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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석의 100세 일기(이웃이 버린 책상.서랍 쓰고 있다)

빠꼼임 2020. 2. 1. 09:13

[아무튼, 주말] 이웃이 버린 책장·서랍 쓰고 있다 '소비가 미덕'인 시대에 미안하다

조선일보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입력 2018.11.24 03:00

[김형석의 100세일기]

[김형석의 100세일기]
일러스트= 이철원
내 나이에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나 만나야 할 사람이 자주 있다. 지난봄에는 경북 문경에서 지내던 목회자가 일터를 제주도로 옮겼다면서 찾아왔다. 미국 이민 2세였는데 우연히 '영원과 사랑의 대화'를 읽고 자기가 한국인이라는 자각심이 들어 일터를 한국으로 정했다고 했다. 낡아 떨어지게 된 내 책에 사인을 받으러 찾아와 큰절을 하고 간 일이 있다.

얼마 전에 우리나라의 대표적 구름 사진 작가인 김종호씨가 구름 사진 작품 5점을 차에 실어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 책으로 된 사진첩은 먼저 받아보았고 그중에서 내가 고른 사진들을 다시 대작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중 3점은 강원 양구의 기념관으로 보냈다.

집에 들어선 그가 초라하게 텅 비어 있는 거실과 2층 서재를 보고 하는 첫마디가 "대단히 검소한 생활을 하십니다"라는 인사였다. 그랬을 것이다. 살 줄도 모르고 도와주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필요한 가구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서재에 있는 책상과 그 옆에 있는 서랍 달린 장은 가까이 살던 사람이 이사 가면서 버린 것을 도우미 아주머니가 밤중에 날라 온 중고품이다. 옆방에 있는 4층짜리 책장도 어디선가 주워 온 것이다. 하도 물건이 없으니까 아주머니가 내가 없을 때 옮겨오곤 했다. 고맙기는 한데 누가 보았겠다고 하면 "제가 그런 실수야 하겠어요?" 하면서 창피할 것도 없다는 자세였다.

침대가 있는 방의 걸상은 6·25전쟁 후에 처남이 미군 부대에서 얻어다 준 것이다. 벌써 60년이나 지난 골동품이다. 지금 수고해 주는 도우미는 그런 과거를 모른다. 그런데 지난달에는 누군가가 이사 가면서 대문 앞에 내놓은 것이라면서 또 옮겨왔다. 이렇게 무겁고 큰 서랍장을 어떻게 가져왔느냐고 물었더니 세 차례나 들어 날랐다는 것이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으니까 걱정하지 말란다. 20여 년 내 서재에서 책상으로 쓴 널판은 양구로 보냈는데 어울리는 곳이 없어 복도에 밀려나 있었다. 마치 나에게 "아저씨 나는 어디로 가지요? 다시 서울로 가면 안 되나요?" 하고 묻는 듯싶었다. 20여 년 동안 정들었는데.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살았기 때문에 좋은 책상과 가구는 장만할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 생활용품 때문에 생기는 관심과 시간 낭비를 멀리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도 시급하고 중요한 일을 먼저 처리하느라 물건 정돈이나 청소는 하지 못할 때가 있다. 재정적 여
유가 생기면 '소비가 미덕'이라는 경제관도 이해해야 한다. 돈은 돌아야 제구실을 한다. 나같이 한 양복을 30년씩 입거나 구두 한 켤레로 2년을 보낸다면 양복점 사람이나 신발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죄송스럽기도 하다. 많이 받으면서 적게 주는 사람은 잘못된 인생을 사는 것이다.

10년만 더 살 수 있다면 한번 멋지게 살아보는 건 어떨까. 요즘 그런 생각을 한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23/201811230160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