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김형석의 100세 일기(손주들에게 줄 세뱃돈이 떨어졌다)

빠꼼임 2020. 1. 21. 08:36

[Why] 손주들에게 줄 세뱃돈이 떨어졌다

조선일보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선생님 용돈으로 써주세요" 제자가 찔러준 봉투…
세뱃돈으로 시작한 인생… 용돈으로 마무리되는 듯


김형석의 100세 일기 일러스트
교육자는 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심는 일을 한다. 열매는 사회가 거둔다. 백세를 헤아리게 되니까, 내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내가 찾아보는 때가 있다. 제자들이 성공해서 나보다 훌륭하게 되었을 때가 그렇다. 지난해 가을 제자와 함께 인촌상을 받았을 때는 정말로 자랑스러웠다. 그런 일은 매우 드물기 때문이다.

몇 해 전에는 내 제자가 사회적인 공로상을 받게 되었다. 저녁 시간이었으나 식장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곧 시작할 시간에 들어섰는데, 수상자 자리에 앉아 있던 제자가 찾아와 내 코트를 받아 걸어 주면서 안내해 주었다. 주빈은 제자였다. 상을 받은 그가 답사를 했다. 본래 말이 적고 앞장서기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오늘까지 살아오면서도 그러했으나 앞으로도 은사이신 김 선생님의 뜻을 기리면서 살게 될 것"이라는 답사를 했다. 나에게는 그 마음이 분에 넘치는 고마움이었다.

시상식을 마칠 때 제자는 내 옆까지 왔다. 귀에 가까이 얼굴을 대면서 "선생님 제 얘기가 들리세요?"라고 묻더니 "제가 선생님 코트에 봉투를 하나 넣었는데요. 용돈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허물 마시고 써주세요"라면서 돌아갔다.

여러 사람과 인사를 나누고 좀 늦게 집에 돌아왔다. 코트 주머니에는 두툼한 봉투가 들어 있었다. 왜 그런지 어렸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설날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이 집 저 집을 찾아다니면서 세뱃돈을 받던 옛날이 생각났다. 그 세뱃돈으로 딱지도 사고 장난감도 사서 놀던 어렸을 때 친구가 그리워졌다. 일 년에 한 번씩 기다려지는 경사스러운 행사였다.

그로부터 90년 세월이 흘렀다. 요사이는 내 동료나 후배 교수들이 늙어서 수입이 없으니까 용돈 타령하는 얘기들을 듣는다. 설날이 가까워지면 아들딸들에게 "손주들에게 줄 세뱃돈이 떨어졌다"고 미리 말해두면 자녀들이 용돈으로 쓰시라면서 현금을 미리 보내온다. 그중에서 일부는 세뱃돈으로 주고 나머지는 용돈으로 쓴다는 얘기다. 또 어떤 친구는 생일이 되면 자녀들에게 "선물은 필요 없으니까 알아서 하라"고 말해 두면 현금 봉투가 온다는 방법을 알려주기도 한다.

생각해 보면 인생은 세뱃돈으로 시작했다가 용돈으로 마무리되는 것 같다. 세뱃돈은 즐거움의 시작이었으나 용돈은 인생을 마무리
하는 절차인지 모른다. 내 인생도 세뱃돈의 즐거움으로 시작했으나 용돈으로 채워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오늘의 용돈은 성격이 다르다. 생각해보면 내가 내 제자를 사랑한 것보다 제자가 나를 더 사랑했던 것이다. 용돈이 아니라도 좋다. 많은 제자가 나를 그렇게 기억하며 살아간다면 나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일생을 살아온 것이다. 사랑이 최선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5/11/201805110175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