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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여성 최초 히말라야 14좌 도전하는 산악인 고미영 (08.12.12)

빠꼼임 2009. 6. 18. 09:03
  신현대 - 저산넘어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히말라야는 전세계 산악인들의 이상향이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별명답게 험준한 고봉(高峰)이 즐비한 까닭이다. 그곳은 동시에 노스탤지어다.

극한의 기후 속 죽음의 공포와 고독에 맞서야 했던 경험은, 등반대원들에게 평생 잊히지 않을 기억으로 남는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에베레스트(8,848m)를 포함, 히말라야산맥과 카라코람산맥에 걸친 8천미터 이상 고봉을 가리켜 ‘14좌’라 한다.

1986년 이탈리아의 라인홀트 매스너가 이 14좌 등반에 처음 성공한 이래, 지구상에서 14좌를 정복한 인물은 지금까지 14명에 불과하다.

그 사이 수많은 산악인들이 설원 위에 잠들었다.


우리나라는 엄홍길, 박영석, 한왕용 등 14좌 완등 산악인을 무려 3명이나 배출한 산악강국이다. 특히 엄홍길은 주봉과 산줄기가 같다는 이유로

14좌에서 제외되었던 얄룽캉(8,505m)과 로체샤르(8,400m)까지 등정에 성공하며 지난해 ‘세계 최초 히말라야 16좌 완등’이라는 쾌거를 이룩했다.


그리고 지금, 또 한 명의 한국인이 역사를 쓰고 있다. 산악인 고미영. 그는 남자들도 번번이 실패한 14좌 완등에 여성으로서는 세계 최초로 도전 중이다.

2006년부터 시작해 이미 7개의 봉우리를 밟았다. 지금의 페이스대로라면 최단시간 등반 기록(기존의 최고기록은 8년)도 가능해 보인다. 고산등반의 경우

어떠한 루트로 등반을 하느냐도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이래저래 그의 도전은 놀라운 일임에 분명하다.


지난 여름 그는 세계 제2의 고봉이자 ‘죽음을 부르는 산’이라 명명된 K2(8,611m) 도전에 성공했다. 그러나 하산 도중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인해

함께 간 동료 세 명을 한꺼번에 잃었다. 아픔이 채 가시지 않은 10월 16일. 그는 또 다시 히말라야로 떠나 마나슬루(8,163m) 무산소 등반에 성공한다.


마나슬루에서 돌아와 다음 등반을 위해 훈련 중이던 그를 어렵게 만났다. K2 사고 이후 첫 언론 인터뷰였다. 약속장소에 들어서자 그가 반갑게 악수를 건네며

엽서 한 장을 내밀었다. 엽서에는 그동안의 등반 기록과 앞으로의 계획이 촘촘히 담겨있었다.



(엽서를 가리키며) 여기 적혀있는 내용이 14좌 등반에 관한 건가요?

네. 2011년도까지 계획되어있는데 저는 2010년까지 해내는 게 목표예요. 2년 동안 7개에 올랐으니 나머지 7개도 2년 동안 이뤄내고

싶어요. 물론 체력적으로도 힘들고, 무엇보다 경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쉽지 않은데 저는 다행히 소속사인 코오롱스포츠에서 든든히

지원을 해줘서 크게 문제될 게 없어요. 그래서 시작하게 된 것이기도 하고요.


고산등반에는 아무래도 장비가 중요할 테지요. 그런 면에서 소속사의 지원이 큰 역할을 하겠습니다.

엄홍길 선배나 박영석 선배도 처음엔 굉장히 힘들게 시작했어요. 10좌를 등반하니까 그제야 스폰서가 생기는 식이었죠.

스폰서 생기기 전에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가까스로 도움을 받은 거예요. 또 그 분들은 처음부터 14좌를 목표로 등반한 게 아니고

하나하나 도전하다가 14좌에 이르게 된 것이다 보니 엄홍길 선배가 낸 사진집만 봐도 초기 등반 당시의 사진이나 기록이

얼마 없는 거지요. 저는 소속사의 지원으로 처음부터 14좌 등반이라는 프로젝트를 갖고 시작할 수 있었던 덕분에 사진이나

동영상 같은 기록이 많아요. 이렇게 좋은 조건으로 등반하는 사람이 여태까지 없었어요.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웃음)


7대륙 최고봉에도 도전 중이죠?

올 초에 남미 아콩카과(6,959m)에 올랐고, 2월에는 아프리카 킬리만자로(5,895m) 정상을 밟았어요. 그 이전 에베레스트까지

3개를 완료했는데요. 7대륙 최고봉은 산이 어렵다기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서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저는 14좌 등반 다녀오면서

 짬짬이 도전하려고 해요.


‘잘 나가던’ 클라이밍 선수였다가 갑자기 고산등반으로 전향한 이유가 뭔가요? (그는 옛 농림부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당시 클라이밍을 시작했다. 이후 공무원을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선수생활을 시작, 국가대표로 활약하며 스포츠클라이밍

세계랭킹 5위까지 오른 이색 경력의 소유자다)

11년 동안 클라이밍 대표선수를 하면서 아시아 1등을 6번이나 해봤어요. 대회 나가니까 친하게 지내던 외국선수들은 이미

은퇴하고 없더라고요. 클라이밍이 워낙 근력을 쓰는 운동이라 나이 마흔 넘어서 선수생활을 지속한다면 현상유지마저 힘들지

않겠나하던 차에 등산학교 강사들끼리 고산등반을 갔던 게 결정적 계기가 됐어요. 처음 가본 건데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어요.

같이 간 사람들이 모두 놀랄 정도로 적응을 잘했죠. 출발하기 전에는 제 스스로도 걱정을 많이 했는데, 다녀와서는 소속사로부터

이참에 고산등반을 시작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 받았어요. ‘그래 한 번 해보자. 해보긴 해보되, 목표 없이 무작정 하느니

14좌 완등한 여성이 아직까지 세계에서 없었으니까 그걸 목표로 하자’며 시작했던 거죠.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간 공무원


공무원 시절 야유회 갔던 걸 계기로 산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고 밝힌 적이 있는데, 어떤 점이 그렇게 좋았나요.

가평에 있는 명지산으로 갔었는데 그때가 봄이었어요. 나무들이 햇빛에 비춰 파릇파릇 연녹색으로 반짝이는 게 너무 예뻤고,

땀 흘리며 한참을 올라가 능선에 섰을 때의 시원한 바람도 좋았어요. 무엇보다 정상에 다다랐을 때의 그 성취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날 이후로 산에 다녀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혼자서 한 2년 정도 전국 여기저기 찾아 다녔어요. 처음엔 가까운 곳에 당일치기로

다녀오다가 나중에는 텐트랑 버너 같은 장비까지 마련해서 산에서 자고 그랬어요. 산 정상이나 폭포 옆 등 기왕이면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곳을 찾아다니며 혼자 숙박을 했죠. 하루 이틀 자다보니 그게 일주일로 길어졌고요.


무섭지 않던가요?

전혀요. 남들은 폭포 옆에서 자면 이상한 환청도 들리고 한다던데 저는 산 속에 혼자 있을 때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어요.(웃음)

사람들이 안 다니는 길, 길이 나있지 않는 곳을 일부러 찾아다닌 것도 그 때문이죠. 그러던 중 북한산에 갔을 때 왼쪽은 백운대로

향하는 누구나 가기 쉬운 길이었고 오른 쪽은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었는데 저는 오른쪽 길을 택했어요. 거기서 암벽 타는

사람들을 만나 자연스럽게 배우게 된 거예요.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란 시가 있어요. ‘숲 속에 두 갈래의 길이 있었네.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네...’ 강의를 할 때 그런 말을 많이 해요. 수많은 갈림길에

맞닥뜨렸을 때 당신은 이곳으로 갈 것인가 저곳으로 갈 것인가, 선택하지 못하고 고민만 하고 있지 말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는 결코 없을 것이라고 강조하죠.


그렇다면 본인 스스로 생각할 때 가장 큰 선택의 순간은 언제였나요.

10년 이상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고 1997년 프랑스로 등반유학을 떠났을 때지요. 주변에서 극구 만류했는데, 전 더 잘 할 자신이

있었어요. 이걸로 먹고 살 수 있겠다는 확신도 들었고요. 공무원 생활이야 20년 30년을 해도 똑같은데, 클라이밍은 지금 안하면

놓친다는 생각뿐이었죠. 그때의 선택에 조금도 미련이 없어요.


부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죠? 산이 없는 동네잖아요. 탁 트인 평야와 바다를 보며 자라다가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곳을 오르내리고 있는데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부안에서 다녔는데 학교 가려면 40분 이상 걸어가야 했어요. 그렇게 9년을 다녔던 게 결국 기초체력을

다진 것 같아요. 어렸을 때 하는 운동이 중요하잖아요. 아버지가 아직 부안에 계세요. 올해 여든 둘이신데 술도 잘 드시고

굉장히 건강하세요. 고산등반을 다니면서 부모님에 대한 고마움을 많이 느꼈어요. 지금껏 고산병 때문에 고생한 적이

거의 없었거든요. 클라이밍 할 때는 내가 노력해서 잘하는 거라 생각했는데, 고산등반의 경우 노력한다고 해서 고소적응을

잘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안 뒤부터는 건강한 체질을 물려주신 부모님의 고마움을 절실히 깨달았죠.


뭐든 적극적인 성격인 것 같아요.

그런 편이예요.(웃음) 직장 다닐 때도 윗분이 뭐 좀 만들어봐라 하면 매달려서 기어이 만들어내곤 했어요. 시키기 전에 나서서

할 때도 많았죠. 한 번은 동료직원 가족이 급성백혈병으로 투병을 하게 되어 모두들 발만 구르며 안타까워하고 있었어요.

직장이 있던 수원에 공무원 연수기관이 많던 것에 착안해 ‘동료직원을 위해 일일찻집을 하자. 연말에 막걸리랑 고기랑 만들어서

 팔자.’해서 도와준 적이 있는데 평생 기억에 남을 만큼 기뻤어요. 봉사하는 것이 이런 기분이구나.


공무원으로 근무할 때의 예전 동료들에게서 지금도 연락이 오나요?

그럼요. 아직까지도 반갑게 통화해요. 자신들은 여전히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는데, 부럽고 대단하다며 많이들 응원해주시죠.

제가 농림부 산하 교육원에 근무했었어요. 그 당시에도 ‘도전과 열정’이라는 주제로 강의가 있었는데, 산악인들 섭외하는

일을 제가 직접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에 강의를 해달라고 저에게 연락이 왔어요.(웃음)





고산등반은 빙하 4천~5천미터 지점에 설치하는 베이스캠프로부터 시작된다. 짐을 나르고 길을 만드는 ‘셰르파(Sherpa)’가 합류하는 것도 이때다.

원래 셰르파는 히말라야 산속에 살고 있는 티베트계 종족을 뜻하는 말로, 고도에 적응된 체질에 성격이 온순해 히말라야를 찾는 각국 등반대에서

필수적으로 고용한다. 셰르파들은 정상까지 함께하기도 하지만, 스스로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하산을 한다.

베이스캠프에 물자조달과 행정 등이 가능하도록 각종 시설이 갖춰지면 이후 캠프1, 2, 3... 순으로 점점 높은 곳에 전진캠프를 설치하며 정상에 다가간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산소는 급격히 희박해지고 기상상황은 더욱 예측불능 상태로 치닫는다. 때문에 원정을 떠날 때 누가 정상을 밟게 될 지 절반쯤은

결정되지 않았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캠프마다 고소적응훈련을 하며 각자의 컨디션과 변수에 따라 어떤 대원은 정상 공격조를 위한 전진캠프

설치임무를 수행하고, 부상이 심한 대원은 베이스캠프로 돌아가기도 하는 식이다.


고미영씨는 올해 6월 21일 김재수(한국산악연맹 이사) 대장이 이끄는 K2원정대 베이스캠프에 합류, 그로부터 한 달 여 뒤 정상을 공격하고 있었다.

고층 건물 크기의 세락(얼음기둥)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구간도 잘 버텨내며 그는 정상을 밟았다. 그 외에도 몇 명의 대원이

정상의 쾌청한 날씨를 함께 만끽했다.

문제는 거기서부터였다. 하산을 하려고보니 셰르파가 갖고 있던 70미터 로프가 유일했다. 하산할 때의 사망률이 높은 K2에서 모두 그 로프 하나에

의지해 70미터씩 천천히 내려왔다. 거기에 탈진 직전의 외국인까지 합류했다. 그렇게 꼬박 24시간을 내려오고 있었다. 캠프가 가까워졌을 때

대원들 간 거리는 이미 벌어져 있었다. 캠프와 지척에 있는 마지막 위험구간에 접어들었을 때 정상등반 시 설치해두었던 고정로프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행히 3.5밀리미터의 가는 로프 하나가 또 발견됐다.

그렇게 한 명씩 한 명씩 캠프에 도착했다. 새벽 5시경 고씨도 가까스로 도착했다. 그런데 일부 대원들이 도착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후에 알았지만,

사고를 당한 대원들은 캠프에서 2시간 여 거리의 가까운 지점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지만, 무전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아침이 되어 세락이 무너지며 그들을 덮쳤다. 수월한 듯 진행되던 도전기에 고씨가 처음 겪었을 충격이 어떠했을지 짐작이 갔다.

조심스레 사고 당시의 이야기를 꺼냈다.



대원들이 내려오지 못하던 게 뭔가 석연치 않은 상황이라던데...

일단은 대원들이 많이 지쳐있었어요. 김재수 대장과 저는 근 몇 년간 고산등반을 계속 해왔는데, 오랜만에 등반을 한 대원들은

아무래도 고소에 적응하는 게 우리하고 달랐죠. 왜 너희만 먼저 내려왔냐는 말을 많이 들었어요. 너희는 살았고 그 대원들은 두고

내려와서 참변이 일어났다고들 하셨죠.(잠시 침묵) 그런데 내려올 때는 줄서서 같이 온다는 게 힘들어요. 어떤 팀은 한 두 시간 늦게

내려올 수도 있고... 고소적응에 어려움을 겪은 대원들은 훨씬 더 지쳐있는 상황이라 아무래도 내려오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었어요.

 사고를 당한 대원들이 내려오지 못하고 비박(침낭 없이 그대로 자는 것)을 한 지점은 텐트가 보이는 거리였어요. 캠프 쪽에서도

랜턴 불빛 몇 개가 보였다고 하더라고요. 만 하루를 견디고 내려온 사람들인데.. 아무리 지쳐도 두 시간 반이면 도착할 거리를

못 올 리가 없거든요. 그렇다면 마지막에 3.5밀리미터 로프를 발견 못하고 구조를 기다렸거나, 누군가가 부상을 당해 내려오지

 못하는 상황이지 않았을까 추측해요. 아침에 해가 밝으니까 로프를 발견했는지 내려오다가 세락이 덮친 거죠.


로프를 봤으면 충분히 내려왔을 거란 말이죠.

그렇죠. 로프가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어요. 그걸 못 봤을 확률이 높아요. 배터리가 다 나가서 무전으로 알려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어요. 거기서 비박을 할 이유가 없었는데...


당시에는 충격이 컸겠습니다.

사고가 난 곳이 8천1백미터 지점이고 마지막 캠프가 7천9백미터였어요. 마지막 캠프에서 3일 동안 머물렀는데 산소가 희박하니까

감정이 굉장히 무뎌지는 거예요. 눈물도 안 나다가 캠프에서 짐을 싸서 내려올 때 ‘다시는 이 사람들을 못 보는구나. 이 사람들은

차가운 바닥에 있어야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비로소 슬픔이 밀려오더라고요. 얼마 전 마나슬루 갈 때 그 대원들 사진을

가져가서 정상에 묻어주고 왔어요.


외국인 대원들과 함께 내려오느라 시간이 더 지체됐죠?

그 사람들은 이미 너무 많이 지쳐있었어요. 우리 줄을 붙잡지 않으면 위험하게 하산해야 하는 상황인데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어요.


서로 처음 보는 사람들일 텐데, 산악인으로서 본능적인 동료애네요.

등산은 서로 같이 뭉쳐서 어려운 걸 극복하며 올라가는 것이지 나만 잘나서 다른 사람 내팽개치고 혼자 정상에 올라갔다가 후다닥

내려오는 건 등산의 정신에 어긋나는 거라 생각해요.


마나슬루 오를 때도 심경이 복잡했겠어요.

오히려 그렇지는 않았어요. 김재수 대장과 둘이 갔는데 등반도 수월했고요. K2대원들 49재 끝나고 출발하느라 우리가 시기상으로

좀 늦게 도착했어요. 다른 팀들은 다 끝나고 내려간 상태였죠. 정상으로 가는 길이 허허벌판이라 바람을 안고 가는데 너무 추웠어요.

코하고 발가락에 동상이 걸렸는데 한국에 돌아왔을 때 멀리서 봐도 코만 시커멓게 보였어요. 발가락도 너무 아프니까 뒤뚱뒤뚱

걸어 다니고.(웃음) 무산소 등반이었기에 더 추웠던 것 같아요. 온몸에 혈액이 잘 돌아야 하는데 산소가 부족하니까 구석구석

못가잖아요. 내 몸이 탈진하면 심장에서 가장 필요한 부분부터 혈액을 돌게 하거든요. 중요한 부분에 보내고 손가락 발가락

코끝은 자동적으로 안보내도 된다고 인식을 하는 거예요. 자연히 동상에 쉽게 노출되는 거죠.
 



위에 가면 얼마나 추워요? 추워서 잠도 안 올 것 같은데.

그만큼 또 특수한 옷을 입고요. 밤에는 물 끓여서 따뜻한 물 자주 마시고, 수통 데워서 침낭 안에 넣고 자요. 밖에 나가기 전에는

버너 불 켜놓아서 텐트 안을 따뜻하게 하죠. 그래도 손발은 시려요. 그리고 날씨가 너무 안 좋을 때는 가급적 안 움직여요.

정상 공격할 때는 날씨가 성공을 좌우하거든요. 8천미터 이상쯤 되면 기상정보가 거의 안 맞긴 하지만.


텐트 안에서의 생활 좀 소개해 주세요.

밤에 텐트 안에 있으면 ‘설레임 반 걱정 반’의 심정이에요. 그럴 때는 글이 잘 써져서 수첩에 이것저것 많이 적어요. 원정 가면

대부분의 시간을 베이스캠프에서 지내요. 총 40일 일정이라면 실제 움직이는 건 15일 정도? 그래서 책도 많이 읽고, 십자수도 해요.

작년에 갔던 시샤팡마(8,027m)는 베이스캠프가 엄청 아름다웠어요. 호수도 있고, 병풍처럼 산에 둘러싸여 있는데요. 히말라야를

파노라마로 보면서 ‘세계에 이 풍경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정말 극소수일 텐데’하는 생각에 행복했죠. 그리고 7천5백미터 넘어가면

잠을 거의 못자요. 잠자는 것으로 스트레스 안 받으려고 그냥 편하게 눈을 감고 있어요. 음식 같은 경우 보통 6천5백미터 지점부터

거의 안 먹히는데요. 저는 7천미터 초반대 까지도 잘 먹어요. 그러다가 더 높은 곳으로 가면 음식 냄새가 많이 역해져요.

그러면 2~3일 정도는 안 먹고 가기도 하고. 마지막캠프부터는 누룽지 등 소화 잘되는 걸 먹죠.


열 시간 이상씩 등반하고 그러면 지루하지 않아요?

지루해요. 하하. 그나마 K2는 암벽이 많아서 덜했는데요. 설벽을 오를 때는 눈으로 된 풍경이 끝없이 이어지니 많이 지루해요.

그럴 때는 1부터 100까지 세고, 다 세면 또 1부터 시작하고 그래요. 그러다가 50까지 숨 안 쉬고 걸어보고, 더 높아지면 30까지,

그 이상은 20... 이렇게 나름대로 지루함을 이겨요. 다른 분들도 많이들 그렇게 하세요.


고산등반하면서 두렵다고 느꼈던 경험도 있나요?

눈앞이 하나도 안 보일 때가 있어요. 바로 앞에 사람이 가는데도 눈바람이 불어와 금방 길이 덮여요. 심할 때는 바로 옆 사람이

보이지는 않고 소리만 들려요. 방향감각도 제로가 되고요. 그때 길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오는데 일행이 옆에 있다는

생각에 참을 수 있는 것 같아요.


한국에 머무는 시간이 얼마 안 되겠어요.

3월에 나가서 10월까지 등반을 해요. 들어와도 열흘에서 2주 정도 있다가 바로 나가고요. 겨울에는 훈련을 해요. 심폐 운동으로

산 정상에 뛰어올라가고, 지구력 운동으로 20킬로그램 배낭 매고 지리산 종주하는 식으로 시간을 나눠서 하죠.


당장 내년 등반에 집중하겠지만, 먼 미래의 계획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클라이밍 할 때도 목표가 단기 중기 장기로 나뉘었어요. 단기목표는 어느 대회 우승, 중기는 세계랭킹 몇 위 안에 들기.

그런 식으로 항상 목표가 있었죠.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단기목표는 내년 봄 마칼루(8,463m) 등정이지요. 14좌에서 앞으로 남은

 7개가 결코 쉽지 않겠지만 차근차근 하나씩 성공하다보면 결국 정상에 가있겠죠. 성공이란, 차근차근 작은 목표를 성취해내는

일인 것 같아요. 2년 이내 14좌 목표를 달성하면 그 이후에는 대학원에 진학하고 싶고요. 또 하나의 계획이 있다면 8천미터급에

도전해보고 싶은 일반인들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해보고 싶어요.


일반인들도 가능할까요?

많은 분들이 고산등반을 하기에 자신은 늦지 않았냐고 말씀하시는데, 전 40대, 50대가 제일 좋은 시기 같아요. 20대에 고산등반

잘하는 사람은 세계 어디에도 없어요. 체력을 믿으니까 빨리 가거든요. 그만큼 고산병도 빨리 와요. 하지만 나이 든 분들은

자기 체력에 맞게 차근차근 걸어요. 인생과 비슷한 것 같아요. 한 번에 정상가겠다 하면 얼마나 힘들어요. 고산등반은 다리 한 번

올릴 때마다 2.5킬로그램을 들어 올리는 셈인데, 당장은 한 걸음 한 걸음 숨도 차고 무겁겠지만 그걸 견디고 목표인 캠프까지 가면

먹을 곳도 쉴 곳도 잠잘 곳도 있어요. 그곳에서 휴식하며 회복되어야 또 그다음 등반을 할 수 있잖아요.
 



산을 오르는 이에게 왜 산을 오르느냐고 묻는 것만큼 우문이 없을 것이다. 쉬운 듯 보이지만 결코 움켜쥘 수 없는 우리 인생과 너무도 닮아있기 때문이리라.

등산화 끈을 동여매고 이제 막 집을 나선 사람과, 능선에 도달해 가쁜 숨을 고르고 있을 사람. 정상에서 무게를 훌훌 털고 내려오는 사람과,

하산 후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단잠을 청하며 다음 산행을 기약할 사람까지...

지금 이 시간에도 사람들은 수만 가지의 각기 다른 느낌으로 산을 오르내린다.

 

 

 

 

출처 : 설악은 설악이어라
글쓴이 : 노들강변 원글보기
메모 : 고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