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프레소] 한국 정치 닮아가는 아파트 소송 행태
주민 마음 더 얻을 생각보다
소송에 맞소송, 선관위까지…
연이은 악수 어디서 배웠을까
정치가 공동체 수준까지 낮춘다
“선거관리위원(장) 해촉에 관한 건.”
몇 달째 입주자대표회의(입대의) 회장 해임 주민투표에 관한 살벌한 제목의 공고가 붙어 있던 아파트 출입구에 새 게시물이 추가됐다. 입대의 선거를 관리·감독하는 선관위원장 B씨가 해촉됐다는 내용이었다. 입대의 전 회장 A씨 해임 주민투표를 둘러싼 갈등이 선관위까지 번진 결과다.
지난 9월의 칼럼에서 한 차례 다룬 사안을 다시 꺼낸 건, 선관위까지 확전된 과정이 시민들의 마음은 도외시하고 있는 정치권의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먼저 회장 A씨 해임 투표는 7월과 10월 두 차례 진행됐다. A씨는 7월 투표에 대해 절차를 문제 삼아 가처분 신청(소송)을 내 이겼다. 그리고 재판 비용을 받기 위해 관리비 계좌를 압류했다. A씨 반대파는 다시 주민투표를 추진했다. 그리고 전체 세대의 65.7%가 참여해, 그 가운데 10분의 9 이상이 해임에 찬성했다. 첫 번째 주민투표(22.1%)의 세 배가 넘는 주민이 참여했다. 정치학 용어를 빌리자면 유권자의 대규모 ‘동원’이 일어난 셈이다.
역설적으로 선관위가 논란의 중심에 선 건 그다음이다. A씨가 또 가처분 신청을 할 게 분명한 상황에서 입대의는 변호사를 선임하겠다며 비용 지출을 위한 주민 동의를 받기 시작했다. 여론전을 의도한 것인지 플랭카드도 내걸었는데, A씨 이름도 기재되었다. A씨가 직접 나서지는 않았지만, 그를 옹호하는 이들은 주민 동의를 막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다. 입대의가 변호사를 고용하지 못해 패소하면, 주민투표를 다시 추진하기 어려워질 거라는 판단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A씨와 그에 반대하는 다른 입대의 대표의 갈등에 왜 주민 돈을 쓰냐는 요지의 유인물이 익명으로 배포되기도 했다.
B씨가 선관위원장 권한을 남용한 사건이 터진 것은 그다음의 일이다. B씨는 선관위 의결을 거치지 않고 주민 동의가 절차상 문제가 있어 무효라는 내용의 공고문을 선관위원장 명의로 게시했다. 해촉 사유서에 따르면 B씨는 주민 동의가 무효가 되지 않을 경우 A씨가 선관위원들을 상대로 소송을 걸 수 있다고 회의 도중 말했다. B씨의 무리한 시도는 아파트 주민들의 빈축을 샀고, 그래서인지 입대의 회장 해임 찬성과 비슷한 규모로 많은 주민이 변호사비 지출에 동의했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됐지만 A씨는 정작 주민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한 행동에는 소극적이었다. 주민투표를 법 논리로 무산시키려는 데만 매달렸다. 해임 찬성이 압도하는 상황에서 절차를 문제 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10월 주민투표를 대상으로 A씨가 낸 가처분 소송에서 재판부는 절차적 하자가 있다고 하더라도 해임 투표를 무효로 할 만큼 중대하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판결했다.
A씨와 그 지지자들이 악수를 연발하다, 결국 선관위를 이용해 판을 뒤집으려고 시도했던 모습은 딱 요즘 정치권에서 보이는 행태다. 매일 생중계되는 대통령실과 여의도의 모습은 어떻게 유권자의 마음을 얻고 리스크를 방비해야 하는지 제대로 된 본보기를 보이지 않고 도리어 기기묘묘한 꼼수와 무리수에 매달린다. 대화와 타협엔 ‘배신’이란 낙인을 찍고 극단적인 대립을 조장하는 진영 정치에 의존한다. 패배한 선거에서 대단한 부정이나 편법이 있던 것처럼 음모론을 떠드는 행태도 일상화됐다.
정치권이 공동체가 본받을 만한 모습을 보였다면, A씨가 정치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는 데 조금은 합리적인 방법을 쓰지 않았을까. 또 주민들의 마음을 얻는 걸 최우선 목표로 삼지 않았을까. 선관위까지 정치 공방에 오염된 한 아파트 생활 정치를 보며 드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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