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18.12.22 03:00
[김형석의 100세일기]
/일러스트= 이철원
A라는 여교수는 심리 상담 분야의 원로이다. 고령에도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후배 양성에 심혈을 쏟고 있었다. 그 일을 위해 적지 않은 재정적 희생을 감수하기도 했다. 그가 갑자기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퇴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러 해 동안 함께 일해 온 한 여직원이 하던 일을 중단하고 퇴근해 "업무에 지장이 된다"고 걱정했더니 딸같이 믿었던 그 직원이 '52시간 근무제' 얘기를 하며 "우리를 당신을 위한 일의 노예로 삼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그 항의 내용과 태도에 놀란 A교수가 쓰러져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응급 치료를 받았고 연로하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를 듣고 퇴원했다고 했다.
나는 우리 민족의 게으름과 일을 사랑할 줄 모르는 과거를 항상 부끄럽게 생각해 왔다. 20대 초반에 일본에서 대학 생활을 할 때도 '일을 사랑하는 민족이 게으른 우리 민족을 지배해 왔다'는 자책감을 숨길 수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52시간 문제가 아니다. 일을 사랑해 받는 행복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
세계에서 복지 정책이 가장 잘된 나라 중 하나는 캐나다이다. 내 후배의 친동생이 캐나다에서 겪었던 일이 기억에 떠올랐다. Y군은 한국에서 상업학교를 나온 젊은이였다. 친형이 캐나다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동생도 오랜 노력 끝에 이민을 가게 되었다. 형이 친구이자 제조업을 하는 캐나다 사장에게 "내 동생을 맡기고 싶으니까 좀 키워가면서 채용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하였다.
동생인 Y군이 취업을 하고 보니 기술도 없고 영어도 부족하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직원들보다 30분 일찍 출근해 청소를 하고 동료 사원들이 일하기 편하도록 사전 정돈을 도왔다. 퇴근시간 이후에도 혼자 남아서 한두 시간씩 잔업을 했다. 그렇게 하기를 2년 가까이 계속했다.
사장은 Y군에게 "이제는 되었으니까 더 수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만류했으나 Y군은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 더 실력을 갖추기까지 계속했으면 좋겠다"며 열심히 일했다. 다음해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사장은 개인적으로 선물을 주고 싶다면서 자기가 타던 자동차를 주었다. 캐나다에서는 선물을 거절하면 예의가 아니라는 형의 충고를 듣고 차를 받았다. Y군은 그 좋은 차를 받아 한인교회 목사에게 주고 자기는 목사의 낡은 차를 바꾸어 타고 출퇴근을 했다.
그렇게 4~5년이 지났다. 그 사장이 Y군의 형에게 상의를 해왔다. "내가 작은 공장 하나를 따로 세워 당신 동생에게 맡 기고 싶은데 당신이 반(半)투자를 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 온 것이다.
내가 캐나다에 갔을 때 그 형은 동생을 위한 투자 문제를 고려하고 있었다. 물론 복지정책은 필요하다. 그러나 일을 사랑하며 일을 통해 기업을 키우고 국가에 기여하려는 의지가 없는 복지정책은 개인과 사회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행복은 규제하는 법보다도 자율적인 선택에서 움트는 것이다.
여러 해 동안 함께 일해 온 한 여직원이 하던 일을 중단하고 퇴근해 "업무에 지장이 된다"고 걱정했더니 딸같이 믿었던 그 직원이 '52시간 근무제' 얘기를 하며 "우리를 당신을 위한 일의 노예로 삼느냐"고 항의했다고 한다. 그 항의 내용과 태도에 놀란 A교수가 쓰러져 응급실로 이송되었다. 응급 치료를 받았고 연로하기 때문에 위험할 수 있다는 경고를 듣고 퇴원했다고 했다.
나는 우리 민족의 게으름과 일을 사랑할 줄 모르는 과거를 항상 부끄럽게 생각해 왔다. 20대 초반에 일본에서 대학 생활을 할 때도 '일을 사랑하는 민족이 게으른 우리 민족을 지배해 왔다'는 자책감을 숨길 수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52시간 문제가 아니다. 일을 사랑해 받는 행복을 상실해서는 안 된다.
세계에서 복지 정책이 가장 잘된 나라 중 하나는 캐나다이다. 내 후배의 친동생이 캐나다에서 겪었던 일이 기억에 떠올랐다. Y군은 한국에서 상업학교를 나온 젊은이였다. 친형이 캐나다 시민권자였기 때문에 동생도 오랜 노력 끝에 이민을 가게 되었다. 형이 친구이자 제조업을 하는 캐나다 사장에게 "내 동생을 맡기고 싶으니까 좀 키워가면서 채용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부탁을 하였다.
동생인 Y군이 취업을 하고 보니 기술도 없고 영어도 부족하여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다른 직원들보다 30분 일찍 출근해 청소를 하고 동료 사원들이 일하기 편하도록 사전 정돈을 도왔다. 퇴근시간 이후에도 혼자 남아서 한두 시간씩 잔업을 했다. 그렇게 하기를 2년 가까이 계속했다.
사장은 Y군에게 "이제는 되었으니까 더 수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만류했으나 Y군은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 더 실력을 갖추기까지 계속했으면 좋겠다"며 열심히 일했다. 다음해 크리스마스가 되었다. 사장은 개인적으로 선물을 주고 싶다면서 자기가 타던 자동차를 주었다. 캐나다에서는 선물을 거절하면 예의가 아니라는 형의 충고를 듣고 차를 받았다. Y군은 그 좋은 차를 받아 한인교회 목사에게 주고 자기는 목사의 낡은 차를 바꾸어 타고 출퇴근을 했다.
그렇게 4~5년이 지났다. 그 사장이 Y군의 형에게 상의를 해왔다. "내가 작은 공장 하나를 따로 세워 당신 동생에게 맡 기고 싶은데 당신이 반(半)투자를 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 온 것이다.
내가 캐나다에 갔을 때 그 형은 동생을 위한 투자 문제를 고려하고 있었다. 물론 복지정책은 필요하다. 그러나 일을 사랑하며 일을 통해 기업을 키우고 국가에 기여하려는 의지가 없는 복지정책은 개인과 사회를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 행복은 규제하는 법보다도 자율적인 선택에서 움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