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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세 일기(책을 30분간 읽기도 벅차다)

빠꼼임 2020. 1. 21. 08:49

김형석의 100세 일기 일러스트
3년 전 안경을 바꾸었는데도 긴 시간 동안 책을 읽을 수는 없다. 40분 정도 지나면 눈앞이 흐려지곤 한다. 노안으로 시력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사전을 들출 때는 안경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확대경(돋보기)을 사용해야 한다. 그래도 노년에 책을 읽는 즐거움은 양보할 수가 없다.

중학교에 다닐 때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을 읽었다고 말하면 지금의 중학생들은 믿어주지 않을 것이다. 나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전쟁과 평화'가 장편소설 중의 하나라는 것을 모르면서 읽었으니까. 그러나 기억력이 왕성할 때여서 그 줄거리와 사상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나 자신을 무모하다고 생각은 했어도, 한편으론 자랑스러웠다고 칭찬하고 싶어진다. 그 책들을 안 읽었다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야 휴머니스트(인문주의자)로서의 눈을 떴을 테니까.

30대를 넘길 때까지는 많이 읽었다. 그러나 40 이후부터는 읽는 시간과 쓰는 시간이 비슷해졌다.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까. 그러다가 70 고개를 넘기면서부터는 읽는 시간보다 쓰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매일 사색하는 시간도 가지게 되었다. 오히려 사색하고 쓰는 데 들이는 시간의 총량이 독서 시간보다 많아진 것 같다.

사람들은 청각이 시각보다 고등한 감각이라고 말한다. 시각에는 상상과 관념적 내용이 생기지 않으나 청각은 사상과 예술을 풍부히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앞을 못 보는 사람도 철학자나 시인이 될 수는 있다. 하지만 청각을 완전히 상실한 사람은 학자나 사상가가 될 수 없다고 한다.

어쩌면 지금의 내가 그렇다. 음악을 듣거나 강연을 들을 때는 90분 정도 계속해도 피곤하거나 듣기 싫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읽는 일은 30분만 지나면 집중력이 흐려지고 눈을 비비게 된다. 90대 후반기가 되면서는 한참씩 쉬거나 가벼운 안약을 넣기도 한다. 내 모친은 100세가 되면서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누군지 모르다가 가까이 왔을 때에야 "네가 왔구나!"라고 말하곤 했다.

나도 한두 해 더 지나면 독서는 끝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때는 누군가가 내가 읽고 싶은 책을 대신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가져 보기도 한다. 독서를 못하는 인생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그 욕심이 채워질지는 나도 모른다. 내 나이가 되면
누구나 보청기를 쓰게 된다. 그런데 소리는 크게 들리는데, 말은 알아듣기가 힘들어진다. 음성이 흐트러져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좀 더 지나게 되면 기억력이 쇠퇴할 것이며, 사고력의 한계도 찾아올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발음까지 어눌해진다. 나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바빠진다. 그때가 다가오기 전에 주어진 일의 마무리를 해야겠기에.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3/30/201803300170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