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y

김형석의 100세 일기

빠꼼임 2020. 1. 20. 10:28

[아무튼, 주말] 신사참배후 교장 선생님 뺨에 눈물, 어렸던 내 가슴에도…           

  •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        

[김형석의 100세 일기]

[김형석의 100세 일기]
일러스트=안병현
1930년대 평양 숭실중학교 3학년 말이었다. 교장이셨던 선교사 맥큔(한국명 윤산온) 선생이 일제강점기 때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교장직에서 해임돼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어린 학생들 앞에 나타난 교장은 긴말을 하지 않았다. 오른 주먹을 불끈 쥐고 높이 쳐들면서 "Do(하라)!"라고 일곱 번 반복했다. 마지막 외침은 목이 터질 듯한 큰 소리였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위해 준비해 두었던 책을 한 권씩 나누어 주었다. 예수께서 너희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는 책자였다.

나는 신사참배를 하고 학업을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 교회 김철훈 목사의 가르침과 교장 선생의 뜻을 따라 학교를 떠날 것인가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되었다. 같은 반에 있던 시인 윤동주는 자퇴하고 만주로 떠나갔다. 나도 학교를 자퇴했다.

그러는 동안에 평양 기독교계의 유지들이 여러 가지로 고민하다가 500명이 넘는 한국 학생들을 일본 학교에 맡길 수는 없으니까, 신사참배를 하더라도 우리 아들들을 우리가 키우자는 결정을 내렸다. 숭실 전문학교의 교수이면서 교회 장로였던 정두현 선생이 교장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나는 1년 동안 학교를 떠나 평양 부립 도서관에 다니면서 독학을 시도하였으나, 스승의 권고로 하는 수 없이 복교하기로 했다. 그 당시 남매학교인 숭의여자중학교에 다니던 이화여대 김옥길 총장은 폐교와 더불어 공립학교에 편입되었다.

4학년 학생으로 복학한 첫 학기 초에 우리는 평양신사로 참배를 가야 했다. 일제가 명령하는 규정이었을 것이다. 평양에 있는 모든 공사립 중학교와 기관들이 신사참배를 강요당했던 것이다.

신궁 앞 넓은 뜰 안에 전교생이 도열해 섰다. 교장선생이 맨 앞에 혼자 서고 그 뒤에는 선생들이 횡렬로 정돈해 섰다. 우리 학생들은 학년과 학급에 따라 종렬로 자리를 채운다. 그러고는 체육선생의 구령에 따라 최경례를 하는 절차였다. 최경례는 가장 존중한다는 뜻을 담아 90도로 경의를 표하는 절이다.

그 절차가 끝나면 다음 학교에 자리를 양도하기 위해 순서에 따라 퇴장한다. 나는 키가 작은 편이었다. 앞자리에 섰다가 우리 앞을 지나가는 교장선생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교장선생의 주름 잡힌 뺨으로 두 줄기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눈물을 닦을 수가 없으니까 그대로 참고 계셨던
것이다.

내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1년 동안 학교를 떠나 있으면서 나라 없어 당하는 아픔은 어린 가슴에도 설움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교장선생은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지금은 그런 스승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 모교에 다녀왔다. 그날의 일들이 기억에 떠올랐다. 그때 제자들을 위한 스승의 눈물이 없었다면 철없던 우리는 어떻게 자랐을까.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8/11/30/2018113001748.html

'why'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형석의 100세 일기[막내딸의 아들이 결혼했다]  (0) 2020.01.20
김형석의 100세 일기  (0) 2020.01.20
김형석의 100세 일기  (0) 2020.01.20
김형석의 100세 일기  (0) 2020.01.20
김형석의 100세 일기  (0) 2020.01.19