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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세 일기

빠꼼임 2020. 1. 19. 15:43

김형석의 100세 일기

[아무튼, 주말] 어머니는 내게 스무 살까지만 살아달라 했는데…

조선일보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일러스트= 이철원
일러스트= 이철원
나이 때문일까. 요사이는 어디 가서 한 시간 이상 앉아 있는 것이 고역이다. 그래서 교회에 나가는 일도 삼가는 때가 있다. 차라리 강의를 한다면 오랜 습관 때문인지 힘이 덜 든다.

지난 금요일 저녁에는 우리나라 철학계를 대표하는 계간지 '철학과 현실' 30주년을 기념하는 축하 모임이 있었다. 내가 3년 동안 기고를 한 일도 있었으나 친구인 김태길 교수가 남겨준 것이기 때문에 2시간 동안 동석하게 되었다. 내가 맡은 격려사는 10분 이내에 끝났고 한 시간은 만찬으로 환담을 나누기로 되어 있었다.

참석한 사람들이 철학계의 원로 교수들이었다. 하지만 나보다는 15년 이상 연하의 후학들이었다. 내가 너무 오래 산 것 같다는 송구스러운 마음이 없지 않았다. 우리 철학계에서는 초창기의 안호상 박사와 연세대의 정석해 교수가 97세까지 사셨다. 고형곤 교수는 98세까지 건강을 유지했다. 그런데 내가 그 선배들보다 3~4년이나 더 장수한 셈이다. 김태길 교수는 10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안병욱 교수도 5년 전에 작고하고 나만 남았다.

사람들이 우리 '철학계 삼총사'에 대해 하는 말이다. 김태길 교수는 학(鶴)상이어서 장수하면서 말년에 영광을 누리리라고 했다. 안병욱 교수는 거북(龜)상으로 장수는 물론 언제나 자부심을 갖는다는 것이다. 나는 양(羊)상이라 가진 것은 없으나 많이 베풀면서 살 팔자라고 해 웃은 적이 있다.

그런데 내가 두 친구보다 오래 살았다. 그리고 지금까지 꾸준히 일해 온 셈이다. 나는 누가 더 건강한 사람이냐고 물으면 '같은 나이에 일을 더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지금은 나만큼 오래 많은 일을 한 사람은 적은 것 같다. 안 교수는 내게 "김 선생은 나보다 정신력이 강하니까 우리(자신과 김태길)가 남겨 놓고 가는 일들을 마무리해 줄 것으로 믿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말이 친구가 남겨 준 유언이 되었다.

사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병약하게 태어났다. 어머니는 내가 듣는 앞에서도 "네가 스무 살까지 사는 것을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당시에는 모두가 가난했으나 내 경우는 가난이 너무 힘든 짐이었다. 친구들을 생각할 때는 부럽기도 했다. 내가 받은 초등학교 교육은 형편없었다. 일제시대인데 일본어를 처음 배운 것은 5학년 때였다. 중학교에 갈 자격도 모자라는 시골교회 학교에서 배웠다. 남들이
다 가는 공립학교에도 가보지 못했다.

그렇게 긴 세월을 보낸 내가 지금은 철학계에서 오랫동안 일 많이 하는 원로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 때문에 지금도 내가 잊지 못하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열네 살에 내가 올린 기도다. "하느님, 저에게 건강을 주셔서 중학교에도 가고 오래 살게 해 주신다면 제가 저를 위해서는 일하지 않고 하느님의 일을 하겠습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9/03/29/20190329022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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