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정맥(終)

호남정맥27구간, 끝(북치 ~ 주줄산)

빠꼼임 2009. 4. 17. 00:13

호남정맥27구간(끝)(북치~주줄산)종주 산행

산행날짜 : 2007. 2. 10(토),          날씨  :  흐 림, 강 풍

산행시작 : 07 : 40,         산행마침 : 14 : 50,        산행거리 : 21.3 km
산행시간 : 07시간 10분,  산 행 자 : 산아, 솔바람, 야초
 
산행경로
   북치마을(종현) ~ 북치 ~ 530봉~ 550봉 ~~ 580봉~  마치  ~만덕산 ~ 오두재 ~  곰치재(전적비) ~  600봉
   ~563봉 ~ 514.5봉~ 죽전치~  540봉~  모래재 터널위  ~주줄산(주화산,조약봉)
 
호남정맥27구간(북치~주줄산)
오늘은 호남정맥을 졸업하는 날이다. 새벽05시에 사는 곳을 출발하여, 4번 국도를 타고, 영동까지, 영동에서 19번 국도를 이용, 무주를 거쳐 진안까지는 30번 국도를, 진안에서 화순온천 입구를 지나 749번 지방도를 이용, 상관 마을까지, 상관마을에서 다시 17번 국도를 타고 죽림온천까지. 죽림온천역을 우측으로 끼고 좁은 마을 진입로로 들어서서 북치마을 입구에 도착하니 07시35분이다.

준비운동도 할 겸해서 동네 어귀 멀찌감치 차를 대고 북치마을을 향하여 오른다. 오늘은 날씨가 잔뜩 흐리다. 북치마을은 지붕을 개량한, 슬레이트집들이 대다수다. 일부 농가는 사람이 살지 않아서, 벽과 지붕이 무너지고, 대문도 열쇄로 채워 놓아서 한 눈에 봐도 빈집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몇 집에서는 슬레이트 지붕위로 솟은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른다. 농촌의 전형적인 아름다운 아침 풍경이다. 굴뚝에 연기 나는 집은 아침밥을 짓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북치는 섬진강과 만경강의 분수령이다. 북치마을을 뒤로하고, 도랑을 건너, 묵밭을 지나 능선으로 붙어서 올라가는데 경사가 장난이 아니다. 그런 대로 정맥으로 오르는 길은 산나물 채취 꾼 들이 다녔는지 희미하게 흔적이 있다. 50여 분 간 계속 오름길이 이어진 다음에야 정맥능선이다(08:19).

정맥능선에 올라서니 마음이 조급하다, 아마 오늘이 호남정맥도 마지막 구간이라서 빨리 끝점인 주줄산에 가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가 보다. 굵은 참나무 사이를 20여분 지나니 왼쪽 편으로 과거 서낭당 터였는지 돌무덤이 있다. 연이어 봉우리 2개를 넘어09시52분 580봉에 오른다. 우측으로는 회봉리 마을로 통하는 도로가 희미하게 보인다.

10시05분 스테인리스강으로 된 삼거리 이정표지판이 나온다. 정수사2.1km, 동부교회수련원 4.3km, 정상1.6km 라고 쓰여 있다. 이어서 8 분여 진행하니, 초록색 플라스틱 의자 6개가 놓여있는 제5쉼터 표지판이 나타나고, 만덕산 솟대봉이 눈에 들어온다. 10시33분 삼거리(정상, 원불교훈련원, 정수사)표지판과 만덕산 초선성지라 쓰여 있는 조그마하고, 나지막하게 세워놓은 표지판이 나온다.

10시41분 칼날 같은 암릉을 타고 오르니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서 잡나무와 소나무에 상고대가 피기 시작한다. 10시47분 만덕산 정상 표지판과 만난다. 정상에는 통신 시설물이 들어서 있고, 표지판에는 정수리 3.0km, 슬치 13.2km, 곰치재 2.5km라고 표시되어있다. 이어서 좌측 편으로는 전주~광양 고속도로 현장이 멀리 바라보이고, 바로 밑으로는 미륵사가 보인다. 연이어 얼마 되지 않은 너덜지대가 나오고 산죽 밭을 가른다.

11시11분 제2쉼터 표지판을 만나고, 곧 이어서 삼각점(NO, 55)이 낙엽만 온통 있는데 하얗게 드러나 있다고 곧 바로 오두재이다(11:15). 한차례 돌밭길을 지나서 연이어서 봉우리 2개를 넘고나서 뚝 떨어지니, 비포장도로인 곰재(곰치재, 웅치. 곰티재)이다.
 
완주군 소양면과, 진안군 부귀면 경계인 곰재에는 호남정맥 곰재라고 표기된 비닐 표지판과, 웅치전적비문을 새긴 비각이 서있고, 3분여 포장길을 오르니 커고 웅장한 웅치전적비가 나온다. 얼마전에 새로 단장을 했는지 잔디 심었는지도 오래 되지 않았고, 전적비 밑 부분에는 동판으로 제작된 그 당시의 전투 장면이 그려져 있고, 반대편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어나, 오석인 데다가 물기가 있어서 글자가 잘 보이지를 않는다. 탑 앞 입구에는 진안 문화원에서 세운 곰티재(熊峙戰迹地)를 설명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곰티재(熊峙戰迹地)”
이 재는 예전 신작로가 나기 전 진안~전주간의 주요교통로였다. 진안~전주간 교통로는 이길 말고도 북동쪽으로 약 2Km 지점에 적내재가 있기는 하였으나 경사가 급하고 험하여 짐이 있는 사람이나 일반 길손은 이 길을 주로 택하였다고 한다.
 
 이 길로 약 1.5km 쯤 내려가면 완주군 소양면 월상리 신촌마을에 다다른다. 옛 고갯마루에는 으레 그러하듯 이곳에도 서낭당의 돌무더기 터가 있다. 이 재는 역사상 유명한 전적지이기도 하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조선 7도를 유린하였으나, 이순신 장군의 수군이 바닷길을 지키고 있어 오직 호남만은 넘보지 못하고 있던 차 당시 전라도 공략 책임자인 일본군 승장(僧將) 안고꾸지(安國寺惠瓊)가 지휘하는 제6군 15,700명이 금산(금산)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1만여 명을 주공(主攻)으로 하여 금산~진주~전주로, 2천여명을 조공(助攻)으로 하여 금산~진산~전주로 이어지는 전주성 협공작전을 전개했다. 그러나 웅치에는 전주성을 지키기 위해 전진 배치된 조선의 의병장 황박(黃璞)과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김제군수 정담(鄭湛), 해남현감 변응정(邊應井)등의 연합군이 침공해 오는 일본군을 맞아 1592년 8월 14~15일 양일간에 걸쳐 이곳 웅치지역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조선, 연합군은 용전분투하였으나
 
수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이곳에서 대부분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이때에 이 지방 사천인(泗川人) 김수 (金粹/ 1542~1592)와 그 동생 김정(金精 /1544~1592)도 의병으로 참전하여 큰 공을 올리고 형제가 동시에 순직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주력도 이곳 전투에서 전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어 전주성 근교까지 진격하였으나 전주성을 공략할 여력이 없어 퇴각하고 말아 웅치전이 호남을 방어하는 데에 결정적 공헌을 한 사실은 알 수 있다.
 
 이 전투가 벌어진 날은 우연치 않게도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한산도에서 대첩을 이룬 날이기도 하며, 이 양대 전투가 임진왜란 때에 전세를 조선쪽으로 역전시키는 결정적 전기가 되게 하였다. 이 재 부근과 연결되는 능선 곳곳에서는 당시 전사한 병사들의 시신을 합장 한 듯한 돌무덤이 산재한다.
2001년 12월 일
진 안 문 화 원

12시10분 전적비 앞에서 바람이 적게 부는 데를 찾아 호남정맥의 마지막 구간 점심이다. 바람이 워낙 세게 불어서 먹는 둥 마는 둥 성급히 끝내고 호남정맥 마지막 점인 주줄산이 우리를 빨리 오라고 손짓을 하고 있는데 지체할 여유가 없다. 이어서 산죽 밭을 가르고 13시55분 죽전치를 지나 13시59분 깨어진 삼각점을 지난다.

14시01분 과거 광산 터였음을 알려주는 대한광업진흥공사 1989년 , 신보 89-3호 200M.라고 새겨진 콘크리트가 커다란 시멘트 덩어리와 같이 낙엽위에 얹혀져 있는 것을 지나서, 14시23분 우측으로 수십 만기는 묻을 만한 대단한 공원묘지 조성지를 바라보면서 모래재 터널 위를 지나면서, 모래재 옛 도로를 좌우측으로 바라본다. 이제 호남정맥의 마지막 오름길이 시작된다. 그러나 발걸음은 가볍다.

14시41분 헬기장이다. 이제 주줄산이 바로 앞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2분 여 뒤에 호남정맥 끝 점인 주줄산이다. 주줄산(주화산)정상에는 호남정맥, 금남정맥, 금남호남정맥 분기점이 표기된 알루미늄 표지판이 서있고, 과거 양철 표지판과 정상 표지석은 누가 뜯어서 던져 버렸는지 정상 밑 낙엽위에 나뒹군다. 버려진 양철 표지판은 주어다가 나무 가지에 걸쳐 놓고 정맥 분기점 표지판위로 양쪽 참나무 둥치에 준비해온 적은 현수막을 걸고 완주 기념사진을 찍는다. 누군가 꽃다발이라도 한개 목에 걸어 준다면~~~~~

지나온 정맥을 생각한다. 27구간에 걸쳐 완주를 했지만, 어려운 때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백이산 정상에서 내림길을 찾지 못해 알바,, 여름 기간에는 독사를 4마리나 만났는가 하면, 일림산의 철쭉 밭, 존재산의 군부대 철조망 통과, 호남고속도로의 흄관 통과 , 고당산의 산죽 밭, 눈 덮인 추월산, 내장산, 잡목 숲에 뒤덮인 왕자산, 성옥산을 통과할 때 등등 생각하기 조차 싫은 게 있지만, 더디어 해냈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다.

호남정맥 완주를 끝내고 기념촬영을 하고 나니. 시간이 남아 아까워서, 이어서 금남호남정맥에 발을 들여놓기로 하고, 주줄산(주화산)정상에서 오룡고개까지 금남호남정맥 구간 종주를 시작한다.

 

 북치마을의 아침 전경

 

북치 마을을 뒤로하고, 정맥을 찾아서 오름

 

진안군 마령면 회봉리 마을 임도

 

 

 

만덕산 정상이 바라 보임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자 상고대가 핌

 

상고대의 아름다움

 

만덕산 정상 표지판

 

 전주~광양간 고속도로 공사가 한창 임

 

곰재 비닐 표지판

 

웅치전적지(熊峙戰蹟地)
전라북도 기념물 제25호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신촌리
이곳은 임진왜란 때 우리의 조상들이 왜적에 맞서 전투를 벌인 현장이다. 왜군은 해로를 통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장악하려고 했으나, 이순신의 활약으로 해로가 막히자 육로로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 왜적은 무주, 금산, 진안 등지에 군대를 집결 시키고 선조 25년(1592) 7월 8, 9일에 웅치로 쳐들어왔다. 김제군수 정담(鄭湛),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 의병장 황박(黃璞) 등이 왜적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였다. 왜군은 우리 군의 충성심과 용맹함에 감탄하여, 우리 병사의 시신을 묻고 추모하는 뜻을 담아 <조조선국충간의담(弔朝鮮國忠肝義膽)>이라고 쓴 푯말을 세웠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선열들의 혼이 가슴 깊이 느껴지는 곳이다.

 

 

 

 호남정맥, 금남정맥, 금남호남정맥 분기점 표지판 (주줄산 정상)

 

 

 

호남정맥 개요
호남정맥을 “산경표의 우리전통지리 개념으로 살펴보면, 모래재 북쪽 0.6km지점의 금남호남정맥상의 주화산에서 북쪽으로 호남정맥가 금남정맥으로 나뉜다. 이곳에서 호남정맥의 산줄기는 남쪽으로 뻗어가면, 전북지역에 곰티 만덕산 슬티 경각산, 오봉산, 모악산 분기점,내장산, 추월산, 강천산, 산성산 등을 일구어 놓는다. 그리고 전남지역에는 무등산, 조계산, 백운산 등을 솟구쳐 놓는다. 호남정맥의 이름은 호남지방을 달리는 산줄기라는 의미이다.

호남정맥은 왼쪽에 섬진강(395.7km), 오른쪽에 만경강(50.9km), 동진강(40.6km), 영산강(168.5km), 탐진강(26.1km), 기타(112.6km)를 가르는 분수령이 된다. 남쪽 산줄기 (주화산, 사자산)는 전라좌도, 우도를 가르는 중요한 분계이고, 서쪽 산줄기(사자산, 백운산)는 낙남정맥과 함께 우리나라의 남부 해안 문화권을 구획하는 경계선이기도 하다.

호남정맥을 행정구역으로 구분해 보면 전북지역은 진안, 완주, 임실, 정읍, 순창을 지나게 되며, 거리는 94.0km이다. 그리고 전, 남북의 경계지역인 도계를 지나는 거리는 61.0km이다. 전남지역은 장성, 담양, 곡성, 광주, 화순, 보성, 장흥, 구례, 광양까지 거리상 243.7km 이고, 호남의 14개 시군을 통과하게 되며,, 총거리는 398.7km이다.

산경표”의 호남정맥이 노령산맥으로 왜곡되어 지금까지 고쳐지지 않고 있다. 이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 지리학자인 “고토분지로”가 1902년~1903년까지 14개월에 걸쳐 땅속이 지질구조도를 그려서 연구발표한 “조선산악론”을 “야스쇼에이”가 1904년에 재구성한 “한국지리”를 근거로 우리나라 지리교과서를 고쳤으며, 이때부터 호남정맥이 노령산맥으로 왜곡되는 계기가 되었다.

노령산맥(蘆嶺山脈)의 출처는 전북 정읍시 입암면과 북이면 경계에 있는 “노령터널” 위의 “갈재”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는 예부터 갈대가 많아서 “갈재”라 하였으며, 또 하나는 갈재에서 노아낭자(蘆雅娘子)가 살았다고 해서 한자로 갈대 노(蘆).,재 령(嶺)을 써서 “노령”이라는 지명을 얻게 되었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노령산맥”은 추풍령 부근에서 소백산맥과 갈라져 서남방향으로 뻗어내려 영남과 호남지방과 경계를 이루는 산맥“이며, 노령(노령)은 전북 정읍시와 전남 장성군 사이에 있는 276m의 고개, 또는 ”갈재“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결국 일제(일제)는 1900년까지 우리나라 공인개념으로 사용했던 산경표와 백두대간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15개의 산줄기를 배척하고, 그 자리에 태백산맥을 비롯한 소백산맥과 노령산맥 등의 “산맥”이라는 정처 불명의 이름들을 그 자리에 앉혀 놓았던 것이다.

호남지방의 대표적 산줄기인 “호남정맥의” 이름은 276m의 조그마한 고개(峙)에 불과한 “노령”이라는 지명에다가 “산맥”을 합성하여 “노령산맥”으로 왜곡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호남지역의 학교의 교가나, 주요 관공서의 노랫말과 국어사전에 조차 “노령(蘆嶺)산맥”을 상징하는 단어들이 등장하고 있어 아직도 많은 곳에 일제의 잔재가 건재하게 자리 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사청산위원회에서도 이른 사실도 좀 다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자료:일부 펌)
 

by 야초 | 2007/02/11 10:26 | 호남정맥종주산행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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