이라니. 내 나이가 99세라는 것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그때 위원장으로 계셨던 E총장 기억하세요?"라고 물었다. "너무 옛일이 되어서 모르겠는데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이상하다 싶은 생각이 나서 "E총장이 아마 김 교수님을 혼자 좋아하셨는가 보다"면서 웃었다.

김 교수는 무슨 뜻인가 싶었던 모양이다. 내가 설명을 했다. 한 번은 E총장이 연세대로 나를 찾아와 함께 S대학의 김 교수를 찾아가자고 청한 적이 있었다. 나는 무슨 공적인 일이 있는가 싶어 무슨 일로 같이 가자고 하느냐고 물었다. 그런데 E총장의 얘기는 뜻밖이었다. S대학의 김 교수가 드물게 보는 미인이어서 보고 싶기도 하고, 차라도 함께 마시고 싶은데 혼자 가기는 가슴이 떨리고 민망해서 나를 동행자로 택했다는 것이다. 차 안에서 나눈 이야기이기 때문에 도중에 돌아설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여자 친구(?)를 만나는 자리에 따라간 셈이었다. 만나서 잠시 얘기를 나누고 돌아온 것 같은데 그 정도밖에는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지금 생각해보니 E총장이 김 교수를 짝사랑했던 것 같은데요"라고 놀렸더니 김 교수 얼굴이 발갛게 변했다. 그리고 내게 "E총장은 지금 어디 계시는데요?"라고 물었다. 내가 "세상 떠난 지 오래 되었지요"라고 했더니 김 교수가 웃음 띤 음성으로 "그러면 아나 마나지요?" 했다. 둘이서 함께 한참을 웃었다.

오늘은 김 교수가 운영하는 연구소의 회원들에게 내가 강연을 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 복도에서 김 교수가 "저는 한쪽 다리가 불편하고 말도 잘 알아듣지 못해서 고생스럽기는 해도 후계자가 정착할 때까지는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럴 것으로 짐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김 교수의 팔을 붙들고 강연장으로 들어갔다.

강연을 끝내고 가까운 곳에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같이했다. 내가 다시 한번 "E총장이 함께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놀렸더니 "E총장은 기억에 없는데 그때 김 교수님이 오셨던 생각은 난다"고 김 교수가 말했다.

나는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했다. E총장은 김 교수를 보러 갔는데, 김 교수는 나만 기억한다고 말하는 걸 보니, 그때는 김 교수가 E총장보다 나를 더 생각한 것 아니었을까. 혼자 웃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기고자 : 김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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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세 일기] 작년에 165회 강연을 했다

이틀에 한번 꼴로 강연하며 먼길도 밤길도 마다 않는다
김형석

발행일 : 2018.04.14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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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는 다 합해서 165회를 강연했다. 이틀에 한 번꼴이다. 시간이 허락하면 거의 다 간다. 선약이 있더라도 꼭 도와주고 싶을 땐 날짜나 시간을 바꿔서 한다. 사례비와는 관계가 없다. 내가 필요하다면 먼 길도, 밤길도 마다하지 않는 편이다.

아침보다는 저녁 강연이 많고 대체로 70분 길이다. 청중이 가장 많이 모였을 때는 3000명(주최 측 추산)이었다. 적을 때는 30~40명이 되기도 한다. 나는 청중이 200명 정도일 때 보람을 느끼는 것 같다. 사회적 영향을 고려했을 경우 그렇다.

1950~70년에는 안병욱 숭실대 교수, 조동필 고려대 교수와 내가 '강연계의 삼총사'로 불리기도 했다. 기업체를 위한 강연회가 많던 시절이다. 셋이서 제주도에 갔을 때 조동필 교수가 말했다. "여러분, 멀리 제주도까지 와서 강연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실 겁니다. 나는 괜찮아요, 20만원도 감사하지요. 그런데 같이 오신 김 교수님은 그렇게 대접하면 안 되지요. 최소한 50만원은 드려야 합니다" 해서 모두가 웃었다. 강연회를 마치고 돌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그가 덧붙였다. "저녁 값은 김 선생이 내야 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 옛날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그런 농담을 하면서도 우리는 진심으로 한국의 산업화를 돕고 싶었다. 90세가 되었을 때 안병욱 교수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때 우리는 맹물 강연을 했지요. 그다음부터는 모든 기업체가 콜라 강사나 사이다 강사를 초청하지, 우리 같은 생수는 필요가 없어졌나 봐요." 기업과 경제사회에 필수적인 윤리 의식이 사라지고 있다는 안타까움, 그리고 노사 갈등 같은 데서 보여주는 애국심 상실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즘 나는 50대 이후의 사회 지도층이나 70대 전후 장·노년층을 위한 강연이 많아지고 있다. 큰 교회에서는 노년층을 위한 모임에 자주 나가게 된다. 옛날 제자들은 '얼마나 늙었나 보자' 하는 호기심을 갖고 오는 것 같기도 하다.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강연 주제는 대부분 '인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다. 그분들에게 "90이 될 때까지는 공부하고 일하면서 활기 있게 살아보자"고 호소하곤 한다. 그것이 인생을 사는 의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러 곳을 다녀봐도 청중에 90세 이상은 없다. 그래 보이는 사람이 있어 인사를 나누었는데 옛날 상공회의소 책임을 맡아 수고해 주었던 김상하 선생이었다.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귀가 어두워, 내 강연 내용을 전부 알아듣지는 못했다는 얘기였다. 늙기 전에 좀 더 많이 강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찾아오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금년까지는 힘들더라도 강연을 계속하기 위해 모든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되도록 지팡이는 쓰지 않기로 해본다. 보청기도 아직은 안 끼고 있다. 소리는 크게 들리지만 말뜻을 알아듣는 데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옆에 와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사람이 가장 힘들다. 비밀 얘기였겠지만 내 실정은 배려하지 않는다.

강연할 수 있어 기쁘다. 어려움은 있어도 그분들과 나누는 사랑 덕에 내 인생에도 보람이 있는 것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너무 오래 산 것 같기도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제자, 한참을 내 얼굴 쳐다보더니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50년 전 김형석 교수님이랑 꼭 같이 생긴 사람을 봤어"
김형석

발행일 : 2018.04.21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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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늦은 가을이 되면 연문인상(延文人賞) 시상식이 있다. 12회 시상식에 참석했을 때 일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대학 때 제자였던 연극인 오현경도 6~7명 탑승자 가운데 끼어 있었다. 처음부터 내 얼굴만 열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목례를 하면서 마주 보았다. 그래도 그 제자는 내 표정만 살피는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뒤에는 여러 사람 사이에 섞여 나도 정해진 좌석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시상식이 끝나고 길가로 나섰을 때였다. 한 제자가 주차장으로 가면서 "선생님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군을 보셨어요?"라고 물었다. 내가 "나를 쳐다보기만 하고 인사는 하지 않더라"고 했더니 그 제자가 말했다. "그래서 그랬구나. 오군이 우리들 동창이 있는 곳으로 뛰어오더니 '나 지금 엘리베이터 안에서 김형석 선생님하고 꼭 같이 생긴 사람을 보았어. 누군지 모르겠는데, 50여 년 전의 김 교수님과 똑같이 생겼데'라면서 흥분해 있더라고요"라는 얘기였다.

그래서 다른 동창들이 "김 교수님이 아직 살아계셔"라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 어떻게 되나. 우리가 이렇게 늙었는데…"라면서 놀라더라고 했다. 오군은 최현배, 김윤경, 정석해 교수님들과 함께 교단에 섰던 나를 그분들과 비슷한 나이로 보았던 모양이다. 그분들은 40~5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지난겨울에 어느 지방에 강연을 갔다. 70대쯤으로 보이는 초로의 부인이 찾아와 "선생님, 제가 김 아무개 목사 아내입니다. 선생님께서 지방까지 오실 리는 없고 아마 동명이인이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뵈오니까, 아직 살아 계셨군요. 저는 지금쯤은 하늘나라에 목사님과 함께 계실 줄 알았는데"라면서 감격스러운 인사를 했다. 옆에 함께 서 있던 친구 분도 "저도 설교를 들으면서 틀림없는 교수님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자기는 배화여고 학생 때 내 설교를 들었다는 것이다. 먼저 인사했던 사모(師母)는 "다시 태어나서 오신 것같이 반갑습니다"라고 했다.

나는 무어라고 말하기가 어색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그렇게 쉽겠어요? 몇 해 더 세상에 남아 있다가 하늘나라로 가야지요?" 하면서 웃었다. 두 부인은 "오래오래 저희 곁에 계셔 주세요. 오늘같이 말씀도 전해 주시고요" 인사를 하면서 내 곁을 떠나 군중 속으로 사라졌다.

그날 밤 나 혼자 생각했다. 이제 곧 99세(白壽)가 되는 생일을 맞게 된다. 여러분이 내게 하는 인사가 모두 비슷하다. '좀 더 오래 우리 곁에 계셔주세요'라는 마음들이다. 왜 그런지 마음이 무거워진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아껴주는 동안 그분들 옆에 머무를 수 있다면 감사하겠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치매, 고유명사부터 잊어버린다

잊어버리는 데도 순서가 있다, 이름·전화번호 먼저 잊는다

김형석

발행일 : 2018.04.28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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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봄이었다. 내가 연세대 교수가 된 해에 입학생이었던 제자들과 점심을 같이했다. 헤어지면서 종로 2가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한 제자가 뒤따라오더니 "혼자 댁까지 찾아가실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그럼, 찾아가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라고 했더니 "제 선친께서는 85세 때부터 집을 찾아오지 못하곤 해서 전화번호 명패를 달고 다니곤 했습니다"라는 걱정이었다. 90 전후가 되면 자주 있는 일이다. 노인성 치매의 초기 현상일 것이다.

내 친구도 강연을 하다가는 줄거리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같은 얘기를 중복하곤 했다. 그다음부터는 강연을 하지 않기로 했다. 다른 친구는 심한 건망증 때문에 아내나 딸이 동행하면서 도와주곤 했다. 실수를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말을 잊어버리는 데도 순서가 있다. 고유명사, 보통명사, 형용사, 부사, 동사 순으로 기억이 안 난다. 이름이나 전화번호를 먼저 잊어버린다. 형용사를 잊기 때문에 문장 표현이 줄어든다. 동사는 끝까지 잊어버리지 않는다. 배가 고프다든지, 머리가 아프다는 말은 죽을 때까지 뒤따른다.

내 아내는 오래 병중에 있었다. 최근의 일들은 깡그리 잊어버리면서도 옛날 일은 기억하곤 했다. 자주 만났던 내 친구 A교수도 92세 때 "김 교수, 이게 몇십년 만이야!"라며 엉뚱한 인사를 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의 동창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내가 "우리가 92세까지 살 줄은 몰랐지요?"라고 했더니, "우리가 그렇게 오래 살았나?" 하면서 놀라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얘기를 하면서 함께 웃기는 했으나 눈시울은 뜨거워졌다. 왜 그런지 친구가 조금씩 멀어지는 것 같았다. 나도 그렇게 되겠지만….

내 선배였던 R교수의 얘기가 생각난다. 아내가 치매를 앓았는데 워낙 성격이 착했기 때문인지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쪽 옷장의 옷들을 저쪽 옷장으로 옮겨 놓았다가는 다시 순서를 바꾸어 제자리로 돌려놓는 일을 종일 계속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남편이 들어오면 "누구시지요? 우리 선생님은 학교에 가고 안 계시는데요"라면서 놀라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90 고개를 넘기면서는 가장 무서운 병이 치매라고 걱정한다. 내가 잘 아는 목사는 "이다음에 치매에 걸려 '하느님이 어디 있어? 누가 보았나?'라고 말할 것 같아 두렵다"고 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면 투병하는 아픔보다도 치매가 더 걱정이기도 하다.

이런 일들을 주변에서 보곤 하기 때문에 나는 지방에 강연을 가게 될 때에는 누군가와 동행하는 절차를 밟는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고 금년부터는 흠 없는 가족이나 제자에게 내 강연을 객관적으로 듣고 평가해 달라고 부탁한다. 실수하거나 청중에게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치매에만 걸리지 않는다면 1~2년 더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반려견 또순이가 죽었다

아내 다음에는 나를 가장 좋아한 또순이, 10년이 지나는 동안에 나보다 더 빨리 늙기 시작했다
김형석

발행일 : 2018.05.05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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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잠들기 전에 일기를 쓴다. 재작년과 작년의 일기를 읽은 후에 오늘의 기록을 남기곤 한다.

2년 전 오늘은 '또순이'가 죽은 날이다. 강아지 또순이는 그 뿌리가 프랑스다. 어쩌다가 그 선조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고, 미국에서 태어난 또순이가 우리 집으로 온 것이다. 그때 나는 노모와 병중의 아내를 보내고 혼자 있었다. 미국에 사는 셋째 딸이 내 외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데리고 왔었다.

미국에 사는 동안에는 내 딸과 같은 방에서 지냈기 때문에 우리 집에 와서도 2층의 내 방에 머물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나는 그럴 수가 없어 계단 현관 옆에 머물 자리를 장만해 주었다. 그래도 또순이는 2층에 있는 내가 그리워 언제나 계단 아래서 위쪽만 바라보곤 했다. 내 딸의 설명은 비숑(Bichon) 종류 강아지인데 세상에서 주인을 가장 좋아하고 따른다는 것이다. 다 자란 후에도 중간 정도의 고양이 체중밖에 되지 못하는 귀염둥이다.

내가 또순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뒷산을 산책할 때와 앞뜰 잔디밭에서 놀아주는 동안이다. 또순이는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뒷산을 걸을 때는 수십 번씩 뒤따라오는 나를 쳐다본다. 잔디 위에서는 내 환심을 사려고 갖은 아양을 부린다. 그러다가 품에 안아주면 내 눈을 쳐다보다가는 반쯤 눈을 감는다. 그 표정이 '나보다 더 행복한 삶은 없다'는 듯싶었다. 나도 '아내 다음에는 네가 나를 가장 좋아하지…'라고 중얼거리곤 했다.

10여 년이 지나는 동안에 또순이가 나보다 더 빨리 늙기 시작했다. 2년 전쯤부터는 노화 현상이 뚜렷했다. 나를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잔디 위를 뛰어 돌다가도 힘들어서 안 되겠다는 듯이 내 얼굴을 쳐다보곤 했다. 나도 '나보다 네가 더 빨리 늙어서 어떻게 하지…'라고 안아주곤 했다.

지방에서 손님이 왔다. 우리는 습관대로 또순이와 같이 손님 차로 드라이브를 했다. 내 품에 안겨서 내 얼굴과 창 밖을 번갈아 내다보곤 했다. 산책길에서는 즐거워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날 보고 또 보곤 했다. 그것이 또순이의 마지막 행복이었다. 이틀 후에 또순이는 모두가 잠든 밤에 계단 밑 이층이 보이는 자리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그렇게 또순이는 내 곁을 떠났다.

나는 또순이와 같이 거닐던 산길을 걷고 있었다. 또순이가 보고 싶었던 것 같다. 앞을 바라보았더니 또순이가 벚나무 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너 여기 있었니?'라면서 뛰어갔다. 두 팔을 벌렸다. 또순이가 뛰어와 안기지를 못했다. 내가 끌어안아 주었다. '내가 보고 싶었지? 왜 서서 기다리기만 했어?' 하면서 살펴보았다. 또순이는 생전과 같이 내 얼굴을 보면서 눈을 감았다. '주인님 품 안이어서 편안해요'라는 듯이.

꿈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나도 사모해 온 분의 품 안에서 편안히 잠들 수 있어야 할 텐데'라고.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손주들에게 줄 세뱃돈이 떨어졌다

"선생님 용돈으로 써주세요" 제자가 찔러준 봉투… 세뱃돈으로 시작한 인생 용돈으로 마무리되는 듯

김형석

발행일 : 2018.05.12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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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는 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심는 일을 한다. 열매는 사회가 거둔다. 백세를 헤아리게 되니까, 내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내가 찾아보는 때가 있다. 제자들이 성공해서 나보다 훌륭하게 되었을 때가 그렇다. 지난해 가을 제자와 함께 인촌상을 받았을 때는 정말로 자랑스러웠다. 그런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몇 해 전에는 내 제자가 사회적인 공로상을 받게 되었다. 저녁 시간이었으나 식장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곧 시작할 시간에 들어섰는데, 수상자 자리에 앉아 있던 제자가 찾아와 내 코트를 받아 걸어 주면서 안내해 주었다. 주빈은 제자였다. 상을 받은 그가 답사를 했다. 본래 말이 적고 앞장서기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오늘까지 살아오면서도 그러했으나 앞으로도 은사이신 김 선생님의 뜻을 기리면서 살게 될 것"이라는 답사를 했다. 나에게는 그 마음이 분에 넘치는 고마움이었다.

시상식을 마칠 때 제자는 내 옆까지 왔다. 귀에 가까이 얼굴을 대면서 "선생님 제 얘기가 들리세요?"라고 묻더니 "제가 선생님 코트에 봉투를 하나 넣었는데요. 용돈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허물 마시고 써주세요"라면서 돌아갔다.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좀 늦게 집에 돌아왔다. 코트 주머니에는 두툼한 봉투가 들어 있었다. 왜 그런지 어렸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설날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이 집 저 집을 찾아다니면서 세뱃돈을 받던 옛날이 생각났다. 그 세뱃돈으로 딱지도 사고 장난감도 사서 놀던 어렸을 때 친구가 그리워졌다. 일 년에 한 번씩 기다려지는 경사스러운 행사였다.

그로부터 90년 세월이 흘렀다. 요사이는 내 동료나 후배 교수들이 늙어서 수입이 없으니까 용돈 타령하는 얘기들을 듣는다. 설날이 가까워지면 아들딸들에게 "손주들에게 줄 세뱃돈이 떨어졌다"고 미리 말해두면 자녀들이 용돈으로 쓰시라면서 현금을 미리 보내온다. 그중에서 일부는 세뱃돈으로 주고 나머지는 용돈으로 쓴다는 얘기다. 또 어떤 친구는 생일이 되면 자녀들에게 "선물은 필요 없으니까 알아서 하라"고 말해 두면 현금 봉투가 온다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인생은 세뱃돈으로 시작했다가 용돈으로 마무리되는 것 같다. 세뱃돈은 즐거움의 시작이었으나 용돈은 인생을 마무리하는 절차인지 모른다. 내 인생도 세뱃돈의 즐거움으로 시작했으나 용돈으로 채워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의 용돈은 성격이 다르다. 생각해보면 내가 내 제자를 사랑한 것보다 제자가 나를 더 사랑했던 것이다. 용돈이 아니라도 좋다. 많은 제자가 나를 그렇게 기억하며 살아간다면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일생을 살아온 것이다. 사랑이 최선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생일 저녁, 밥을 굶어야 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의 생일 “엄마, 친구 집에서 이밥에 고깃국 먹고 왔어” 거짓말을 해야 했다…
김형석

발행일 : 2018.05.19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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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입학 전후였을 것이다. 늦은 봄 따뜻한 햇볕을 즐기면서 동네 밖의 냇가에서 늦도록 놀다가 집으로 들어섰다. 몹시 시장기를 느끼고 있었다. 방문을 열려고 하는데, 어머니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와 말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장손의 생일인데 고깃국은 못 끓여도 쌀밥은 했어야죠. 조밥하고 고추장찌개밖에 없지 않아요. 몸이 약해 고생스럽게 키워온 것만 해도 억울한데…." 언제나 가난에 시달려 사는 어머니의 한풀이였다.

나는 문밖에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엄마, 나 왔어" 하면서 방으로 들어섰다. 그러면서 거짓말을 했다. "나 오늘 영길이네 집에서 놀았는데, 영길이 엄마가 내 생일이라고 이밥에 고깃국도 끓여 주어서 밥 많이 먹고 왔어." 저녁은 안 먹어도 된다며 그렇게 꾸며댔다. 어머니는 "그러면 잘됐다. 우리는 조밥에 김치만 먹으면 된다"면서 아버지와 식사를 했다.

나는 거짓말의 죗값을 치러야 했다. 배가 고프니까 잠도 오지 않았다. '내 생일만 아니었으면 거짓말도 안 하고 굶지도 않았을 텐데….' 오히려 생일이 원망스러웠다.

그런 일 때문일까. 나는 '생일 같은 것은 잊어버리자. 생각을 안 하면 그뿐이지'라는 생각으로 긴 세월을 살았다. 다른 사람의 생일에도 애정 있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38선을 넘어 탈북해 서울 중앙중고등학교에 부임한 지 1년쯤 지났을 때였다. 내 담임 반 학생 두세 명이 저녁 시간에 집으로 찾아왔다. 그러면서 "선생님 생일은 잘 모르겠으나 크리스마스가 되어 작은 선물을 가져왔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작은 상자를 열어보았더니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어린 제자들이 시계도 없이 가난하게 지내는 내 모습을 보고 돈을 모아 성탄 선물을 했던 것이다. 그런 애정 어린 선물을 받은 사람은 아마 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나는 생일 선물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들, 특히 내 애정을 필요로 하는 학생들과 주변 사람들에게는 사랑을 베풀면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내 생일은 양력으로 4월에 있다. 해마다 4월 한 달은 가급적 많은 사람들에게 마음의 선물을 하자는 생각을 했다. 내 생일을 축하하듯이 사랑의 선물을 나누어 주자고 생각했다.

지난달에 강연을 14회 했다. 금년 가을에 출간하기로 계획했던 원고 뭉치도 출판사로 보냈다. 어쩌면 나의 마지막 저서가 될지 모른다. 생일이 있는 4월까지는 끝내고 싶었던 원고였다.

어머니가 나에게 베풀고 싶었던 사랑,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사랑의 작은 한 부분이라도 남겨주었으면 하는 정성이었다. 그런데 올해는 내가 나누어 준 사랑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00세를 살았는데 "더 오래 사시라"는 축하를 받고 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여자 친구라는 거짓말

김형석

발행일 : 2018.05.26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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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에 오군 생각이 간절했다. 20년 동안 빼놓지 않고 감사 전화를 걸어 주던 제자다. 내가 28세, 오군은 18세 때 처음 만난 사제 간이다.

오군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고향인 충북 청주로 내려가 공무원을 지내기도 하고 문필가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후에는 충북대 교수가 되었다. 사회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는 사제 간의 친분이 더 두터워졌다. 한번은 서울에 와 모교인 중앙학교를 함께 거닐기도 했다. 같이 찍은 사진이 강원 양구 철학의 집에 걸려 있다. 중앙학교 때의 추억을 남기기 위해서이다.

최근에는 스승의 날에 걸려오는 전화가 대화가 되지 못하고 오군의 일방적 통화로 끝나곤 했다. 나보다도 먼저 귀가 멀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세요?" 하고 확인한 후에는 자기 얘기만 한다. 그러고는 "서울 가면 찾아뵙겠습니다" 하는 지키지 못할 약속으로 그치곤 했다. 나보다 제자가 더 빨리 늙는 것 같아 안쓰러웠다.

작년이다. 내 가까운 지인이 청주에 문상을 간다고 하기에 내가 한 시간 동안 청주에서 오군을 만날 계획을 세웠다. 부인은 건강이 좋지 않아 못 나오고, 서울에 사는 따님이 친정에 들렀다가 오군과 상봉하는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나는 약속한 장소로 갔다. 길가 2층에 있는 카페였다. 내 오른손을 두 손으로 꼭 잡고 어린애가 아버지 손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옆자리에 앉았다. 너무 반가워서 말문이 막힌 듯했다. 내가 "오래 보지 못했는데, 건강이 이전만 못해 보인다"고 했더니 수긍하는 듯이 머리를 끄덕이면서 딸을 바라보았다. '네가 말씀 드려라' 하는 눈치였다. 따님의 설명을 들었다. 건강이 좋지 못했는데 교수님이 오신다니까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 둘은 60분이 너무 짧았다. 아마 이것이 마지막 만남일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 전화가 왔다. 서울로 갈 차가 도착했다는 것이다. 내가 오군의 팔을 붙들고 내려가 차를 탔다. 운전대에 앉아 있는 여자를 보고는 오군이 "저분은 누구세요?" 하고 물었다. 내가 대답하려고 할 때 차가 움직였다. 대답을 듣지 못한 오군은 오른손을 흔들면서 작별 인사를 했다.

나는 차 안에서 후회했다. '이 여자분은 내 친구야' 했더라면 오군이 얼마나 기뻐했을까. 내가 오랜 세월 병중의 아내를 돌보아 주었고 지금은 혼자인데, 왜 재혼을 안 하실까 하고 친구들과 걱정해온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한마디 거짓말을 했더라면 오군은 틀림없이 '역시 우리 선생님이 최고야. 백세에 여자 친구가 있고…'라면서 가족들과 기억에 남는 동창들에게 "나 김 선생님의 여자 친구를 보았다"면서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고도 남을 성격이었다. 또 그렇게 나를 좋아했다.

몇 달 후에 따님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그렇게 교수님을 좋아하셨던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서대문 안산의 '개구리 교향악'

김형석

발행일 : 2018.06.02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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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일이다. 늦은 저녁때인데 전화가 왔다. 같은 동네에 사는 후배였다. 지금 서울 안산(서대문구) 입구를 산책하고 있는데, 개구리 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다. 5월 하순까지는 계속될 것 같다는 얘기다. 기회가 되면 그 개구리 소리를 들으러 와보라는 뜻이었다.

이틀 동안 계속되던 비가 그친 날 늦은 저녁에 서대문자연사박물관 맞은편 숲속으로 들어섰다. 작은 연못이 둘 있는데 그곳이 개구리들의 서식처다. 사면이 조용해지기를 10여 분 의자에 앉아 기다렸다. 맞은쪽 숲속의 한 마리가 울어대니까, 양쪽과 뒤 습지에서도 화답하는 듯이 울어대기 시작했다. 10여 마리가 목청을 돋우어 소리를 지른다. 그 노래를 들으면서 고향에서 해마다 들어오던 개구리 소리를 연상했다.

로맹 롤랑의 소설 '장 크리스토프'를 읽었던 기억이 떠오른다. 젊은 음악도가 작곡가가 되려고 열중하고 있는데, 한 아저씨가 찾아와 "가장 위대한 교향악을 들려주겠다"면서 강가의 들판으로 이끌고 갔다. 그곳에서 하늘이 진동할 듯이 울어대는 개구리 소리가 들린다. "아무리 위대한 음악가라고 해도 저렇게 천지를 경탄케 하는 음악을 창조해 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그는 귀띔해 준다. 그 젊은이가 훗날 제9심포니를 작곡하는 주인공으로 성장한다. 물론 지어낸 이야기다.

그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어려서 초여름마다 들었던 개구리들의 울음을 연상했다. 수천수만 마리의 합창이라 불러도 좋고 교향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까지 긴 세월을 지나면서 나는 어렸을 때 심취했던 개구리 교향곡을 듣지 못했다. 고향과 더불어 사라진 옛꿈이 되어 버렸다.

그런 소리가 듣고 싶어 5월이 되면 어느 지방 저수지 부근의 논두렁길을 걷기도 하고, 충남 부여 부근을 찾아가기도 했다. 백마강 기슭에는 논이 많고 개구리들이 울어댈 것 같은 기대를 해보았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고향에서 들으면서 자랐던 개구리 교향곡은 들을 수 없었다. 농촌을 지키는 노인네들은 "농약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개구리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고 했다.

내가 들은 안산 연못의 개구리들도 반쯤은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문명의 혜택을 받아 긴 인생을 살았으나 문명이 주는 것보다 더 소중한 자연의 축복을 잃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개구리 소리만이 아니다. 우리의 어머니인 자연의 축복을 저버리고 사는 결과가 되었다.

내 나이 때문일까. 대학생 시절에 한 지붕 밑에 살았던 서 형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하는 그리움이 찾아든다. 서 형은 베토벤을 사모한 음악도였다.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제9심포니의 합창곡을 들으면서 눈을 감고 싶다는 소원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 정도는 못 되지만 내 삶을 일깨워준 개구리 교향곡을 한 번 더 들어보고 싶다. 그 자연의 하모니 속에는 비참과 죽음까지도 넘어서는 생명의 강렬함이 있었던 것이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세금을 많이 내 기쁘다

    김형석

발행일 : 2018.06.16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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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 때문에 최 세무사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20년 전쯤이었을까. 세무사가 나에게 들려준 이야기다.

90이 다 되어 보이는 손기정(1912~2002) 옹이 찾아왔다. "어디서 상금을 받았는데 세금 내는 일은 좀 도와달라"는 청이었다. 상을 주는 측에서 세금을 처리했을 테니까 신고 안 해도 된다고 했더니, "그건 나도 알아. 그래도 내가 받은 돈이니까 내고 싶다"고 해서 계산을 해보였다. 손 옹은 "그것밖에 안 되나. 더 많이 내는 방법을 알아봐 줄 수 없겠나" 하면서 만족스럽지 않은 표정이었다고 한다. 세무사는 많이 내는 규정에 맞추어 드렸다. 손 옹이 서류를 살펴보고는 흡족해하면서 "나 이게 마지막 내는 세금이야.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혜택을 얼마나 많이 받고 살아왔는데, 세금이라도 좀 많이 내면 내 마음이 편해서 그래…" 하였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세무사가 내게 "선생님도 나라가 없는 일제강점기를 사셨으니까 손 옹의 마음에 공감하시겠네요?"라고 물었다. "나는 탈북 1세대입니다. 그때 대한민국이 나를 품 안에 안아 주지 않았다면 지금도 세계 어디에선가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요"라고 답하는 내 마음도 무거웠다.

이번에 나는 평생 어느 때보다 종합소득세를 많이 납부했다. 일을 맡아 주었던 세무사는 경력이 20년 되었다는데 "백 세가 된 나이에 이렇게 일 많이 하고 세금을 많이 내야 하는 분은 처음 만났다"고 할 정도였다.

지난해에는 두 곳에서 억대가 넘는 상금을 받았다. 저서 두세 권이 독자의 호응을 받았기 때문에 인세도 많았다. 강연료까지 다 합치다 보니 많은 세금(약 3000만원)을 낸 것이다. 내 일을 도와준 세무사가 "어차피 상금은 공익사업에 후원을 하기로 하셨으니 법인의 후원 영수증을 발부받으면 안 내도 될 세금이었을 텐데"라고 말했던 모양이다.

내 생각은 좀 달랐다. 캐나다에 갔을 때 친구에게 들은 얘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김 선생, 캐나다에서 살아보니까 교회에 헌금하는 것보다 세금을 더 많이 내고 싶은 마음입니다. 내가 미국 딸네 집에 갔다가 심장병으로 두 주 동안 입원했는데 캐나다 정부가 병원비를 다 지불했고요. 토론토에서 변두리 도시로 이사를 왔을 때는 시 도서관에서 한국 책 도서목록을 보내주며 '필요한 책이 있으면 더 신청하라'는 안내장이 왔어요. 김 선생 저서도 서울에서는 읽지 못하다가 여기서 읽었습니다"라는 것이었다. 캐나다 의료 체계는 다른 주로 이사하거나 해외여행 중에도 세금으로 무료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우승할 때 나는 대학생이었다. 마라톤 우승 장면을 친구와 같이 영화관에서 보면서 둘이서 손을 잡고 감격했다. 한국의 젊은이가 일본을 앞질러 세계를 제패한 것이었다. 그랬기에 인생 전체를 대한민국에 바치고 싶었을 것이다.

내 친구는 한국이 아닌 캐나다에 가서야 세금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나도 그런 마음을 갖고 대한민국에서 몇 해 더 살아보고 싶어졌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도자기를 물려준 내가 어리석었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발행일 : 2018.06.23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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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본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도자기 수장가의 집에 미국 대사관 사람이 방문했다. 기다리고 있던 수장가가 안내를 받으면서 들어오는 손님을 보았더니 아내와 두 어린이가 동행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주인은 "오늘은 차나 마시면서 담화나 나누다가 가시는 것이 좋겠다"면서 도자기 보여주기를 거절했다. 어린이들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골동품이 애들의 장난감이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미국보다 오랜 역사를 지닌 골동품 수집가들에게는 그들 나름대로의 예규가 있다. 도자기를 감상할 때는 정좌를 한다. 그리고 한 손으로 물건을 잡는 일은 금물이다. 30㎝ 이상 높이로는 들어 올리지 않는다. 간혹 실수를 하더라도 파손되는 일이 없도록 마룻바닥에 깔개를 준비하기도 한다. 다른 골동품보다도 도자기에 대한 애호는 극진하다.

임진왜란 때 가지고 간 도자기들을 400여 년 조심스럽게 애용하고 보관하다가 지금은 거의 국보급 대접을 하면서 박물관에 보존하고 있을 정도이다. 그들이 가장 소중한 애장품으로 여기는 이도(井戶)잔은 옛날 우리 선조들이 사발로 쓰던 일상 식기였다. 몇 점 안 되는 그 막사발이 지금은 가장 고귀한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만큼 그 도자기들을 사랑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옛날 도자기들에 대한 연구와 문화적 가치를 높이 평가해 준 것도 일본 학자들의 선구적 업적이었다. 간송 전형필(1906~1962) 같은 사람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농경지까지 팔아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재들을 다시 사들이는 정성을 보였다. 존경스러운 대국적 쾌거라고 생각한다. 또 그렇게 골동품이나 도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심정은 경험해 본 사람들만이 안다.

내가 친분이 있는 한 대학의 총장은 장인이 남겨준 도자기를 잘못 건사해 깨트렸다. 그 사실을 안 장인이 얼마나 화를 냈던지 머리를 숙여 사과했다는 얘기를 했다. 그 장인이 "너 같은 사람에게 애장품을 유산으로 준 내가 어리석었다"고 말하며 분노했다는 것이다.

요사이 며칠 동안 나는 옆에 두고 있던 도자기들을 강원 양구 '철학의 집'으로 보내기 위해 정리하는 중이다. 옛날 서민들이 썼거나 애장했던 도자기들이다. 값비싼 것도 아니고 박물관에 갈 정도도 못 된다. 그저 내가 사랑했던 것들이며 몇 십 년 동안 아끼던 물건들이다.

물건을 정리하다가 조선왕조 초기 것 두 점과 후기 단지가 나왔다. 나는 입속으로 '너희도 양구로 가야지?' 하고 물었더니 그 도자기들이 하나같이 '저희는 끝까지 주인님과 같이 있다가 이다음에 같이 가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도 '그래 너희는 이다음에 같이 가자…' 하고 마음으로 약속했다.

그 얘기를, 옆에서 물건들을 정리하며 포장해 주던 이에게 했더니, 그 여자 분은 머리를 숙이면서 눈물을 닦고 있었다. 내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기고자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할머니들이 무서운 세상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발행일 : 2018.06.30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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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은 한 레인에 2~3명, 할아버지는 5~6명이 수영한다
용기 내어 할머니 칸으로 갔다가 덩치 큰 분에게 바로 쫓겨났다

심리 상담이나 치료를 하는 사람들이 권하는 사례가 있다. 선한 습관에 몰입하게 되면 그 습성 때문에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도 30여 년 동안 수영을 즐기는 습관을 쌓아왔다. 지방에 갔다가 서울에 도착하면 피곤을 풀기 위해 집으로 가지 않고 곧장 수영장을 찾았다. 동행했던 사람은 의아해한다. 그러나 나는 수영을 통해 모든 피곤과 스트레스를 푼다. 그것이 습관이 되었다. 오늘은 주말이어서 시간을 쪼개 수영을 했다. 심신이 경쾌해진다. 내 친구는 그 습성 때문에 정기적으로 등산을 했다.

오늘은 수영을 끝내고 버스를 탔는데, 노인들을 위한 효도 수영을 함께 하던 사람을 만났다. 내가 "요사이는 정해진 시간을 지킬 수가 없어서 때로는 수영장을 바꾸곤 한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효도 수영으로 맺은 친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얘기다. "저도 사정만 허락되면 옮겨야겠어요. 비용이 덜 들기도 하고 시간만 맞추면 교통도 편해서 좋은데, 할머니들 천하에 우리 몇 사람이 겨우 끼여 지내니까 안 되겠어요. 요사이는 5~6명 되던 남자 회원이 점점 줄어드니까 오래지 않아 쫓겨날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때는 할머니들의 위세에 눌려 수영하는 재미마저 없어지는 것 같아요." 사실은 나도 그랬다. 할머니들은 한 레인에서 두세 명이 여유롭게 수영을 하는데, 할아버지들은 한 레인에서 5~6명이 몰려다닌다. 내가 용기를 내서 할머니들 칸으로 갔다. 어디서나 남녀는 함께 수영을 하게 되어 있고 사람이 적은 칸으로 가서 함께 헤엄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보다 키도 크고 체중도 대단해 보이는 할머니가 준엄하게 말했다. "여기는 여자들이 사용하는 곳입니다." 할 수 없이 쫓겨났다. 나보다 선배가 될 정도로 오래 수영장에 다닌 80대 할아버지에게도 항의를 섞어 불평했다. "오래되신 선배께서 좀 얘기해 시정하도록 해주세요"라고. 그 할아버지는 나보다도 왜소한 편이다. 내 얘기를 듣더니 "말해보았자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할머니들이 무서워서 말도 못 꺼냅니다. 우리는 많아야 5~6명이고 할머니들은 40~50명이 되니까, 체육관에서도 우리를 반가워하지 않는 것 같고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할아버지들은 기가 꺾이고 발언권도 없어지고 만다. 말은 안 하지만 버스에서 만났던 사람도 할머니들이 무서웠던 것 같다.

수영장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80대쯤 되면 가정에서도 남편들은 할머니들의 보호 밑에 살아야 하니까, 눈치를 보면서 용돈을 얻어 쓰는 신세가 된다. 연금만 없으면 남편들을 쫓아내고 싶다는 게 일본 여성들의 공론이라고 한다. 이대로 세월이 지나면 세상이 여성 사회로 바뀌고 우리 같은 노인네들은 존재 가치가 없는 인생으로 밀려날지도 모르겠다. 어디 호소할 곳도 없고.

 
 

기고자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공 좀 찼던 철학 교수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발행일 : 2018.07.07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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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월드컵 경기 때문에 밤잠을 설쳤다. 경기가 있는 줄 알면서 잠잘 수도 없고 응원을 하고 나면 피곤해진다. 내가 축구에 대해 관심을 갖고 응원하게 된 것은 축구 이외의 경기를 모르기 때문이다. 다른 스포츠는 접촉해 보지도 못했고 문외한이다.

초등학교 때는 동네 아저씨가 만들어 준 볏짚 뭉치로 공을 찼다. 그러다가 고무공 차기를 즐기면서 중학생이 되었다. 체육 시간에는 간혹 축구 경기를 하는 때도 있었다. 대학생이 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는 축구와의 인연이 끊겼다.

30여 년 세월이 지난 뒤였다. 연세대학교의 일곱 개 단과대학 교수들이 축구 친선경기를 갖기로 했다. 불행하게도 우리 문과대학 교수 중에는 축구 경험을 갖춘 교수가 거의 없었다. 할 수 없이 내가 앞장서서 팀을 구성하고 시합을 위한 훈련을 맡게 되었다. 나는 선수이면서 주장의 책임을 맡는 처지가 되었다. 어쨌든 첫해의 우승기를 차지하게 되었으니까, 내 노력도 적지 않았던 셈이다. 교수 모두가 청소년 못지않게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신과대학의 M 교수는 나를 찾아와 신과대학이 이길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뜻밖의 사건이 벌어졌다. 1970년도 가을에 열리는 연고전 경기에는 교수 축구팀도 출전하게 되었고 나도 시니어 팀의 주전 선수로 뽑힌 것이다. 유니폼을 입고 서울 동대문경기장에 나섰더니 고려대의 조동필 교수가 "연세대에 얼마나 선수가 없으면 김 선생까지 나왔느냐"고 놀려주었을 정도였다. 연대 교수팀이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나는 오른쪽 공격수로 뛰었다. 우승하고 두 대학의 응원단이 환호성을 올리는 가운데 우승대 앞으로 나서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국제경기는 못 되지만 일약 인정받는 선수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 당시에 꽤 많은 독자를 차지하던 신문 '일간 스포츠'에는 대한민국축구협회 회장 장덕진씨와 나의 '한국 축구의 현실과 미래' 비슷한 제목의 대담이 실렸다. 고대 출신인 장 회장이 대담 상대로 나를 선정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뜻하지 않게 축구선수가 되었고 마치 축구계의 주목받는 인사로 등극(?)하기도 했다.

50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내가 왕년에 축구선수였다고 해도 누구도 믿어주지 않는다. 162cm의 신장과 체중 55㎏의 철학 교수가 축구선수라니, 나도 믿지 못했을 것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동대문 잔디구장에서 활약하던 사진이 남아 있어 손주들에게 보여주기도 하며 때로는 고등학생들에게 스스로 자랑해 보기도 한다.

결론은 간단하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 나도 축구를 전공했다면 박지성 선수만은 못해도 성공하고 돈도 벌었을 것이다, 라고.
 
 
기고자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나도 늙어가는지 건망증이 생겼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발행일 : 2018.07.14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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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지내던 동갑내기 목사 생각이 난다. 30여 년 전 일이다. 일요일 아침에 설교를 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인천까지 갔는데, 약속한 교회가 어딘지 모르겠더라는 것이다. 공중전화로 집에 있는 아내에게 물었지만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할 수 없어 가까운 교회를 찾아가서, 몇몇 감리교회 주소로 전화를 걸어 "오늘 누구의 강연 요청이 있었느냐" 확인을 하곤 택시 타고 가느라 고생했다는 얘기였다.

그러면서 "60이 되니까, 나도 늙었나 봐. 건망증이 찾아온 것 같아"라며 웃었다. 얘기를 들은 나는 위로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괜찮아. 나는 며칠 전에 점심 먹으러 종로에 나갔다가 버스에서 내려 들어갔더니 책방이던데…"라고 했다.

사실 나는 건망증 이상의 습관이 있다. 건망증은 기억했던 것을 잊었을 때의 상태다. 나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버릇을 갖고 있다. 그 하나가 만났거나 함께 지낸 사람의 이름이다. 내가 제자들의 이름을 모른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졸업생들은 사은회를 겸한 식사를 끝내면서 내 옆까지 다가와 "선생님, 제 이름이 박○○입니다. 기억해 주세요"라고 부탁한다. 나는 "그럴게" 대답하지만 집에 돌아와 메모하려고 하면 벌써 깜깜하게 잊곤 한다. 그래서 어떤 제자들은 내가 누구의 이름을 부르면 그 제자는 대단한 친분이 있거나 유명해진 인사로 착각한다. 얼굴은 기억에 떠오르는데,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을 자주 대하곤 한다.

요사이 내 강연을 듣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기억력이 좋으냐"고 부러워한다. 며칠 전에는 철학계 동료들과 얘기를 나누다가 "1781년에서 1831년 사이는 독일 관념론의 전성기였다"고 했더니 모두 놀라는 것이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출간된 해부터 헤겔이 죽은 해를 모르느냐"고 설명했다. 모두 감탄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런 강의로 몇십 년 동안 벌어먹고 살았는데, 그렇게 쉬 잊을 수가 있겠느냐'고 생각은 하면서도 내 기억력이 괜찮은가 보다고 흐뭇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런 습관과 생활이 현실적인 도움은 되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아는 정치계나 경제·사회계는 말할 것도 없고 교수들 중에서도 많은 사람을 기억하면서 선처(善處)하는 사람들이 성공도 하고 여러 분야의 지원도 얻는다. 나같이 좁게 깊이 있는 사귐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그런 폭넓은 후원은 받지 못한다. 인천에서 갈 곳을 잊었던 목사는 훌륭한 설교를 하는데 많은 신도를 이끄는 목회자는 되지 못했다. 나와 비슷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며칠 전의 일이다. 가까이 있는 교회당 안의 카페에서 약속했던 손님을 만났다. 나는 모 신문사의 기자로 알았기 때문에 쓰고 있던 원고 생각이 떠올라 얘기를 했다. 그 손님이 "제가 뵙기로 한 것은 원고 때문이 아닌데요"라면서 웃었다. 내가 착각을 했던 것이다.

나는 "미안합니다. 나도 요사이는 늙어가는 모양입니다. 건망증이 생겨서…"라고 했다. 내 말을 들은 두 사람이 마주 보면서 웃었다.

 
 

기고자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힘들어도 오래 일해야겠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발행일 : 2018.07.21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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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부터 서둘렀다. 중소기업중앙회에서 강연 요청을 받아 제주행 비행기를 타야 했기 때문이다. 주최 측에서 여러모로 배려해 주었으나 내 나이에 먼 길을 다녀오는 일이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탑승권을 받아보았다. 지금까지 내가 대한항공을 926회 이용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다른 비행기들도 많이 탔으니 무척 많은 여행을 한 셈이다. 강연 요청으로 간 것이 80%를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강연을 많이 하는 편이기 때문에 크게 긴장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강연을 끝낼 때까지는 여러 가지를 조심하게 된다. 컨디션 조절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강연 전에는 30분쯤 혼자 휴식을 해야 한다. 성량도 조절해야 한다. 나이 때문이다. 요사이는 30분까지는 서서 강연하지만 그 이상이 될 때에는 앉아서 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날 강연에 온 청중은 다양했다. 30대 후반부터 70대 중반까지 중소기업의 사장들이고, 아내를 동반한 경우도 있었다. 주최 측에서는 600명이 넘을 것이라고 했다. 강연을 시작하면서 보니까, 연단은 전등 빛이 강한데 청중석은 컴컴한 편이었다. 연극 무대 같은 인상이었다. 강연하는 사람은 청중의 반응과 표정을 보아야 하는데 여기서는 그러질 못했다.

나는 연령의 차이, 여성들의 기대,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업 상황을 고려하면서 쉽지 않은 강연을 끝냈다. 일어서서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그 많은 청중이 일제히 기립해 박수를 쳐주었다. 그때서야 청중이 예상보다 많았고 열성적으로 경청해 주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시 한 번 인사를 했더니 함성이 터져 나왔다. 강당 밖 복도를 걸으면서 주최 측 사람에게 "100세가 된 강사니까 감사와 수고의 표시겠지요"라고 말했다. 그 사람은 "아닙니다. 저도 말씀을 듣다가 눈물을 닦았는데 옆 사람들도 여럿이 눈가를 훔치고 있었습니다"라며 감사했다.

강연을 끝낸 이튿날은 인사를 많이 받았다. 가장 많은 얘기는 60대 후반이나 70대 중반 사람들이, 인생을 다시 출발해서 90까지는 일을 해야겠다는 다짐이었다. 50대 후반의 한 부부는 "사업은 힘들고 세금도 과도하게 나와서 이젠 접어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제 말씀을 듣고 보니 용기가 생겼고 빚을 내서라도 세금 정당하게 내고 더 열심히 일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많은 수는 아니지만 회사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그것이 주어진 인생의 사명이고 나라를 위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라는 인사도 받았다.

나는 방에 올라와 혼자 생각해 보았다. 저분들이 정치인이나 고위 공무원들보다 애국자들인데, 정책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그런 경험도 해보지 않고 규제에 복종하기를 원하는 경우가 많아지는 것 같다. 기업인들이 한국 경제발전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는 사실을, 정책 입안자들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100세의 나이에도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어 삶의 보람을 느낀다.

 
 

기고자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늙으면 부부 싸움이 '보약'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발행일 : 2018.08.11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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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잘 아는 가정이다. 80대를 넘긴 노부부가 살고, 다섯 자녀들은 모두 독립된 가정을 꾸미고 있다. 노모가 팔순 생신이 되었다. 생신 축하는 멀지 않은 온천장호텔에서 갖기로 했다. 자녀들과 성년이 된 손주들이 모두 큰집에 모였다.

큰딸이 어머니에게 합의된 사정을 얘기했더니 "나는 모르는 체할 테니 아버지한테 먼저 상의하라"고 했다. 큰딸이 큰오빠와 같이 80 중반이 되는 부친에게 어머니 생신 축하 잔치 얘기를 했다. 부친은 "너희들 어머니 얘긴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 마음대로 하라"는 것이다. "아버지도 가셔서 축하해 주셔야지요!" 큰딸의 얘기를 들은 아버지는 "싫다. 난 안 간다. 집에서도 보기 싫은 것을 겨우 참고 있는데 엄마 생일이라고 내가 따라가?" 하는 것이다. 아들이 "지난번 내가 왔을 때도 싸우시더니 또 싸우셨어요?"라며 웃었다. "너희들은 우리가 좋아서 싸우는 줄 아냐? 10년 전만 같아도 헤어졌을지 모른다"면서 '아들은 내 편'이라는 듯 마음먹고 화를 내신다.

딸이 "아버지, 싸울 세월은 많으니까 어머니 생일잔치에는 억지로라도 참으세요. 어머니가 섭섭하지 않으시겠어요?"라고 달래보았다. 아버지는 "그만하자. 나는 절대로 온천장까지 따라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너희들끼리 다녀오너라" 하면서 딱 잡아떼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딸이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절대 안 가신다네요. 벌써 방까지 다 예약해 두었는데"라고 걱정했다. 어머니는 "너희들은 그만해라. 내가 처리할 테니까"라면서 딸에게 따라와 보라는 눈짓을 했다. 아버지가 있는 방 창문 앞에서 "나도 안 오실 줄 알았습니다. 우리끼리 가서 즐겁게 놀다가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 대신 밑반찬은 준비해서 냉장고에 넣어 두었으니까 고생스럽더라도 돌아올 때까지 방 안에 그대로 계세요"라고 선언해 버렸다. 딸들은 어머니도 몹시 화가 난 것 같다고 걱정했다.

다음 날 아침이다. 다섯 자녀들 중에서도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큰딸이 방문을 열면서 "아버지, 그러면 우리끼리 다녀오겠습니다. 올 때까지 힘드셔도 참으세요"라면서 들여다보았다. 아버지는 양복을 차려입고 넥타이까지 매고 앉아 있었다. 아버지는 "차가 몇 대가 가냐?"고 물었다. 두 대라고 했더니 "그러면 나도 가련다. 엄마하고 같은 차를 타기 싫어서 그랬다"며 밖으로 나왔다.

딸이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딴 차로라면 가신대"라고 했더니 어머니는 "내 그럴 줄 알았다. 아버지는 내가 잘못했다고 빌 줄 알았겠지? 혼자 간다고 딱 잘라 말했더니 따라오는 걸 가지고. 아버지한테 가서 내가 안 와도 된다고 하더라고 그래라"면서 좋아하더라는 얘기였다.

나는 큰따님으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혼자 생각했다. 오늘 밤에는 내 아내가 옛날같이 부부 싸움을 하기 위해 꿈에라도 찾아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기고자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1945년 8·15에 꾼 꿈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발행일 : 2018.08.18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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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해변가 창고마다 일본 사람들 시신이 가득했고
무척 큰 태양이 지고 있는 데 서쪽이 아닌 동쪽 산이었다
깨어나 평양 시내로 갔더니 "무조건 항복" 일왕의 방송이…

1945년 내가 스물다섯 살 되는 해 8월 15일. 날씨는 맑았고 더위도 심하지 않았다. 27~28도 정도였을까.

전날 밤, 나는 언제나처럼 비슷한 시간에 잠들었다. 누구의 안내를 받아 갔는지는 모른다. 평안남도 진남포 해변가였다. 도시도 인적도 보이지 않는 바닷가에서 마우리(Mowry·한국명 모의리) 선교사를 만났다. 말없이 나를 이끌고 큰 창고 앞으로 갔다. 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시신들이 작은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모두가 일본 사람들인데 바닷물을 먹은 때문인지 퉁퉁 부어 오른 주검들이었다. 그 옆에도 같은 크기의 창고인데, 선교사를 따라가 창고 문을 열었더니 마찬가지 모습이다. 쌓여 있는 시체들 속에는 대학 동창이었던 E군과 또 다른 친구도 있었다. 철학과 동기인 일본 친구들이다.

정말 충격적인 꿈이었다. 그 놀라운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장면이 너무 선명하게 남았다. 그러고 잠들었는데 다시 새벽녘에 꿈을 또 꾸었다.

오른쪽 산 위로 무척 큰 태양이 넘어가면서 지고 있는데 서쪽이 아닌 동쪽 산이었다. 저렇게 붉고 큰 태양이 어떻게 동쪽 산으로 내려가는가, 하고 놀라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한없이 넓은 농토 한가운데서 소에 연장을 메우고 밭을 갈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옥토였다. 평생 걸려도 다 갈지 못할 정도로 넓은 땅이었다. 곧 어둠이 찾아올 것 같은데….

두 번째 꿈이었다. 식구들이 모여 조반을 먹을 때 꿈 얘기를 했다. 듣고 있던 부친이 내 얼굴을 보면서 처음 듣는 얘기를 했다.

"내가 네 나이쯤 되었을 때 꿈을 꾸었다. 동쪽 산 위로 태양들이 떠올라 오는데 다른 때와 같은 해가 아니고, 고무공 같은 작은 태양이 수없이 많이 올라와 우리 땅에 가득 차더라. 그리고 얼마 후에 소위 한·일 합방이 되니까, 일장기가 우리나라 전 지역을 가득 메우더라. 혹시 오늘 무슨 소식이나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평양까지 가보고 오도록 해라."

평양 도심지까지 갔으나 아무 변화도 없었다. 전차를 타고 시청 앞에 갔을 때였다. 낮 12시 정각이었다. 길가에 있는 가게에서 라디오 소리가 들려왔다. 뛰어내려 가게로 들어섰다. 일본 왕의 목소리가 들렸다. "국내외 모든 지역에서 전쟁을 끝내고 일본군은 무조건 항복한다"는 방송이었다. 믿기 힘든 사실이었으나, 내 귀로 직접 들었으니까,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이 미국에 항복한 것이다.

20리(8㎞)가 넘는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했다. 앞으로 나는 그 넓은 땅을 갈아 밭으로 바꾸어야겠다고. 지금 돌이켜 보면 교육계에서 한평생을 보내라는 뜻이었던 것 같다.

 
 

기고자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구름 보는 시간이 늘어나 좋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발행일 : 2018.08.25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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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는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다. 요사이는 일기예보와 함께 황사나 미세 먼지에 대한 정보가 뒤따른다. 나 같은 늙은이들은 자연히 외출을 줄이고 방에 갇혀 지내는 시간이 길어진다.

그 대신 책상 위에 있는 구름 사진 책을 들여다보거나, 창문을 통해 넓은 하늘에 찾아왔다가 사라져 가는 구름들을 관상(觀想)하는 시간이 길어져 좋다. 몇 해 전에 '앞으로 10년만 더 건강하게 움직일 수 있으면 사진기술을 배워 구름 사진을 찍고 싶다'는 글을 쓴 일이 있다. 그 글의 독자들이 내 심정에 공감했거나 동정했던 것 같다. 국내외에서 출간된 구름 사진 책을 네 권이나 선물로 받았다.

구름을 보기 어려운 날씨에는 그 사진들을 통해 여러 모습의 구름들을 찾아본다. 그리고 시외로 외출을 하거나 휴식시간이 생길 때는 언제나 새로운 형상으로 관광객을 기다리는 구름들과 마음의 교류를 갖는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과 더불어 살다가 자연의 품으로 돌아간다. 어떤 사람들은 자연의 작은 부분인 화초를 사랑한다. 그런 사람들은 착한 마음씨를 찾아 누린다. 많은 사람은 동물을 사랑해 본다. 그런 사람들은 생명에 대한 정과 사랑을 배운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웅장한 산의 기상을 받아들여 강한 의지와 신념을 얻는다. 바다를 사랑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넓은 마음과 가없는 세상을 꿈꾸게 된다.

그런데 삶을 이끌어 주고 함께해주는 자연과 전혀 무관하게 사는 사람도 있다. 자연의 혜택도 모르고 사랑을 느껴보지도 못하는 사람들이다. 내 편견이기를 바란다. 그런 사람들 대부분이 불행하게도 우리가 모두 걱정하는 사회악을 저지르곤 한다. 사회악까지 이르지 않는다고 해도 폐쇄적인 감성과 심정으로 고통을 겪는다. 우울증도 그 하나의 증세일지 모른다. 대자연의 질서를 역행하거나 자연과의 사랑을 단절하기 때문이다.

나는 인적이 드물 정도로 작은 농촌마을에서 살았다. 하늘의 구름을 보면서 자랐다. 아버지를 따라 앞산 꼭대기까지 오르곤 했다. 무한히 전개되는 파란 하늘에 언제나 다른 형태로 태어났다가 자취를 감추는 구름을 보는 것이 소박한 즐거움이었다.

나이 들면서는 여유로울 때면 구름 감상에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길을 떠나 지방산수를 찾기도 했다. 장년기에는 세계여행 중에도 구름 보기를 빼먹지 않았다. 그렇게 구름을 친구 삼아 사는 동안에 나도 모르게 받아들인 교훈이 있다. '욕심 없는 사람이 행복해진다'는 가르침이다.

내가 잘 아는 친지 중에 100세가 넘도록 건강하고 행복하게 장수한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무욕(無慾)의 인생관을 갖춘 사람들이다. 무소유는 그 작은 부분의 하나일 뿐이다.

 
 

기고자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당신은 사랑이 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모르는구먼"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발행일 : 2018.09.08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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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선생은 잘못을 저지르고 부인한테 사과한 적이 없소?" A교수의 느닷없는 질문이었다. "있기는 하지만 나는 절대로 공처가는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 내가 이야기를 먼저 해야 A교수의 고백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옛날얘기를 했다.

1960년대 초에 내가 미국에 가 머물고 있을 때였다.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대통령이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환'화를 '원'화로 바꾸면서 옛날 돈을 모두 무효화시켰던 것이다. 그때 한국에 있던 아내는 내가 몰래 숨겨둔 돈이 있지 않을까 의심이 들었다고 한다. 큰딸과 아들에게 "너희들 나와 함께 아버지 서재에 올라가 책갈피를 들춰보자"고 했다. 책 케이스 속에서 지폐 뭉치를 찾아냈다.

미국에 있는 내게는 "귀국하면 가족회의를 열어 따져보아야 할 사건이 발생했다"고만 했을 뿐 그 내용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집에 돌아와 며칠이 지난 뒤였다. 하루는 아내가 발설하고 애들이 합세해 항의를 하는 것이었다. 궁지에 몰린 나는 "너희들도 이다음에 나 같은 처지를 당해봐라. 내 친구 교수들은 사모님 몰래 비자금을 만드는 게 보통이란다. 그래도 나는 책 케이스에 넣어 두었으니 정직한 편이다" 말하고는 용서를 받았다.

내 얘기를 들은 A교수는 "그 당시에야 누구나 다 그랬는걸. 큰 잘못이 아니지"라면서 웃었다. 그의 얘기는 내용이 좀 달랐다.

어디서 강연을 하면서 "여러분,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아시지요. 부자간이나 형제 사이는 혈연관계입니다. 한번 인연이 맺어지면 죽을 때까지 그 운명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더 큰 피로 맺어진 하나의 민족입니다. 고통과 슬픔을 함께하더라도 공동체 운명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호소했다. 그것으로 끝났으면 좋았다. 그 뜻을 강조하기 위해 "젊은 여러분이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해도 싸우거나 이혼을 하면 그 후부터는 남남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피는 물과 다르다는 예로부터의 가르침이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그 강연을 들은 사람이 A교수의 부인과 가까운 지인이었다. 그날 강연 내용을 부인에게 알려주면서, 그것이 남자들의 공통된 생각이라고까지 과장했던 모양이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A교수의 부인이 "그래, 우리는 헤어지기만 하면 그뿐이지요? 몇십 년의 애정은 아무것도 아니고요"라고 따져 들었다는 것이다. 내가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물었더니 "내가 잘못했다 했지요. 그렇게 화를 낼 줄은 몰랐거든요"라면서 멋쩍어했다. A교수의 성격과 표정으로 보아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을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쉽게 사과하면 되나. 나 같으면 '당신은 사랑이 피보다도 진하다는 사실을 모르는구먼' 하고 응수했겠다"고 했더니, A교수도 "아차, 그걸 내가 몰랐구나"라면서 아쉬워했다.

오늘은 강원도 양구에 갔다가 A교수의 무덤 앞에 서서 그 지나간 얘기를 되살려 보면서 웃었다. 그러면서도 눈물을 닦았다. 정말 좋은 친구였는데.

 
 

기고자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소리는 들리는데 말이 안들린다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발행일 : 2018.09.15 / Why B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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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김동진은 내 중학교 선배이다. 일 년에 한두 차례씩 모교에서 만날 때마다 내가 찾아가 인사를 드려도 반갑게 대해주지 않았다. 청각이 나빠졌기 때문에 거리를 두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후배인 것을 모르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한 번은 내가 옆자리에 가 앉으면서 "제가 후배입니다" 밝혔더니 그다음부터는 마음 놓고 선배 행세를 했다. 심부름을 시키기도 하고, 차 옆자리를 권하기도 했다. 나도 선배의 사랑을 받는 것 같아 기뻤다. 안타까운 것은 귀가 몹시 어두워졌기 때문에 애태우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지내는 동안에 내 청각에도 이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왼쪽 귀에는 보청기를 쓰는 것이 좋겠다고 의사가 권했다. 땅콩 알 정도의 크기인데 그 값이 대단했다. 보청기를 끼면 소리는 커지는데 2~3년 지나니까 음성만 커지지 말의 내용은 구별이 잘 안 된다. '소리는 들리는데 말이 안 들린다'는 단계까지 약해진 셈이다. 최고의 보청기는 두 손을 귀에 대고 듣는 자세다.

청각의 약화는 삶의 자긍심을 위축시키는 것 같다. 상대방의 발음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 음성을 밖으로 내뿜는 사람의 얘기는 들리는데 안으로 말을 삼키는 사람의 얘기는 듣기 힘들었다. 청각이 약한 어르신을 모시고 산 사람은 내 나이를 배려해 큰소리로 말을 해준다.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은 상대방 처지는 아랑곳없이 혼자서 긴 얘기도 한다. 심지어는 "50년 전에 찾아 뵌 일이 있는데 기억하시겠느냐"고 묻는다. 그런 인사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듣지 못하게 나에게만 속삭인다. 50년 젊었어도 알아듣기 힘들 정도의 작은 목소리다. 내 한 친구는 "지금 여러분이 하는 얘기를 저는 듣지 못합니다. 용서하세요"라고 선언한 후에는 자기 일만 했다. 때로는 나를 모시러 온 손님이 차를 운전하면서 뒷자리에 있는 나에게는 관심도 없이 혼자 얘기를 한다. 내가 아무 대답도 안 하면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할 수 없이 "좀 피곤해서 쉬고 싶었다"고 양해를 구한다. 그럴 때는 100세가 되는 노인을 위해서는 사전 교육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한다.

며칠 전이다. 청중 앞자리에 앉아 강단으로 올라갈 차비를 하고 있는데 한 젊은 여성이 다가왔다. 진행을 맡은 직원이다. 내 귀에 대고 다급히 무어라 속삭이더니 사회자석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때는 정말 당혹스러웠다. 무슨 중요한 얘기를 하고 싶었을 터인데 자기 말만 남기고 떠났기 때문이다. 강연을 마치고 무슨 중요한 부탁이었느냐고 물었더니, 선생님 강연을 듣고 싶어 이렇게 많이 모였다는 얘기였다.

그렇다고 강연에 지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내용만 충분히 전달되면 만족할 수 있고 질문은 따로 받으면 된다. 아쉬운 점은 한 가지다. 김동진 선배께 내가 후배 노릇을 했듯이 옆에서 도와주는 후배나 비서가 있으면 좋으련만. 그럼 한 해 더 강연으로 봉사하고 싶은 마음이다.
 
 
기고자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데스크 칼럼] 고독하게 혹은 징글맞게... 죽는 게 뭐라고

  • 김지수 문화부장    
          입력 : 2016.12.16 14:00      
김지수 문화부장
김지수 문화부장
인생이라는 사건의 가장 확실한 팩트는 생로병사다. 태어나서 늙고 병들어 죽는다, 라는 그 웅장하고 간소한 진리에 대해 내가 아는 한, 나는 제대로 아는 게 없다. 최근에 100세를 앞둔 두 분의 노인을 만났다. 생로병사의 팩트 중에 어쩌면 사의 최전선에 있는 분들이었다. 한 분은 ‘백 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을 쓴 김형석 전 연세대 교수(97세), 또 한 분은 ‘나는 엄마와 밥 먹는다'라는 책을 쓴 정성기 씨의 어머니로, 치매를 앓고 있는 일명 ‘징글맘’ 전정금 여사(94세)다.

김형석 교수는 뇌출혈로 쓰러져 눈만 깜빡이는 부인을 23년 동안 돌보았고, 사별 후 홀로 노년을 맞았다. 97세의 홀아비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매무새가 단정했으며, 앉은 자세도 선 자세도 푸른 소나무처럼 꼿꼿했다. 30년간 일주일에 3일간 수영을 하고, 사과와 우유로 소식하고, 매일 밤 장문의 일기를 쓴다. 그는 지금도 책을 내는 성실한 현역 작가다.

김 교수는 노년의 가장 큰 문제를 고독이라고 했다. “90이 넘으면 친구가 사라집니다. 아내도 가버리지요. 세상이 텅 빈 것 같아요.” 장수하니 행복하냐고 물었더니, ‘높은 산을 넘으니, 산 넘는 게 쉬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고 했다. “고통은 아니지만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요. 아들딸도 그 외로움을 몰라요.” 97세의 단독자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은 적막하고 개운했다. 1년만 젊었으면 재혼을 했을 거라는 농담엔 가슴이 아렸다.

‘징글맘’ 전정금 여사는 슬하의 오 남매를 키웠고, 지금은 스머프 할배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효자 아들과 9년째 동거 중이다. 치매에 접어든 지 오래라 두 눈은 미몽을 헤매는 듯했고, 입은 뻥 뚫린 구멍 안쪽으로 잠깐씩 열리고 닫혔다. 대소변도 식탐도 통제하지 못했지만, 정신이 맑아지면 대쪽같은 자세로 아들을 단도리했다. “애비야 도토리묵을 좀 성의껏 맹글어라. 그리고 에미는 그리 빨리 안가니, 마음 단디 먹어라.”

가끔 기도하며 자신을 지키려 애쓰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하나님, 저를 잃지 않게 하시고 편히 이 고통스러운 육체의 짐을 벗도록 도와주소서.” 함께 사는 아들은 가장 큰 문제로 ‘수면 부족’을 꼽았다. “시간 개념이 없어 시도 때도 없이 깨우시니까요. 그래도 약속하신 데로 98세까지 살다 가시면 좋겠어요.” 65세 아들의 말에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났다.

두 분을 가까이서 뵙고 나니 누구의 삶이 더 아름답고 누추하다거나, 누구의 가족으로 사는 게 더 다행이고 불행이라고 단정할 수가 없었다. 철저한 자기 관리로 이상적인 노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김형석 교수의 뒷모습은 의연하나 고독해 보였다. 귀여운 ‘밀당'으로 자식을 통제하며 여왕처럼 ‘생명의 권력'을 관철시키는 전정금 여사는 늙음 위에서 아들과 매번 새로 태어나고 있는 듯했다. 인간의 실체가 ‘독존'이 아니라 ‘의존'이라는 그 증거는 코끝으로 밥 냄새나 똥냄새를 맡는 것처럼 확연했고, 그 치떨리는 생의 공평함에 기이한 안도감이 들었다.

늙음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인가. 데이비드 실즈는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자연은 실로 모욕적인 방식으로 우리에게 암시하고 경고한다.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이빨을 뽑아놓고, 머리카락을 뭉텅뭉텅 뜯어놓고, 시력을 훔치고, 얼굴을 추악한 가면으로 바꿔놓고, 요컨대 온갖 모멸을 다 가한다.’

그 어마어마한 ‘자연사'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두 어른은 스스로 각자의 방식으로(단정한 매무새를 유지하거나 자식으로부터 왕후장상 부럽지 않은 정성 어린 돌봄을 끌어냄으로써), 치열하게 ‘자존'을 지켜가고 있다. “아… 저렇게 늙을 수 있다면, 아… 늙어서 저런 후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은 100년의 시간 동안 죽을 때까지 ‘살아 있겠다는’ 허세 없는 악착이며, 꺼지기 전까지 타오르는 촛불처럼 남은 삶을 허투루 소멸시키지 않겠다는 눈물 어린 분투였다.

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늙어 죽을 생각을 하면 두렵다. 그저 다가올 날들이 무사하기를 빌며, 순하게 세월이 흘러 끝나기를 바랄 뿐. 공포는 서툰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이니, 때로는 ‘시크하게' 죽음을 마주했던 ‘간 큰’ 사람들도 떠올려본다. 미국의 신경의학자 올리버 색스나 일본의 작가 사노요코,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나 중국의 철학자인 왕꾸어웨이같은 사람들. 죽음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자연사'에 승복은 하되, 두 손 놓고 항복하지는 않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본의 작가 사노요코가 쓴 에세이의 제목은 ‘죽는 게 뭐라고', 원제는 ‘죽을 의욕 충만'이다. 올리버 색스는 죽기 전 ‘남은 몇 달을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에 집요하게 매달려 기록했다. ‘두렵지 않은 척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내가 무엇보다 강하게 느끼는 감정은 고마움이다...무엇보다 나는 이 아름다운 행성에서 지각 있는 존재이자 생각하는 동물로 살았다.’ 스티브 잡스는 자신의 생애를 엄선한 전기 작가 월터 아이작슨에 맡겨 영원불멸한 객관으로 보존했으며, 중국의 대학자 왕꾸어웨이는 곤명호 연못 바닥으로 몸을 던지며 자식들에게 “성실하게 살면 굶어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쿨한 유서를 남겼다.

파리에 가면 도심에 유독 공동묘지가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겁 많고 준비가 덜 된’ 인간이 온전히 죽음을 사색하도록 묘지를 친근한 산책 코스로 만든 것이다. ‘파리지앵, 당신에게 반했어요'라는 책에서 묘지 가이드 베이에른 씨의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무덤이 직장인 이 할아버지는 유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 직업의 핵심은 ‘추억'이에요. 기분 좋은 추억이죠… 좋아하는 묘비명이요? 프랑스 소설가 루이스 드 빌모란의 묘비명이에요. 뭐냐고요? ‘사람 살려!’ 이 안에 모든 게 담겨 있죠.”
언젠가 다시 파리에 가면 묘지 가이드 베이에른 씨와 잘 정돈된 묘비 사이를 한번 걸어봐야겠다.



원문보기:
http://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2/13/2016121301116.html#csidx1b0975a4e70ae1d8e8ff475a023c967

 

[Why] 道지사의 첫사랑

조선일보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10.27 03:00

[김형석의 100세 일기]

[김형석의 100세 일기]

지난 월요일 저녁이었다. 좀 일찍 강연 장소에 도착했다. 몇 사람이 와서 내 책에 사인을 부탁했다. 5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이가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펴 보이면서 "일기문의 주인공이 혹시 교수님 자신이 아니시냐"고 물었다. 자주 듣는 독자들의 질문이다. 강연을 시작할 시간이 되었다.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내 책 얘기 하나를 소개했다.

오래전이다. 강원도지사 K의 청탁을 받고 춘천에 있는 도청 강당에서 강연을 하게 되었다. 사회자가 "지사님께서 직접 강사님을 소개하기로 되었는데 갑자기 청와대로 갈 일이 생겼습니다. 가급적 속히 돌아오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하면서 대신 나를 소개해 주었다. 70분에 걸친 강연을 마쳤다. 늦은 시간이기는 했으나 서울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런데 총무과장이 꼭 지사님을 만나 저녁을 같이 하시라고 권했다.

어느 호텔 식당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K 지사가 나타났다. 군 장성 출신으로 강원도지사 임명을 받은 이였다. 식사가 끝날 즈음이었다. 지사가 꼭 나를 보고 싶어 한 이유를 들려줬다. 다음은 K 지사 얘기다.

10여 일 전에 책이 들어 있는 소포를 받았다. 발신인의 주소나 이름은 없었다. 그런데 글씨는 어디서 보아 온 것 같아 뜯어보았더니 책 표지 안에 편지가 들어 있었다. '약속을 어기고 글월을 올려 죄송합니다. 이 책 ○페이지부터 시작되는 일기문을 읽어 보세요. 어쩌면 오래전 우리들의 사연 같아 여러 번 읽었습니다. 그러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눈물자국이 남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슬퍼질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도 잊어야겠기에 이 책을 보내드립니다. 바쁘시더라도 꼭 읽어보세요' 하는 사연이었다.

K 지사는 그날 저녁 늦게까지 책을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고 고백했다. "교수님도 그런 과거가 있으셨어요? 저는 읽을 때마다 울곤 했습니다. 제 첫사랑을 잊을 수가 없었거든요. 정말 사랑했어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 것 같기도 하고요."

내가 "그 책을 가지고 계세요?" 물었더니 "집으로 가져갈 수는 없지요. 책상 서랍에 넣어 두고 열쇠로 잠가 두었습니다. 어제 저녁에도 읽어 보았고요. 교수님과 저녁을 같이하면서 그 얘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래 그 첫사랑 애인에게 연락을 하셨고요?"라고 물었다. K 지사는 "아닙니다. 우리는 헤어질 때 연락을 끊고 서로의 행복을 빌기로 약속했습니다. 아마 행복하게 살 겁니다 . 내가 지사가 된 것을 아니까 소포를 보냈겠지요"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슬픔에 잠겨 있는 표정이었다.

그 책이 출간된 지 60년이 된다. 당시에 많은 독자가 공감해 주었다. 주로 대학생이었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이 젊음과 더불어 자라고 있었다. 착하고 아름다운 영혼들의 숨결이 느껴지는 시기였을까. 그 글을 쓸 때의 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26/2018102601918.html

 

 

    [Why] 나를 감옥에 넣었지만… 보릿고개 시대로 돌아갈 수는 없다

조선일보
  •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10.27 03:00 | 수정 2018.10.27 13:44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46) 박정희(1917~1979)

[김동길 인물 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일러스트=이철원
어느 역사가 말대로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나도 생각한다. 그리고 그 끊임없는 대화의 결과로 어느 정도 미래를 점칠 수 있다고 자부한다. 1948년에 탄생한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의 존재는 앞으로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반드시 역사에 남을 것이고 대한민국을 이야기할 때에는 두 사람 이름이 틀림없이 기억될 것이다. 공화국을 수립하고 1950년에 벌어진 한국전쟁에서 그 공화국을 지켜낸 이승만과, 찢어지는 가난으로 춘궁기가 되면 풀뿌리, 나무껍질로 연명하던 농촌이 세끼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되게 하는데 큰 공을 세운 박정희가 바로 그들이다.

내가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미워한 사람이 박정희였다. 나의 논리는 단순한 것이었다. 군사 쿠데타라는 것은 아프리카나 중동이나 남미 같은 후진국에서나 벌어지는 정치적 불상사라고 믿고 있었고, 그래도 개발도상국이라고 자부하던 대한민국에서 군인들이 총을 들고 일어나 정권을 찬탈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것이 내가 받은 민주 교육의 핵심이기도 하였다. 그는 다섯 번 이 나라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중단 없는 전진'을 강조하며 마치 두발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처럼 전진을 잠시도 멈출 수 없다는 듯이 권력 유지에만 급급한 것으로 내 눈에 비쳤다.

그는 1970년대에 접어들어 드디어 유신 헌법, 유신 체제를 국민에게 강요하며 이에 관련된 포고령을 내리면서 '유신 헌법은 찬성할 자유는 있지만 반대할 자유는 없다'고 못을 박고 유신 헌법을 반대하는 자는 15년 이하 징역이 끝나도 또다시 15년은 공민권을 박탈한다고 선포하였다.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던 나로서는 매우 난처해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어쩔 수 없이 '유신 헌법은 민주 헌법이 아니다'라고 가르칠 수밖에 없었고 대중 강연에서도 서슴지 않고 나의 소신을 피력하였다. 그때 이미 내 마음속에는 15년 징역을 살 각오가 되어 있었다. 예측했던 대로 나는 기관원들에게 연행되었고 서빙고에 자리 잡은 보안사령부 분실에서 1주일가량 조사를 받았다. 나를 취조하던 문관 한 사람은 스스로 이북 출신임을 털어놓으면서 말했다. "김 교수가 무슨 죄가 있습니까. 청와대에서 묶어 오라고 하니 저희 입장도 난처합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앞으로 감옥 생활도 할 만하겠다고 느꼈다.

지금은 역사기념관으로 변모한 서대문 구치소 9사상 18방에 수감되어 살던 어느 날 새벽, 내가 갇혀 있던 한 평도 안 되는 독방에서 매우 기이한 종교적 체험을 하였다. 아직도 새벽인데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쳐 그 독방에 마련된 조그마한 비닐 창문으로 폭풍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뚫고 들어올 것 같은 무시무시한 날이었다. 그 비바람이 얼마나 계속되었을까?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그 위기를 헤쳐내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비바람이 멎고 얼마 뒤에는 찬란한 태양이 솟아오르면서 어디선가 이런 음성이 들려온다고 나는 느꼈다. "사랑하라, 사랑하라, 사랑하라." 그 음성을 내 귀로 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 순간부터 그토록 미워하던 박정희에 대한 증오심이 싹 사라지고 내 마음에는 그에 대한 동정심이 생긴 것이 사실이다.

박정희는 경상북도 구미에서 넉넉지 못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창 시절에 그가 동경한 역사적 인물은 프랑스의 나폴레옹과 우리나라의 이순신이었다. 그는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문경에서 한 3년 교편을 잡았다. 그러나 그는 만주 군관학교를 지망하여 합격하였다. 2년 뒤에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로 전학하여 수석 졸업하였지만, 일본군에 소속되지 못하고 만주군 대위로 있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아마도 그의 꿈이 나폴레옹처럼 군인이 되어 정치적으로도 크게 성공하는 인물이 되는 것 아닐까. 어찌 보면 박정희는 천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여수·순천 반란 사건으로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를 구해 준 것은 백선엽이었다. 그를 5·16 쿠데타 대표로 모신 것은 김종필이었다. 그가 18년이나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김종필과 이후락의 충성 경쟁이 크게 주효했다고 나는 보고 있다. 백두진, 김용환, 남덕우, 이승윤 등 그의 측근으로 모여든 경제 각료들은 당대의 수재였다. 그뿐인가. 일본 육사 출신이 한국 대통령이 된 사실에 감격한 탓인지,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인지 분명하게 알 수는 없지만, 우리보다 경제 선진국이던 일본이 박정희를 적극적으로 도운 사실 또한 그가 타고난 천운의 일부가 아니었을까. 새마을운동은 한국의 농촌에 큰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중동 지역과 동남아에서도 크게 환영받은 것이 사실이다.

1979년 10월 26일, 한국 역사의 큰 획을 그은 '그때 그 사람'은 김재규의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았지만, 그가 임기를 다 마치고 무사히 은퇴했다 하여도 노후가 과연 평화로웠을까. 오늘 우리가 겪는 이 시련도 박정희의 18년 집권과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심혈을 기울여 일군 이 나라의 경제적 번영이 다시 '보릿고개'로 돌아갈 수는 없다 . 문재인 대통령의 '퍼주기' 때문에 한국 경제가 침몰할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박정희 덕분에 나는 이 나라 유명 인사가 되어 90이 넘도록 장수를 누리고 있지만 그 시대가 돌아오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그날이 되돌아오기를 희망합니까?' 하고 누가 물으면 나는 영어로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No, thank you."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26/2018102601934.html

 

 

 

조선일보 

    
입력 2018.10.27 03:00

[魚友 야담]

어수웅·주말뉴스부장
어수웅·주말뉴스부장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라는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 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늘 첫 문장이 어렵습니다. 오늘은 폴란드 시인 비스와바 심보르스카(1923~2012)의 서랍을 엽니다. '두 번은 없다.' 1996년 한림원은 그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면서 '모차르트의 구조와 베토벤의 웅장함'이라고 이유를 썼죠. 번역된 시인데도 투명하고 선명합니다.

다음 주 토요일부터 새로운 섹션을 시작합니다. 금요일에 나온 Friday와 토요일에 발행한 Why?를 합쳐 만드는 새로운 주말 섹션입니다. 오늘 섹션의 7면에는 지금까지 커버 스토리에 등장했던 Why?의 주인공들을 한자리에 표로 모았습니다. 기록이자 역사죠. 2007년부터 3월 31일부터 2018년 10월 27일 자까지, 11년 8개월 동안 모두 569명. 200자 원고지 1만6000장. 요즘 책으로 따지면 25권에 해당하는 분량입니다.

연습 없이 태어나서 훈련 없이 죽는 인생, 그 단 한 번뿐인 삶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말로 전할 때와 글로 옮길 때 우리의 마음과 태 도는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과장과 허풍으로도 악명 높았던 문호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마디 하자면, 내가 이야기할 때는 그냥 이야기예요. 하지만 글로 쓰면 그건 영원히 진심이죠."

다음 호부터 새롭게 시작합니다. '두 번은 없다'가 실린 심보르스카의 번역 시집 제목은 '끝과 시작'. 하나의 끝과 또 하나의 시작입니다. 지켜봐 주십시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0/26/2018102602041.html

 

 

 

[아무튼, 주말] 우리 집에 살던 독일 교환학생은 왜 울었을까

조선일보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11.03 03:00

[김형석의 100세 일기]

김형석의 100세 일기 일러스트
일러스트= 이철원
큰손녀가 며칠 동안 독일에 갔다가 왔다. 오래간만에 연이 소식을 전해 들어 기뻤다.

오래전이다. 우리 집에 고등학교 2학년인 한 독일 여학생이 와서 1년 동안 지낸 일이 있었다. 기독교 기관의 교환 학생으로 왔었다. 내가 연이라는 이름을 붙여주며 우리 부부를 '아빠' '엄마'라 부르라고 했다.

집에 온 다음 날 연이가 아내에게 "엄마, 1년 동안 내가 할 일은 무어야?"라고 물었다. 아내는 얼마 후에 얘기해 줄 테니까 기다려 보라고 했다. 그 애는 집에서 한 가지 가사를 맡아서 해왔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나는 연이에게 "한 달에 네가 쓸 용돈으로 2000원씩 줄 테다. 학비나 책값은 따로 주겠고…"라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 애는 정말 구두쇠였다. 신촌 우리 집에서 서대문까지 버스삯이 아까워 꼭 걸어가곤 했다. 한 번은 나와 같이 버스를 탔다. 차장에게 내가 10원을 주었다. 두 사람의 요금이다. 차장이 그 돈을 받고 지나갔다. 연이가 5원을 꺼내면서 자기 버스삯을 갚으려고 했다. 내가 "네 돈은 넣어두어라. 오늘은 아버지가 내주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형제들도 그렇게 하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좋아서 5원을 도로 지갑에 넣는다. 마치 오늘은 5원 벌었다는 표정이다. 아내에게 연이가 저렇게 절약해서 무엇에 쓰는지 좀 알아보라고 부탁했다.

그 애는 사직공원 옆에 있는 아동병원을 찾아가곤 했다. 그곳에 입원했다가 돌아가는 어린이들은 여러 고아원에서 와 치료를 받는 불쌍한 애들이었다. 연이가 토요일 오후마다 그 병원을 찾아가 애들과 그림도 그리고 노래도 하면서 놀다가 오곤 했다. 그 일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용돈을 줄이고 절약했던 것이다.

1년이 가까워지는 어떤 토요일 오후였다. 내가 집에 들어왔더니 아무도 없는 자기 방에서 연이가 혼자 슬프게 울고 있었다. 내가 방문을 두드리면서 "그래 1년 동안 있다가 떠나게 되니까 섭섭하지?"라면서 위로해 주었다. 연이가 말했다. "아버지, 나 오늘 아동병원에 마지막으로 갔다 왔어요. 다음 화요일에 독일로 떠나기 때문에 다시 못 오겠다고 했더니 애들이 다 울었어요. 나도 울었어요. 집에까지 울면서 왔어요." 참았던 울음이 터졌는지 흐느끼면서 울었다.

나도 마음이 아팠다. '저 애들은 교육다 운 교육을 받았구나'라고 부러운 마음에 숙연함을 느꼈다. 그래서 YS 정부 때, 우리 청소년에게도 봉사활동의 기회와 교훈을 만들어주자고 제안한 적이 있다. 당시 우리 교육계는 학원 폭력이라는 사회적 걱정거리와 싸우고 있었다.

애들을 키워보면 그들의 인생관은 청소년기에 형성된다. 다시 한번 교단에 설 수 있다면 제자들과 함께 눈물을 나누는 사랑을 베풀고 싶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02/2018110201800.html

 

[아무튼, 주말] "소설로 젊은이들 열광케 하고… 그는 '별들의 고향'으로 갔다"

조선일보
  •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11.03 03:00

[김동길 인물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47) 최인호(1945~2013)

[김동길 인물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47) 최인호(1945~2013)
일러스트= 이철원
일제 때 연희전문이 있었고 해방 직후에 연희대학이 생겼다. 그 뒤에 연세대학이 탄생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연전, 연희대, 연세대를 졸업한 학생들이 몇이나 되는지 나는 잘 모르지만, 그중에서 오늘의 한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 세 사람을 고른다면 나는 시인 윤동주와 아나운서 김동건, 작가 최인호를 들겠다. 오늘은 나의 제자 최인호에 대하여 몇 마디 적어볼까 한다.

최인호는 1945년 10월 서울서 태어났다. 그는 자기의 가족에 대하여 말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 때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독학으로 변호사 자격을 얻어 변호사 일을 보다가 월남하였다. 그의 부친 성함은 최태원. 그는 사형수 조봉암의 변호인으로 그 당시로는 매우 힘겨운 일을 훌륭하게 해냈다. 그의 변론을 듣던 방청객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는 말도 전해지고 있다. 워낙 술을 좋아해서 최인호가 아직도 국민학교 학생이던 때 세상을 떠났다.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지만 병명조차도 올바르게 파악되지 못했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그 병이 간경화로 판명되었다고 들었다. 최인호는 3남3녀 중에서 둘째 아들이었는데 젊어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짐을 그의 어머니가 걸머지고 모진 고생을 다 하였다. 그런 처지에서도 아이들을 다 대학에 보낼 수 있을 만큼 그의 어머니는 여장부였다.

최인호는 서울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1963년 단편 '벽구멍'으로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여 문단에 고개를 내밀었고, 이후 단편 '견습환자'가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내가 최인호를 가까이 알게 된 것은 '연세춘추'의 주간으로 임명되어 학생들의 글을 받아 그 신문에 게재하게 되면서부터다. 몸집이 크지 않으나 깨끗한 표정의 최인호의 얼굴에는 희랍의 조각을 연상케 하는 아담한 모습이 있었다. 그는 별로 말이 없었다.

그가 작품을 쓰고 또 쓰던 그 시절 한국의 젊은이들을 열광케 한 그의 수많은 작품 가운데서도 '바보들의 행진' '별들의 고향' '도시의 사냥꾼' '해신' 등은 아직도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다. '해신'은 고대 그리스의 신화 포세이돈과 장보고를 대비시킨 작품으로 위대한 한국인 장보고를 부각시킨 것이었다. 그의 작품들은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어진 것들이 많은데 '바보들의 행진' '해신' '별들의 고향' 등이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최인호를 마지막 만났던 그날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떤 사람의 초대를 받아 조선호텔 나인스게이트에 갔을 때 우연히 거기서 그를 만났다. 그가 병상에 쓰러지기 전의 일이었다. 그의 얼굴은 많이 수척한 편이었으나 양복을 깔끔하게 입고 화사한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자기 친구와 함께 거기서 점심을 먹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기의 친구에게 나를 소개하는 것이었다. "내가 가장 존경하는 나의 스승이셔." 물론 나로서는 그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만, 그 한마디에 교수 생활의 보람을 처음 느낀 것은 사실이다.

그는 침샘 주변에 암이 생겨 더 이상 글을 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일단 붓을 꺾어야 했다. 그는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글을 쓰고 싶다는 자신의 간절한 소원을 털어놓았다. 그는 요절한 소설가 김유정이 죽음을 열흘 앞두고 쓴 편지를 인용하며 "참말로 다시 일어나고 싶다"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김유정의 그 편지를 읽을 때마다 나는 펑펑 울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자기의 가난하던 젊은 시절을 회고하면서 릴케의 시처럼 "위대한 장미꽃이 되어 가난뱅이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한 적도 있다.

9월의 어느 날 최인호는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났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는 오랜 사색과 고뇌 끝에 천주교에 귀의하여 땅 위에서의 그의 삶의 끝을 신앙으로 마감하였다. 더없이 착하고 아름답던 그를 생각하면서 나는 영국 시인 테니슨의 마지막 시 한 수를 읊조리고자 한다.

"해는 지고 저녁별 반짝이는데/ 날 부르는 맑은 음성 들려오누나/ 나 바다 향해 머나먼 길 떠날 적에는/ 속세의 신음 소리 없기 바라네/ 움직여도 잠자는 듯 고요한 바다/ 소리 거품 일기에는 너무 그득해/ 끝없는 깊음에서 솟아난 물결/ 다시금 본향 찾아 돌아갈 적에/ 황혼에 들여오는 저녁 종소리/ 그 뒤에 밀려오는 어두움이여/ 떠나가는 내 배의 닻을 올릴 때/ 이별의 슬픔일랑 없기 바라네/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넘어/ 파도는 나를 멀리 싣고 갈지나/ 나 주님 뵈오리, 직접 뵈오리/ 하늘나라 그 항구에 다다랐을 때. "(속세를 떠나)

글을 써서 우리 모두를 위로하기 위하여 그는 살았다. 그러기 위해 힘겨운 삶을 꾸려나가야만 했다. 그의 얼굴에는 탈속한 수도자의 모습이 보이기도 했다. 그는 누구도 미워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싶어서 그의 최선을 다하였다. 그의 최후가 슬픈 것만은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일러주고 떠났다. '인생은 괴로우나 아름다운 것'이라고.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02/2018110201882.html

 

 

[아무튼, 주말] 유한양행 설립… 재산 전액 기부 유언 남긴 柳一韓의 삶을 청년들에 알리고 싶은 까닭

조선일보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11.10 03:00

[김형석의 100세 일기]                

/일러스트= 이철원
지난 3일 인문학 강의를 하러 강원도 양구에 다녀왔다. 양구와 춘천에서 온 수강생들, 서울서 찾아온 월간지 손님들이 아늑한 강의실을 채우고 있었다. 정각 오후 2시였다.

사회자가 "오늘도 세 분에게 책을 드리겠는데 '내가 가장 못생겼다'고 생각하는 분은 손을 드세요"라고 했다. 모두가 웃었다. 손을 든 사람이 예상보다 많았다. 여자들도 높이 손을 들었다. 책을 받기 위해 체면을 생각하지 않은 것 같다.

저자인 내가 시상(?)을 했다. '유일한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책이다. 나는 지금까지 많은 책을 썼다. 그러나 내가 청년과 기업인에게 무엇보다 권하고 싶은 책은 유일한(1895~1971)의 전기이다. 나의 어떤 책보다도 이 책에서 얻는 교훈이 국민 모두를 위해 필요하다. 청년의 용기와 희망은 물론이고 경제·사회와 기업인을 위한 고전적 의미도 갖는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내 생애와는 어울리지 않으나 집필했던 것이다. 그 한 부분을 소개한다.

1971년 4월 8일. 유일한의 장례식이 끝나고 한 달쯤 뒤였다. 궁금했던 고인의 유언장이 발표되었다. 당시 유일한과 유한양행의 재산은 지금의 큰 기업체 자산과 비슷했다. 국민적 관심을 집중시켰을 정도였다.

'(하나뿐인) 아들 일선에게는 대학 교육까지 시켰으니까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라. 손녀 일린에게는 대학 졸업까지 학자금으로 나의 주식 배당금 가운데 1만달러 정도를 마련하라. 딸 재라에게는 유한중고등학교 구내에 있는 5000평 대지를 상속하되 유한동산으로 꾸며서 학생들 모두가 자유로이 즐길 수 있도록 당부한다.' 실제로는 소유가 아닌 학생들을 위해 관리해 달라는 뜻이었다. '내 소유인 유한양행 주식 14만941주 전부를 재단법인 '한국사회 및 보육신탁기금'에 기증함으로써 뜻있는 사회사업과 교육 사업에 쓰도록 하라'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본인 재산 전액을 교육과 사회사업에 남긴 것이다.

그가 남겨놓은 유품도 거의 없었다. 유일한은 자신을 위해서는 지극히 검소했던 편이다. 생전에 많은 재산을 사회에 남겨 주었다. 딸 재라씨는 나도 만난 적이 있으나 부친의 유지를 따라 검소하게 살았고 100억 이상의 유산을 사회에 기증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도왔고 6·25전쟁 중에도 애국적 활동을 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알리지는 않았다. 역사가들이 찾아 그 유지를 전해 기록에 남겼을 정도이다.

지금 우리는 경제적 시련과 난관을 치르고 있다. 유일한의 기업정신과 애국심이 그립다. 그것을 계승할 수 있다면 이미 부유한 나라가 되었을 테고 국가의 발전과 번영이 선진국 수준에 도달했을 것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09/2018110901656.html

 

 

 

[아무튼, 주말] "정말 김일성의 맹장 수술을 하셨습니까?"

조선일보
  •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11.10 03:00

[김동길 인물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48>장기려(1911~1995)

1940년대 평양에 있던 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취임한 젊은 의사가 명의라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그 의사가 바로 장기려였다. 그는 해방되고 북한의 제1인민병원 원장으로 추대되었다. 환자를 돌보는 것을 천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월남할 생각도 못 하고 밀려오는 환자들을 치료하는 힘겨운 나날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장기려
일러스트=이철원
내가 그의 이름을 다시 듣게 된 것은 월남한 사람들이 장기려가 김일성의 맹장 수술을 하였다는 소문을 전해 주었을 때였다. 그를 직접 만나서 한번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다. "정말 김일성의 맹장 수술을 하셨습니까?" 장기려는 '그렇다', '아니다'라는 대답은 않고 다만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무척 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그중에 예수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서슴지 않고 나는 '장기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의 표정이 그렇고 말솜씨가 그렇고 행동거지가 그렇다.

그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에서 부유한 농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어서 장기려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출생하여 성장하였다. 그는 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된 그해 11월에야 둘째 아들 장가용의 손목을 잡고 단둘이 월남하였기 때문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연세대의 수학 교수 장기원이 그의 사촌이라고 들었다. 미국에 살던 장 교수의 딸 장혜원과 그의 남편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미국에 여행을 왔던 장기려가 그 조카딸 집에 묵었을 때 장기려가 하는 말이 좀 수상하였다. "미국에 오면 나는 달을 볼 재미가 없어." 그 말을 의아스럽게 생각한 사위 임순만이 "왜 달을 볼 재미가 없으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월남한 장기려가 남한에서 보는 달은 북한에 있는 그의 아내가 보는 같은 달이지만, 뉴욕에서 보는 달은 그 달이 아니기 때문에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의 그런 지극한 사랑이 있을 수 있다면 그것이 천국이 아닐까 생각할 때 누구의 가슴인들 뭉클하지 않을 것인가. 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는 월남하여 하늘나라로 떠나기까지 45년을 독신으로 살았다.

장기려의 성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또 하나의 일화가 있다. 그는 어느 큰 회사의 초청을 받아 직원들에게 강연한 적이 있었는데 강연이 끝나고 그 회사에서 수표가 든 봉투를 한 장 건네받았다. 그가 밖으로 나오는데 거지 한 사람이 나타나 좀 도와 달라고 손을 벌렸다. 장기려는 서슴지 않고 자기가 받은 그 봉투를 그 거지에게 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거리의 천사는 그 봉투를 건네준 이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받아 가지고 갔는데 그 수표를 현금으로 바꾸려고 은행 창구에 갔더니 그 수표에 적힌 액수를 보고 깜짝 놀란 행원이 '어떻게 이런 큰돈을 수표로 받았느냐'고 물었더니 어떤 신사 한 분이 이 수표가 든 봉투를 내게 주어서 받았을 뿐이라고 대답하였다. 우선 경찰에 연락하고 그 수표를 추적하니 어느 회사가 의사 장기려에게 강사료로 준 수표가 틀림없었다. 아마도 그 회사는 강사료에 더하여 하시는 일에 보태 쓰시라고 좀 큰 금액을 드렸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 수표를 도로 찾아가라는 연락이 장기려에게 전해졌다. 그 수표를 찾으러 가는 며느리에게 그는 당부하였다. "네가 그 돈을 찾아서 한 푼도 남김없이 그 가난한 사람에게 다 줘야지, 한 푼이라도 네가 집에 가지고 돌아오면 너는 내 며느리가 아니다"라고 엄하게 일러 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손목 잡고 월남한 둘째 아들을 훌륭하게 키워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의 교수가 되게 하였다고 들었다. 월남하여 부산에 정착한 그는 거창고등학교를 설립한 목사 전영창과 함께 복음병원을 거기 세우고 원장으로 취임하여 25년 동안 성심껏 봉사하였다. 1969년 마침내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인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창설함으로써 이 나라 의료보험제도의 선구자 역할을 하였고, 가난한 환자를 돌보기 위하여 수정동에 '청십자병원'을 설립하였으며, 드디어 '청십자사회복지회'를 창립하여 영세민 구호 활동에 힘을 모았다. 이런 공로로 그는 '막사이사이상'을 수상하기에 이르렀고 성금으로 받은 2만달러는 고스란히 병원에 기금으로 희사하였다. 그는 한국 교회의 세속화를 안타깝게 생각하던 나머지 부산에 옮겨온 평양 산정현교회를 떠나 '부산모임'이라는 작은 모임을 하나 시작하여 교회 없는 교회를 발족시켰다.

그가 이끌던 '종들의 모임'은 무소유로 일관하면서 예수의 삶을 그대로 본받으려고 노력하였다. 기성 교회를 떠난 그는 성경 공부에 힘을 쏟아 해마다 '여름성경공부모임'을 마련하여 나도 어느 해 그 모임에 강사로 초빙된 적이 있다. 그때 만난 장기려는 예와 다름없이 예수의 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아름다운 영혼의 사람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지금도 그대로 기억한다.

그는 1995년 크리스마스 날 새벽에 조용히 눈 을 감고 그토록 사모하던 하늘나라로 떠났다. 우리는 장기려를 천국으로 환송하였고 천국에서는 그를 환영하는 조촐한 모임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의 천진난만한 미소에서 우리는 여러 번 하늘나라를 보았고 그 미소는 죽음이 삶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일깨워 주기도 했다. 그가 태어난 한국 땅에 태어난 것은 큰 축복이라고 믿는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09/2018110901834.html

 

 

 

[아무튼, 주말] 막내딸의 아들이 결혼했다… 미국으로 축의금을 보냈다

조선일보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11.17 03:00

[김형석의 100세 일기]

[김형석의 100세 일기]
일러스트=김성규
100세 넘으면 무슨 돈으로 사나?

미국에 사는 막내딸의 아들이 지난 주말 결혼했다. 그 애가 어렸을 때 자동차 옆자리에 앉아서는 "할아버지 귀를 만져보고 싶다"고 했다. 그러라고 하면서 안아주었더니 싱긋 웃었다. 내가 "이쪽 귀도"라면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두 손으로 내 두 귀를 잡아보며 좋아하던 옛날이 있었다.

 
그 애가 자라 의과대학 공부를 마치고 전문의 시험을 통과했다. 병원에 근무하게 되었고, 결혼도 하는 것이다. 결혼식에 참석할 수 없어 얼마 안 되는 축의금을 보냈다.

오늘 아침에 막내딸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에게 생활비라도 보내드리고 싶은 마음인데 애들을 위한 사랑의 선물이라서 감사히 받겠다는 정성 담긴 목소리였다.

10년쯤 전이다. 막내딸의 언니인 셋째가 전화를 걸어왔다. 아버지에게 부탁이 있다기에 귀담아들었다. 사연은 예상 밖이었다. 한국의 어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고 같이 살기로 했다가 뜻대로 안 되니 다른 아들 집으로 갔으나 돌보아 주지 않아 고생한 이야기, 잘 아는 은사가 사업에 실패한 아들의 보증을 섰다가 살던 집까지 차압을 당하고 늙어서 길거리로 나앉았다는 이야기 등을 하면서 내 노후를 걱정했다.

두 딸과 의사인 두 사위가 상의를 하였다. 내가 틀림없이 100세까지는 살 테니까 노후의 생계 문제에 잘 대처해 두라는 조언이었다. 자식들에게 유산 줄 생각도 하지 말고 꼭 챙겨 쥐고 살라는 것이다. "어머니가 있으면 걱정을 안 해도 되는데 아버지 혼자니까 염려가 된다"고도 했다. 내가 웃으면서 "그렇게 하겠다. 그러나 100세까지야 살겠느냐?"고 했더니, 그래서 걱정이라는 것이다. 틀림없이 100세를 넘긴다는 얘기였다.

사실은 내게도 걱정이 있었다. 자녀들에게 주고도 싶고, 맡기고 나면 편하기는 하다. 그러나 늙어서 자녀들 도움을 청하는 일은 더욱 부담스러워진다. 그렇다고 고령에 재산을 관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처음에는 95세까지를 생각했다가 후에는 98세까지의 생활비는 준비해 두기로 했다. 그런데 어쩌다 보면 100세를 넘길 듯한 예감이 든다. 수입을 더 만들어야 할 것 같다. 작년에는 두세 기관에서 상금을 받았다. 그 돈이면 3~4년은 걱정 안 해도 된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번 돈이 아니다. 내가 갖거나 나를 위해 쓰라는 돈이 아니다. 그래서 사회에 환원하기로 했다.

100세 이후 여생에 필요한 생활비는 남겨두었다. 오래 살기 위해서라도 주어지는 일을 계속 해 야겠다. 열심히 벌어서 내 힘으로 살다가 남는 재산이 생기면 필요한 곳에 주고 가려 한다. 재산은 소유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값있게 쓰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참다운 의미의 부자는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사회에 많이 주는 사람이다.

남은 세월 열심히 일하겠다. 수입이 생기면 나를 위해서는 적게 갖고 이웃을 위해서는 많이 주는 생활을 이어가기로 하자.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16/2018111601640.html

 

 

 

[아무튼, 주말] 효도해! 집 줄게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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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8.11.17 03:00

[주말의 about] 孝는 무엇인가

이제는 '효도 계약' 시대… 5074명 설문조사 해보니 세대 차이 뚜렷
부모 찾는 횟수·부양비용 구체적으로 담고… 애매한 표현은 삼가야

58년 개띠들이 은퇴한다. '부모를 섬긴 마지막 세대이자 자식에게 버림받는 첫 세대'라고 그들은 말한다. 100세 시대를 바라보는 공포가 이 말에 담겨 있다. 자녀가 결혼이나 분가할 때는 돕겠지만 부양받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한국 사회가 받들던 효(孝)라는 덕목의 퇴장처럼 비치기도 한다.

 
중장년은 교과서 속 어머니의 말을 늘 반대로만 하다 마지막에 후회하는 '청개구리의 슬픔'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효도를 배웠다. '의좋은 형제'를 통해 우애도 익혔다. 그 유효기간이 끝나간다. '효는 당연히 지켜야 할 인륜'이라는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다.

효도해! 집 줄게
일러스트=안병현

자식과 부모는 법정에서 어색하게 등을 돌렸다. 재판이 열리는 동안 말 한마디 나누지 않았다. "어느 날 딸이 이제부터 모실 테니 미리 증여를 좀 해달라고 해요. 사위 놈 사업이 어렵다며 얼마나 보채는지…." 60대 박모씨는 지난해 노후 자금 2억원이 든 통장을 딸에게 건넸다. 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자 잠시나마 머뭇거린 자신이 부끄러웠다고 한다.

딸 부부는 다음 명절부터 연락이 뜸해졌다. 전화해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기를 수차례. 같이 살자는 약속은 핑계를 대며 차일피일 미뤘다. 정년 퇴임 후 생활비를 달라고 요구했지만 형편이 어렵다는 소리만 돌아왔다. "불효는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지, 내 자식이 이럴 줄은 몰랐어요. 아들놈하고 며느리는 '왜 상의도 없이 돈을 줬느냐'며 눈에 불을 켜고 대들더군요."

부모와 자식이 부양 문제로 갈등하며 법정 소송을 벌이는 사례가 10년 전 150여 건에서 지난해 255건으로 늘었다. 대부분 부모가 자식에게 재산을 증여했는데 왜 모른 체하느냐며 토해내거나 부양을 책임지라고 다툰다. 차마 법적 대응은 못 하고 가슴앓이하는 경우까지 더하면 부지기수다. 한국가정법률상담소에 접수된 부양 관련 상담 건수는 해마다 폭증하고 있다.

계약이 된 효, '불효자 방지법'도 등장

이런 다툼을 막으려고 '효도 계약'을 맺기 시작했다. 부모와 자식이 서로 갑과 을이 돼 증여하고 그 대가로 효도를 약정하는 것이다. 일종의 보험과 같아 부모는 심리적 위안을 얻는다. 법무법인 세종 김현진 변호사는 "증여를 생각하며 로펌을 찾는 10명 중 4명은 효도 계약서를 쓴다"며 "수십억 자산가만 오는 게 아니다. 불안한 경제 상황과 맞물려 다양한 사람들이 효도 계약에 관심을 보인다"고 했다.

한국 사회에 '효도 계약'이 본격 등장한 것은 2015년. 그해 12월 대법원은 부모를 잘 모신다는 조건으로 부동산을 물려받고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아들에게 재산을 돌려주라고 판결했다. 민법은 '증여한 재산은 반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대법원은 효도 계약이 증여 계약을 해제할 수 있는 '부담부증여(負擔附贈與)'라고 판단해 길을 터줬다.

'58년 개띠'는 100만명이 넘는다. 이 베이비붐 세대는 산업화와 고도성장, 군부 독재와 민주화 운동, IMF와 정리 해고를 겪었다. 그들이 은퇴를 시작하면서 효도 계약 이야기가 부쩍 늘었다. 자식에게 이 말을 꺼내기가 쉽지는 않다. 결혼을 앞둔 자녀를 둔 최모(60)씨는 "나이가 들수록 자식 눈치가 보이는데, 자식이 '나를 못 믿느냐'고 생각할 것 같아 조심스럽다"고 했다. 효도 계약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몇 번이나 삼켰다는 것이다.

최씨는 장사로 번 돈 1억원을 아들의 전세금에 보탰다. 그런데 통장 잔고가 바닥을 보이자 앞이 캄캄해졌다. "아들이 매달 돈을 보낸다고 하지만, 주변에선 며느리가 어깃장을 놓는 경우도 있고 부모와 자식이 다툰다는 뉴스도 들려 가슴 철렁할 때가 많다"고 했다. 부모 세대는 '자식을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배웠다. 자식이 결혼이나 이사, 사업 등을 이유로 손을 벌리면 주머니를 탈탈 털어서 돈을 건네는 게 일반적이었다.

최근 효도 계약서를 쓰는 부모들은 다르다. 변호사 등 제3자부터 찾는다. 증여할 때 효도 관련 조항을 삽입하는 게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법무법인 민주 서정욱 변호사는 “부모 마음과 달리 자식이 언짢아하는 경우도 있다”며 “자식에겐 ‘증여 시 혜택과 부양 조건이 지켜지면 문제가 없다’고 여러 번 강조한다”고 했다.

좋은 효도 계약은 무엇보다 구체적이어야 한다. 김현진 변호사는 “자녀가 1년에 몇 차례 방문해야 하는지, 부양비나 치료비는 얼마나 주는지 등을 명시하는 게 좋다”며 “막연하게 쓰면 제대로 이행했는지 가늠하기 어려워 법적 분쟁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무엇이 됐으면 좋겠다’ ‘형제끼리 우애를 지켜라’ 같은 기원(祈願)은 금물이다. ‘구체적 계약 내용을 지키지 않을 경우 재산을 반환한다’는 내용은 꼭 담으라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국회는 한발 더 나갔다. 이른바 ‘불효자 방지법’을 발의한 것이다. 불효자 방지법에는 ‘부모 재산을 물려받은 자식이 부양 의무를 이행하지 않거나 부모를 상대로 패륜 범죄를 저질렀을 경우 재산을 돌려줘야 한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노명선 성균관대 로스쿨 교수는 “윤리와 도덕처럼 추상적 영역에서 머물던 효도가 법과 계약이라는 현실 영역으로 진입한 것”이라고 했다.

설문조사로 드러난 세대 격차

효도 계약
효도가 법과 계약의 문제가 된 건 경제 문제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주말’은 이달 초 SM C&C 설문조사 플랫폼 ‘틸리언 프로(Tillion Pro)’에 의뢰해 20~60대 남녀 5074명을 설문 조사했다. ‘효도한다고 느낄 때는 언제인가’란 물음에 4명 중 1명은 ‘경제적 지원을 할 때’라고 답했다.

세대 차이가 뚜렷이 나타났다. ‘법적 효도 계약이 필요하다’는 데 가장 큰 공감을 나타낸 그룹은 60대 여성(33%)이었다. 50대 여성(32%), 40대 여성(31%)이 뒤를 이었다. 다른 연령층 남성보다 7~9%가량 높은 수치다. 김봉석 성균관대 사회학과 초빙교수는 “여성은 평균수명이 남성보다 긴 데다 현실적인 삶에 대한 고민도 상대적으로 많다”며 “나이가 들수록 경제력을 우선 가치라고 여기는 것”이라고 했다.

‘효도는 의무인가’라는 문항엔 50대 남성(88%)이 가장 크게 공감했다. 남자가 여자보다, 고연령이 저연령보다 의무라고 답하는 비중이 높았다. 여성은 20대(61%)가 가장 낮았고 30대(67%), 40대(70%) 순으로 나타났다. 틸리언 오남경 팀장은 “50대 남성은 부모를 섬기는 마지막 세대라는 자의식이, 반대로 여성은 효도가 시댁 쪽에 국한돼 있다는 불만이 응답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부모의 노후를 책임져야 하느냐’는 물음에서도 세대 격차가 드러났다. 50~60대는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응답이 45%로 나타났다. 20대는 22%, 30대 24%, 40대도 35%로 상대적으로 낮았다. 2040 세대가 부모에게 드리는 적정 용돈(생활비)은 매달 10만~30만원(38%), 30만원 이상(23%), 50만원 이상(15%), 100만원 이상(5%) 순이었다. ‘안 드린다’는 응답은 5%였다. 신정일 서울가정법원 공보판사는 “50~60대는 대체로 장남이 재산을 물려받고 부양을 전담한 세대”라며 “자식 세대는 그렇지 않아 충돌이 생기는 것”이라고 했다.

유교 문화는 급격히 해체되고 있다. 조상을 섬기는 방식부터 달라졌다. 명절에 차례를 지내지 않고, 벌초는 대행 업체에 맡긴다. 제사가 많은 집에서는 편의상 하루에 합쳐 지내기도 한다. 살아 있는 부모에 대한 효도도 예외가 아니다.

효와 부양에 대한 세대 차가 갈등을 낳고 있다. 국민연금이 대표적이다. 20~30대는 평생 연금을 붓다 막상 받아야 할 시기가 되면 연금 기금이 동나지 않을까 염려한다. 소득대체율을 올리고 보험료율을 묶으면 2054년쯤 고갈된다는 전망이 나오자 젊은 계층이 크게 반발하기도 했다. 직장 입사 2년 차인 김모씨는 “국민연금을 적게 내고 많이 받는 부모 세대와 달리, 미래 세대는 많이 내고 적게 받는 구조라 불합리하다”고 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국민연금을 환급하고 의무 가입을 폐지해달라는 청원이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진정한 효도란?
효도 계약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 중 부동산이 있는 사람은 59%. 이들의 평균 재산은 1억2000만원이다. 그러나 상대적 노인 빈곤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10.6%의 4배 수준인 42.7%로 회원국 중 1위다. 자식에게 재산을 증여하지 않으면 노인 빈곤율이 크게 낮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임춘식 전국노인복지단체연합회 회장은 “증여 대신 주택 연금이나 농지 연금으로 돌리면 궁핍하지 않을 노인이 많다”고 했다.

전문가들은 적절한 대안 중 하나로 효도 계약을 꼽는다. 이상혁 하나은행 상속증여센터장은 “증여를 할 때 간단한 효도 계약을 병기하면 노인 빈곤율과 고독사 등을 낮출 수 있다”고 했다. 김현진 변호사는 “효도까지 계약을 한다는 식으로 비판할 게 아니라 가족 분쟁을 예방하는 수단으로 바라봐야 한다”며 “자식이 먼저 효도하겠다는 마음을 담은 조항을 말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효도 계약은 공짜가 아니다. 돈이나 부동산 같은 재산을 대가로 한다. 그래서 재산이 부족한 이들은 상실감을 토로한다. ‘아무튼, 주말’은 서울 지하철 1호선 역사와 탑골공원, 노인정 등지에서 설문 조사에 담지 못한 70~80대를 만났다. 정해진 목적지 없이 무료 전철을 타고 떠돌거나 장기판이 벌어지는 뒷골목을 전전하며 외로움을 달래는 노인들이다.

이들은 ‘자식들에게 더 주지 못해 미안하다’면서도 ‘돈이 없어 버려진 신세가 됐다’는 얘기를 했다. 탑골공원에서 만난 민모(82)씨는 “자식네 집에서 살지만 며느리에게 밥을 달라고 하기 민망해 무료 급식을 먹으러 온다”며 “자식 내외가 무시하듯 말하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말했다. 서울 성동구 한 노인정에서 만난 최모(78)씨는 “남들만큼 못해준 것만 기억나 자식에게 미안하다”면서도 “효도라는 단어도 생각 안 해본 지 오래”라고 했다.

전문가들은 재화뿐 아니라 ‘가치 상속’에 눈뜨는 사회가 돼야 한다고 말한다. 법무법인 헤리티지의 최재천 변호사는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를 겪은 일본이나 선진국인 미국에선 가문의 명예, 정신, 가치관을 승계하는 문화가 정착돼 있다”며 “이런 무형의 가치를 발전시키는 게 상속의 본래 취지 ”라고 했다.

가치 상속을 위해선 세대 교류와 소통이 더 활발해지고 노인의 지혜가 대접받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게 전문가 의견이다. 석재은 한국노인복지학회 회장은 “노후 소득 보장과 적절한 일자리 제공이 맞물려야 노인에 대한 인식이 개선될 수 있다”며 “이를 바탕으로 경제적 상속 뿐 아니라 정서적 교류를 가능케 할 장치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16/2018111601825.html

 

 

 

[아무튼, 주말]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 말하리라"

조선일보
  • 김동길 단국대 석좌교수·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11.24 03:00

[김동길 인물에세이 100년의 사람들] (50) 천상병(1930~1993)

천상병 일러스트
일러스트= 이철원
천상병을 알고 친하게 지내게 된 것이 우연만은 아니다. 우리 역사에 드물게 나타나는 기인이라고 일컫는 인물들을 나는 그리워한다. 사육신이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삼각산에 들어가 글을 읽던 김시습이 책을 다 태워버리고 미치광이 짓을 하며 살았다고 들었다. '술 한 잔에 시 한 수'라는 한마디로 널리 알려진 김삿갓 또한 많이 흠모했지만, 그가 살았다는 유적지를 한번 둘러보았을 뿐이다.

1967년 속칭 동백림간첩사건이 터졌을 때 유럽 등지에서 혐의자들을 잡아오려고 혈안이 된 정보원들이 추태를 부리기도 하였다. 천상병의 이름을 그 사건을 계기로 기억하게 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언젠가 그를 종로에서 마주친 것이 처음 만남이었다. 나를 알아보고 "선생님, 돈 가진 게 있으면 이백원만 주세요"라며 미소 짓던 그가 시인 천상병이라는 사실을 나도 알아보고, 그에게 천원 한 장을 건네준 것이 우리 만남의 시작이었다. 그는 동백림사건에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받고 6개월이나 고문을 당하고 겨우 풀려났지만, 그로 인하여 몸이 망가지고 정신이 혼미해져 앞으로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라는 소문도 자자하였다. 그는 나보다 두 살 아래였다. 좀 더듬기는 했지만 매우 교양 있는 말로 언제나 형님처럼 나를 대하여 주었다. 그를 초대한 것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내 집에 와서 그는 자기의 형편과 처지를 대강 알려 주었다. "선생님, 저는 전기 고문을 너무 심하게 받아서 정자가 다 죽었답니다. 그래서 결혼은 해도 애를 낳지는 못한답니다." 그는 투박하게 말을 이어갔다. 억울하게 짓밟힌 비참한 젊은 날을 살아야 했지만, 그의 마음은 순진하다 못해 순결하였다.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들에게 신세 지는 것이 싫어서 천상병은 누구에게도, 심지어 잘사는 형제들에게도 손을 벌리는 일이 없었다. 그에게는 언제나 막걸리 한두 잔 살 수 있는 돈이면 족하였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와 한잔 나누는 것도 못 하고 집에 있던 '조니워커' 양주 한 병을 그에게 선사하면서 "술을 몹시 좋아한다며?"라고 했더니 멋쩍은 웃음만 보여주고 대답은 하지 않았다. 천상병은 언젠가 이런 시를 읊은 적이 있다. 제목은 '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

 
"아버지 어머니는 고향 산소에 있고/외톨배기 나는 서울에 있고/형과 누이들은 부산에 있는데/여비가 없으니 가지 못한다/저승 가는 데도 여비가 든다면/나는 영영 가지도 못하나?/생각느니, 아 인생은 얼마나 깊은 것인가." 이 시 한 수를 읽으면서 나는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울었다. 그는 얼마 뒤에 내 집에 또다시 찾아와 서로 만나게 되었다. "선생님, 지난번 주신 양주는 제가 한 모금도 못 마셨습니다. 우리 집사람이 '이건 비싼 술이니 팔아서 막걸리나 마시는 게 옳다'고 하여 저는 맛도 못 보고 그 술을 아내가 팔았답니다."

그는 일본 효고현 히메지에서 태어나 거기서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 2학년 때 해방을 맞아 가족과 함께 귀국하여 마산에 정착하였다. 중학 5학년 때 유치환의 추천을 받아 '강물'이라는 시를 '문예'라는 잡지에 발표하였고 1952년에는 '갈매기'가 시인 모윤숙의 추천으로 또다시 '문예'에 게재되어 시인으로서의 추천받는 일이 완료되었다. 그는 전쟁 중에 서울상대에 입학하였지만 졸업은 하지 못했다. 학생 때부터 영어에 능하던 그는 미군 통역으로 일하기도 하였고 영어 서적들을 여러 권 번역하기도 하였다. 아마도 그가 정식으로 취직하여 직장을 가져 본 것은, 뒤에 서울시장이 된 김현옥이 부산시장이었을 때 그의 공보비서로 2년간 근무한 기간뿐일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밀어닥친 동백림사건이라는 무서운 재앙은 그의 몸과 마음을 완전히 망가뜨려 그 아픔을 술로 달래다가 영양실조까지 겹친 술꾼이 되어 길거리에 쓰러진 채로 발견되기도 했다. 행려병자로 오인된 그는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돼 있었으나 그 사실이 전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아서 친구들은 그가 사망한 것으로 잘못 알고 멀쩡하게 살아있는 사람의 시들을 유고집으로 발간하였으니 웃을 수만도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천상병은 언젠가 나를 만나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선생님, 예수님은 매우 가난하셨지요. 저도 가난합니다." 태연하게 그런 말을 하던 천상병이 목사들보다 훨씬 예수의 제자다운 삶을 살았다고 생각한다.

어느 시인이 이보다 더 아름답고 눈물겨운 시 한 수를 남기고 이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1993년 어느 화창한 봄날이었다. 천상병은 훨훨 날아 하늘에 올라가면서 '고얀 놈들아, 그래도 내가 다 용서한다'라고 웃으며 한마디 던지고 멀리멀리 구름 헤치고 저 하늘나라로 돌아갔을 것이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 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빛 함께 단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해가 가장 짧다는 동지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와 가을날의 하루하루가 처량하게만 느껴지지만 천상병이 살고 간 이 땅이기에 봄은 반드시 온다고 나는 믿는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23/2018112301815.html

 

 

 

[아무튼, 주말] 이웃이 버린 책장·서랍 쓰고 있다 '소비가 미덕'인 시대에 미안하다

조선일보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11.24 03:00

[김형석의 100세일기]

[김형석의 100세일기]
일러스트= 이철원
내 나이에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나 만나야 할 사람이 자주 있다. 지난봄에는 경북 문경에서 지내던 목회자가 일터를 제주도로 옮겼다면서 찾아왔다. 미국 이민 2세였는데 우연히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읽고 자기가 한국인이라는 자각심이 들어 일터를 한국으로 정했다고 했다. 낡아 떨어지게 된 내 책에 사인을 받으러 찾아와 큰절을 하고 간 일이 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의 대표적 구름 사진 작가인 김종호씨가 구름 사진 작품 5점을 차에 실어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 책으로 된 사진첩은 먼저 받아보았고 그중에서 내가 고른 사진들을 다시 대작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중 3점은 강원 양구의 기념관으로 보냈다.

 
집에 들어선 그가 초라하게 텅 비어 있는 거실과 2층 서재를 보고 하는 첫마디가 "대단히 검소한 생활을 하십니다"라는 인사였다. 그랬을 것이다. 살 줄도 모르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필요한 가구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서재에 있는 책상과 그 옆에 있는 서랍 달린 장은 가까이 살던 사람이 이사 가면서 버린 것을 도우미 아주머니가 밤중에 날라 온 중고품이다. 옆방에 있는 4층짜리 책장도 어디선가 주워 온 것이다. 하도 물건이 없으니까 아주머니가 내가 없을 때 옮겨오곤 했다. 고맙기는 한데 누가 보았겠다고 하면 "제가 그런 실수야 하겠어요?" 하면서 창피할 것도 없다는 자세였다.

침대가 있는 방의 걸상은 6·25전쟁 후에 처남이 미군 부대에서 얻어다 준 것이다. 벌써 60년이나 지난 골동품이다. 지금 수고해 주는 도우미는 그런 과거를 모른다. 그런데 지난달에는 누군가가 이사 가면서 대문 앞에 내놓은 것이라면서 또 옮겨왔다. 이렇게 무겁고 큰 서랍장을 어떻게 가져왔느냐고 물었더니 세 차례나 들어 날랐다는 것이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란다. 20여 년 내 서재에서 책상으로 쓴 널판은 양구로 보냈는데 어울리는 곳이 없어 복도에 밀려나 있었다. 마치 나에게 "아저씨 나는 어디로 가지요? 다시 서울로 가면 안 되나요?" 하고 묻는 듯싶었다. 20여 년 동안 정들었는데.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좋은 책상과 가구는 장만할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생활용품 때문에 생기는 관심과 시간 낭비를 멀리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시급하고 중요한 일을 먼저 처리하느라 물건 정돈이나 청소는 하지 못할 때가 있다. 재정적 여 유가 생기면 '소비가 미덕'이라는 경제관도 이해해야 한다. 돈은 돌아야 제구실을 한다. 나같이 한 양복을 30년씩 입거나 구두 한 켤레로 2년을 보낸다면 양복점 사람이나 신발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죄송스럽기도 하다. 많이 받으면서 적게 주는 사람은 잘못된 인생을 사는 것이다.

10년만 더 살 수 있다면 한번 멋지게 살아보는 건 어떨까.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23/20181123016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