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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라노 조수미

빠꼼임 2023. 6. 22. 06:51

조수미 “돗자리 깔아주면 춤·노래하는 민족… 시스템 갖추자 선순환 시작”

조수미가 본 ‘K클래식 성공 비결’

입력 2023.06.22. 03:00업데이트 2023.06.22. 06:11
 
“10여 년 전부터 해외 언론과 인터뷰할 때마다 이렇게 말했어요. ‘두고 보세요. 한국 클래식이 전 세계를 뒤흔드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지난해 홍콩에서 열린 ‘HKGNA 음악 페스티벌’에서 노래하는 소프라노 조수미. 1986년 세계 데뷔 이후 지금까지 국내외 무대를 누비는 ‘현역’이다. /연합뉴스

소프라노 조수미가 21일 인터뷰에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이제 한국 클래식의 눈부신 성과는 기정사실이 됐고 그 이유를 묻는 방식으로 외국 언론들의 질문도 점차 달라지고 있다”고 전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장판과 돗자리만 깔아주면 언제든 노래하고 춤추는 예술적 DNA가 있는 민족”이란 것이 한결같은 그의 대답이다.

-‘장판과 돗자리만 깔아주면’이라는 말을 해외에서는 어떻게 설명하나.

“‘자리와 기회만 있으면’이라고 풀어서 말한다(웃음). 설령 외국에서 무시당해도 언제든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재능과 끈기, 오기를 지니고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전날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세계 박람회(엑스포) 부산 유치를 위한 홍보 영상에서도 노래 부르는 모습이 나왔는데.

“그 영상 덕분에 ‘지금 파리에 있느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다. 지난해 부산 엑스포 홍보 대사를 맡아서 ‘함께’라는 노래를 불렀다. 나라에 큰일이 있으면 나부터 발 벗고 나서야 안심이 된다. 영상은 얼마 전 폴란드 바르샤바 공연을 마친 뒤 현지에서 촬영했다. 어제 서울서 공연 끝나고 밤늦게 봤는데 나도 영상에 감동했다(웃음).”

-지난 4일(한국 시각) 바리톤 김태한이 우승한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심사 위원으로 참가했다.

“대회 기간 내내 머물면서 참가 신청자 420여 명의 영상을 꼬박 나흘 동안 심사했다. 영상 심사를 거쳐 본선에 진출한 80여 명 가운데 한국 참가자만 18명에 이르렀다. 한국 젊은 성악가들의 국제 경쟁력을 예선부터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과 체계적인 영재교육 시스템, 부모들의 헌신적 지원 등 세 요소가 K클래식의 성공 요인으로 꼽힌다. 경제성장과 가족주의의 결합은 2차 대전 이후 한중일(韓中日) 등 동아시아에서 시차를 두고 공통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다. 거기에 한국은 엘리트 음악교육 분야에서 세계적 경쟁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음악 영재들의 재능을 조기 발굴하고, 금호영재콘서트 같은 무대를 통해서 이들의 기량을 꾸준하게 소개하고 점검하는 방식이다.

-한국 클래식의 눈부신 성장 비결은 무엇인가.

“한국 젊은 음악인들의 타고난 재능과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음악 교육이 맞물려 ‘선순환’을 가져오고 있는 것 같다.”

-선순환이라는 의미는.

“과거에는 한국 성악가들이 노래 실력만 좋았다면, 지금은 무대 매너와 연기력부터 언어 능력, 심지어 외모와 의상까지 모든 점에서 세련미가 넘친다. 동양인들은 국제 무대에서 어색하고 주눅 들고 촌스럽다는 것도 옛말이다.”

조수미는 2017년 영국 BBC 카디프 국제 성악 콩쿠르부터 올해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까지 국제 대회에 심사위원으로 꾸준하게 참가하고 있다. 벨기에 왕가가 주관하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는 흔히 쇼팽·차이콥스키 콩쿠르와 더불어 ‘세계 3대 콩쿠르’로 불린다. 한국 음악계가 국제 콩쿠르에서 최고의 성과를 거두고 있지만, 아직 장기적 과제도 남아 있다는 것이 그의 냉정한 진단이다.

 

-한국 음악계의 향후 과제는.

“국제 대회에서 1~2등을 차지하고서도 정작 3~4년 뒤에는 국제 무대에서 보기 힘든 경우가 적지 않다. 장기적으로 성악가로서 경력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한 과제다. 해외 매니지먼트사와 계약하고 외국 극장에 꾸준하게 서는 것이야말로 한국 음악계가 풀어야 하는 숙제다.”

-내년 7월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조수미 국제 성악 콩쿠르’도 처음으로 개최하는데.

“내 이름을 내건 콩쿠르를 여는 것이 오래전부터 꿈이었다. 그동안 해외 무대에서 배운 노하우를 후배 성악가들에게 전수해야 한다는 의무감과 책임감이 있었다. 단, 심사위원장은 맡지 않으려고 한다. 혹시 한국 후배들이 1위를 차지할 때 국적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고 싶지 않아서다.”

그는 1986년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극장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주역으로 데뷔한 뒤 꾸준하게 국내외 무대에 서고 있는 ‘현역’이다. 다음 달에도 베를린 필하모닉의 첼로 단원들로 구성된 ‘베를린 필 12 첼리스트’와 함께 서울·부산·광주·부천·강릉 등 전국 5개 도시에서 공연을 연다.

-성악가로서 ‘장수 비결’은.

“언제나 세 가지를 꼽는다. 우선 호기심이고, 다음으로 꾸준한 자기 관리이며,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온몸을 태울 수 있는 열정이다. ‘관리’라는 표현은 맘에 들지 않지만 체력과 목 상태, 연습과 스케줄까지 모든 걸 스스로 챙겨야 하는 성악가에게 역설적으로 잘 어울리는 말이기도 하다.”

-성악가가 지녀야 하는 호기심이란.

“당장 ‘나는 조수미인데’ ‘나는 유명한데’라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모르면 누구에게나 물을 수 있는 용기와 궁금증을 평생 잃지 않아야 한다.”

-엄격한 자기 관리로도 유명한데.

“프로 성악가는 몸 상태와 체력, 기분과 상관없이 언제든 무대에 서면 노래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비정한 직업이다. 콩쿠르는 단 한 번의 무대로 끝나지만, 반대로 그 뒤에는 모든 무대에 설 때마다 평가를 받게 된다. 무대에선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갈 곳이 없다. 갑자기 가사를 잊어먹거나 소리가 뒤엉키는 등 예측 불가라는 점에서는 둥근 축구공과도 닮았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조언은.

“성악가들은 결코 남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해서는 안 되는 직업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설령 목 상태가 좋지 않거나 아프더라도 무대에 서는 그 순간만큼은 ‘내가 최고’라는 자긍심과 당당함을 잃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엔 자기 확신이 필수적이라는 뜻인가.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남을 설득할 수 있겠는가. 결국 1류와 2류를 나누는 건 준비와 자신감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니 경력 38년 성악가의 장수 비결을 엿본 듯한 기분이었다.

☞소프라노 조수미

1986년 이탈리아 명문 트리에스테 극장에서 베르디의 오페라 ‘리골레토’ 주역으로 세계 무대에 데뷔한 이후 38년째 국내외 무대에 서고 있는 정상급 성악가. 지휘자 카라얀(1908~1989)의 격찬을 받으며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 음반을 함께 녹음했다. 그 뒤 서른도 되기 전에 대부분의 세계 주요 오페라 극장에서 노래한 기록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